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노회찬 부탁으로 강연도 참 많이 했었다..)

 

 

어제 정의당 강의는 경기도 당원들 대상으로 한 당원교육이다. 움직이기 싫어서 거의 꼼짝도 안 하는데, 정의당 경기당 당원교육까지 간 건, 진짜로 노회찬 이후로 마음이 너무 짠해져서 그렇다. 어차피 해주기로 한 거, 가장 최신 얘기로 정성스럽게 준비할 생각이었다. 비슷한 때 광주 정의당에서도 강연 부탁이 왔다. 같은 내용으로 할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성이라는 것은, 가장 최근의 얘기, 다른 데서 아직 발표하지 않은 내용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던 얘기를 가지고 하면, 폼도 나고, 준비도 쉽다. 아니, 준비랄 게 없을 경우도 많다. 그래도 늘 하던 얘기라서, 빠다 바란듯이 미끄럽게 넘어간다. 나는 이런 것을 싫어한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한 얘기 또 하는데, 이게 무슨 녹음 테이프냐 싶은 생각이 든다. 하던 얘기 또 하는 것을 계속 반복하는 건, 진짜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강연을 처음 시작할 때, 내가 나한테 했던 약속이 있다. “같은 강연은 안 한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 거칠지만 그 때 새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들을 가지고 얘기를 했다. 원래의 주제와 새로운 생각, 이런 것들이 섞였다.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진짜로 고로운 일이지만, 길게 보면 그게 도움이 된다.

 

시간이 흘러서 사람들이 파워포인트를 쓰기 시작했다. 금강기획 같은 기획사에서도 아직 파워포인트 도입하기 이전 시절부터 나는 파워포인트를 썼다. 수학식 하나하나 다 에미네이션 걸고, xy축에서 지시선, 방향선, 전부 날려오는 짓을 했다. 그게 96, 97년이니, 나도 좀 난리부르스이기는 했다. 사장단 회의에서는 그렇게까지 할 시간은 없었고, 부사장단 회의에서는 그 난리를 쳤다. 그렇지만 그게 내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UN 시절에도 파워포인트 썼다.

 

사실 강연하는 입장에서는 파워포인트가 훨씬 편하다. 한 번 만들어 놓고, 그냥 조금씩 고쳐서 때우면 된다. 그리고 좀 시간이 지나다 보니, 만들어 놓은 걸 가지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면, 거절하면 된다. 더 편하다. 그러나 했던 걸 또 하는 일이 벌어진다. 나는 가장 최근의 내용 그리고 아직 얘기하지 않은 걸 가지고 얘기하지 않으면, 내가 부디낀다. 뭐 하는 짓이냐, 시방.

 

그렇다고 매번 파워포인트를 만들 수는 없다. 간단하게 해도 하루는 넘어간다. 그래서 결국 내린 결론이, 안 한다.. 돈이 필요해서 강연을 한다고 생각하면 내가 견딜 수가 없다. 그래도 그렇게 막 살지는 않았다. 맨 앞에 서서, 가장 힘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했지, 돈도 필요하고, 에 또, 이렇게 생각하면서 산 적은 없다. 또 강연비를 받아야 할 정도로, 그렇게 생활이 궁핍한 것도 아니다.

 

정치인 중에서 내 강의를 가장 처음 들었던 사람은 노회찬과 단병호였다. 수많은 사람에게 강의를 해주었는데, 그래도 선생격이라고 꼬박꼬박 인사하는 사람은 단병호 정도였다. 노회찬은 친구 같은 처지라서, 들었니 말았니, 그럴 처지는 아니고. 대학교나 대학원에서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나, 같이 스터디하던 후배를 제외하면 가장 많이 강의를 들은 사람은 정세균과 원혜영이다. 국감 때 정세균 외국 갔을 때를 제외하면, 개근했다. 안 불렀는데도 가장 많이 왔던 사람은 진선미와 박병석이었다. 그 때는 그냥 판서했던 때도 있고, 파워포인트 만들었을 때도 있다.

 

회사 사장들 강연 부탁도 많이 왔었다. 한 번은 진짜로 전경련 회장단 강연 부탁이 왔다. 고민하다가 할까 했다. 일본에서 하라는 거라서, 일본 정도는 나도 갈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니미럴.. 골프장에서 골프치다가 하라는 거다. 골프 안 치는데요? 그냥 치는 척만 하시면 돼요. 싫은데요. 그래도 이런 기회가.. 그래도 싫어요. 안 했다. 대통령을 만나라고 해도 골프 치면서, 안 한다. 남들한테 골프 쳐라 마라, 이러지는 않지만, 나는 안 친다.

 

강연이,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명박이, 순실이, 이런 애들이 황당하게 하고 있을 때에는 그래도 조그맣게라도 모여서 서로 고민하고 하다못해 고통이라도 나누는 게 중요했던 것 같다. 그 때는 나도 전국을 돌아다녔다. 갔다왔다, 차비 빼면 진짜 내 돈이 더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시대를 같이 버티고 이겨내는데, 뭐라도 도움이 되면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시간은 변했다. 다시 니 편, 내 편 갈리기 시작한다. 굳이 나까지 나서서 이 편, 저 편,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생각을 만들고, 시대의 최전선에 가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분석하고 분석한 내용을 정리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타협점을 찾았다. 책 나오면 하는 의례적 강연이나 신세진 사람이 하는 부탁, 그 정도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눈 오는 겨울, 더운 여름에도 아무 것도 안 하기로 했다. , 가을로 피하기 어려운 강연 몇 번, 그게 내가 찾은 타협점이다. 물론 시민운동 차원에서 하는 건, 돈 받지 않고 내 돈 내서라도 한다. 사회과학 특강 같은 것은 정말로 무료로, 가끔은 맥주 한 잔씩 사기도 하면서 했었다. 그런 게 시민운동 차원에서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지금은 애 둘 보면서 뭔가 하는 처지에 당분간은 힘들다.

 

그리고 파워포인트 만드는 일은 안 하기로 했다. 귀찮아서가 아니다. 판서가 더 좋은 강의 방식이라서 그렇다. 그 때 그 때 중요한 일, 아직 하지 않은 얘기를 전부 정리하는 게, 꼭 새로운 얘기를 위해서 좋은 방식은 아니다. 그러면 라디오 같은 매체는 전부 죽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라디오도 얘기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데 좋은 방식이다. 그래서 팟캐스트라는 매체가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부 보여줘봐, 시각형 정보가 전부는 아니다.

 

지난 주 토요일날 정의당 당원교육은 그렇게 생각한 첫 시도다. 마침 칠판이 있다고 했다. 몇 년 전에는 칠판 놓고 강의하면 칠판 3번 정도는 새로 썼던 것 같다. 내가 정렬적이던 시대다. 그렇게 판서하면서 눈사람형 경제니 8자형 경제 같은 개념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제는 나도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강의 준비하면서 판서 분량으로 1장 정도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개념 10개 정도 썼는데, 끝난 것 같다. 그 대신 설명을 많이, 길게 했다. 파워포인트 20, 30컷 만들어 놓고. 시간 맞추기 위해서 막 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개념 열 개가 안 된다. 그리고 새로 분석하거나, 새로 알게 된 것은 한두 개 밖에 안된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사실 한 개 분량도 안 되는 경우도 있다.

 

11월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것도 안 한다고 철썩 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뭐가 뭐가 엄청나게 온다. 돈 많이 준다고 하는 게 오면, 사실 나도 흔들린다. 마침 또 그렇다. 그래도 그냥, 힘들다고 하고 말았다. 새로운 얘기나 새로운 분석을 계속 만들지 않으면, 시대는 퇴행으로 간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 그게 인간의 2대 욕망 중 하나라고 프로이드가 말했다. 타나토스라고 부르는, 죽음의 욕망이 후기 프로이드의 2대 축 중의 하나다. 계속해서 변화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하는 것, 이걸 프로이드는 에로스에 속한 영역이라고 했다. 20대 초, 나는 타나토스보다는 에르스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타노트>는 그 후에 나왔다. 같은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그 시절 베르베르는 매우 프로이드적이었다.

 

강연도 요즘은 상업화 정도가 아니라 산업화가 되었다. 강연산업에서 강연자의 수명을 보통 2년 정도로 본다는 것 같다. 2년이면 한 얘기의 수많은 변주도 거의 다 끝나고, 인기도 떨어지고. 물론 그걸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도 새로운 것을 만들기는 하는데, 그것까지 포함해서 평균적으로 2년이라고 본다. 내가 처음 대중 강연한 것부터 치면 15년 정도 된 것 같다. 강연 논리 그대로 따라가면 2년 후에 아주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내가 성격이 지랄맞아서 이렇게 저렇게 했던 결정들이, 우연이지만 아주 나중에 산업적 논리와 분석과 맞추어 보니까 내가 내린 선택들이 맞는 것 같다.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결국은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많은 시간과 많은 집중을 필요로 한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겠지만, 나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다.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하고, 계속 관찰한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시간 많이 들어간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지 않는 것, 이게 내가 지키려고 하는 딱 하나의 명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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