태풍 지나가는 날

 

1. 

태풍이 지나가는 날, 온 국민은 잠시 하나가 된다. 이 거대한 바람 앞에서, 인간은 잠시지만 대체적으로 평등해진다.

 

그리고 높은 건물에 살든, 낮은 건물에 살든, 대체적으로 약간씩 거대한 바람이 주는 공포 앞에 서게 된다.

 

지진도 가난을 차별한다는 연구들은 이제 유명해졌고, 사실 데이터 작업을 해보면 태풍도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남미에 지진이 생기면, 더 가난한 사람들의 집들이 무너지고, 빈민가가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

 

오래된 주택의 창문은 문을 열면, 창틀째로 날아갈 듯이 흔들린다. 창문을 못 열고 있다. 덥다고 불평할까 하다가도 더운 게 문제가 아닌 사람이 많을 듯하여.

 

한국이 과장되었든, 아니든, 태풍의 영향권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야옹구는 아무 생각 없이 디비지게 잠만 자고 있다. 참 얼마나 평온한 존재인가.

 

 

 

(얘는 가끔 잘 때 보면 얼굴이 웃는 얼굴이다.)

 

 2.

 

민주당 경선이 지나가는 중이다.

 

누굴 찍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머리 수라도 하나 보태줄까 싶어서 선거인단에 신청을 했는데, 그냥 투표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투표는 꼬박꼬박 한 편이고, 피곤하게 신청한 다음에 안 한 적은 없었는데, 이번 경선에는 그냥 투표하지 말까 한다.

 

식자우환이라고 했나? 그래, 환이 많다.

 

나중에 통합후보 결정되면, 대선 때에 투표는 할 생각이다. 뭐, 싫든 좋든, 그 때는 찍을 거지만, 찍는다고 꼭 지지하는 것도 아니쟎아?

 

자기 편 지지 안할 거면 닥치고 투표나 하라는 얘기에 꼬박꼬박 대꾸하기도 피곤한 일이고, 왜 너는 얘 안 좋아해, 왜 너는 얘 지지 안해, 그런 말을 듣고 있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좋으면 니가 충분히 좋아해주면 되쟎아.

 

마음이 안 가는데, 어떻게 해.

 

논리적으로도 이해 못하겠고, 감성도 안 가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쪽에 줄을 댄다. 기절초풍, 많은 사람들이 줄을 댄다.

 

사실 이 와중에 줄을 댔다고 해서, 마치 친일파를 우리가 한 번도 정리한 적이 없는 역사를 가진 것처럼, 어용교수들을 정리한 적이 없는 이 나라에서 손해볼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너도나도 앞 다투어서 줄 대는.

 

태풍 지나가는 한 가운데, 고양이들 개집 안으로 먹을 거 밀어넣어 주고, 그래도 좀 잘 버텨보라고 육포도 꺼내놓아주면서, 이 얼마나 한가하고 평온한 태풍 보내기인가, 잠시 생각을 했다.

 

이 또한, 결국은 모두 지나가리라.

 

 

 

(이 태풍 와중에 NHK 인터뷰 시간이 정확하게 서울에 태풍이 통과한다는 3시에 잡혔다. 9월 8일 방송이래나, 더는 미루기가 어려워서 꾸역꾸역 영화사에 기어나갔다. 카메라 끈 붙잡고 놀아달라는 녀석을 보면서 나도 대략난감.)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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