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1981년 강연을 정리한 책이다. 레이건이 막 등장하고, 프랑스의 미테랑이 대통령 되는 그 즈음의 얘기다. 그 후로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돌풍이 불었고, 현실 사회주의도 붕괴했다. 그리고 21세기가 되었다. 이 케케묵은 책을 지금 와서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물론 읽어서 손해볼 책은 없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나는 경제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게 좀, 모호하다. 많은 경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되는 경우가 많다. 한동안 다들 이 표현을 앞에 걸기는 했는데, 하고 싶은 얘기가 저마다 다르다. connotation이라고 부르는 문제가 좀 생긴다. 다들 이해하는 함의가 달라서 서로 얘기가 잘 안 된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 아니면 아주 제한적으로만 이 단어를 쓴다.

 

또 한 가지는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목적과 수단에 대해서, 민주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뒤집히기도 한다. 어떤 상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민주주의이지만, 많은 경우 민주주의가 그 자체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결핍으로부터 발생하는 수단과 목적의 도치 현상 같은 것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경제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나는 잘 쓰지 않는다. 경제가 원래도 좀 애매한데, 가급적이면 애매한 표현들을 나는 좀 줄이고 싶어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라는 오래된 표현을 다시 집어든 것은, 대한항공 조씨 일가 등의 희한한 행태로 기업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 좀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게, 좀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1915년 연방대법원은 종업원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한 계약을 불법으로 본 캔자스 주법을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75페이지,

 

20세기 초반, 미국의 분위기도 좀 살벌했던 것 같다. 캔자스에서 노조가입 안된다고 하면 안되요, 이랬더니 바로 위헌 때려버린.

 

책 전체는 기업의 소유권, 즉 이건 기업이 내 꺼니까 내 맘대로 할래요 하는 기업 우선주의와, 사회의 일반적인 정의에 대한 규율이 있다, 이 두 가지의 충돌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뒷부분으로 가면서 자치기업(self-governing enterprise)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 노동자들이 회사를 소유하거나 혹은 의사결정에 중요하게 참여할 수 있는가, 있다면 그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 그런 얘기다. 요즘의 눈으로 보면 협동조합이나 종업원 지주제 정도의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상당히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측면도 있다.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권이 한참 경쟁하던 시절의 얘기니까, 기업이라는 것의 운영방식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지 모르지만, 내가 경영학에 대한 내 입장에 대해서 한참 고민하던 시절이 생각나서, 나는 나름 감회를 가지고 읽었다.

 

프랑스에 갔더니,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을 괜히 내가 학부 시절에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학이 좋아요, 경영학이 좋아요, 우린 이런 질문에 종종 부딪혔었다. 된장프랑스에는 경영학이 학부에 없쟎아! 대학원부터 시작된다. 별 필요도 없는 고민을

 

나는 조직론을 대학원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기업이라는 생산의 단위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어떻게 결정하는가? 실제로는 완전히 다를 것 같지만, 생산과 유통을 결정하는 조직론적 구성에서 많이 다를까? 원론적으로는 엄청나게 다르다고 배웠는데, 막상 기술적 결정을 하는 데에서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버트 달이 자치기업을 보는 눈이 그렇다. 그래서 후반부로 가면서 좀 더 익숙했던, 20대의 내가 많이 생각했던 질문들을 만나게 되었다. 뒷부분의 얘기는 우리 식으로 하면 협동조합의 운영원리에 관한 얘기들이다. 사회적 경제를 생각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고.

 

가슴에 남는 구절들이 좀 있다.

 

왜냐하면, 공정이나 정의를 믿고 있기 때문에, 정치 질서는 공정한 데 반해 경제 질서는 지독히도 불공정하면 이것은 불행한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게 요즘 우리 얘기랑 상당히 비슷했다. 정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치에만 많은 사람들이 눈을 돌리면 지독할 정도로 불공정한 지금의 경제 구조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안 갖게 될 수도 있다. 유행하는 용어로는 격차 사회. 뜨끔했다.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라고 간판을 달아도 좋을 듯 싶다. 한 때 최장집 선생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로 빅히트가 나온 적이 있다. 그 출발점으로, 옛날 애기 보듯이 속 편하게 읽으면 좋을 책일 것 같다 (토크빌 얘기가 전반에 길게 나오는데, 토크빌이 익숙치 않으면 대충 무시하고 넘어가고 읽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것 같다. 어쨌든 미국 민주주의에 관한 토크빌이 미국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독서감상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던 슈트 스토리  (3) 2018.12.01
조선일보 책 칼럼 연재 시작...  (2) 2018.08.13
정순철 평전 독서 중  (0) 2018.04.20
[본책] 광주는 내게 무슨 의미일까?  (1) 2017.09.03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  (2) 2017.05.28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