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과 생협의 서열 다툼
아기가 태어난 날, 엄마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는 완전한 야생동물이라서 정말로 꾀병 같은 건 없다. 아프다 싶으면 그냥 쓰러지는 게 다반사라,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내내 마음 한 켠에 무거움이 있었는데, 오늘 나오는 길에 보니까 폭우가 내리는 중 엄마 고양이가 나무 한 켠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정을 주고, 돌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런 생각들을 더 해보게 된다.
늘 생각나는 중학교 때 단짝 친구 중에, 광복이라는 녀석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독립투사로 알고 있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며 그렇게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들었다. 다른 초등학교나 중학교 친구들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되거나, 이래저래 다시 보게 되었는데, 여전히 연락이 안되는 친구 중의 한 명이다.
대학에 갔을까?
광복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친구의 삶이, 돌아보면 또 생각나고, 돌아보면 또 생각난다.
어쨌든 이 땅은 친일파들의 나라 아닌가? 친일파들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친미파가 되었고, 그들은 결국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던 나라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의 후손은 어렵게 되었고, 돈으로 많은 것의 서열이 만들어지는 이 나라에서 결국 어렵게 되었다. 그 한편으로, 70~80년대에 땅투기하거나 재개발로 난데없는 갑부가 된 졸부들이 어느덧 '메인 스트림'이라고 부르면서 떵떵거리며 살게 된 나라 아닌가?
엄마 고양이가 잠시 보이지 않는 동안, 마당 고양이들에게 캔을 뜯어 주었다. 바보 삼촌은 아기들과 서열 다툼을 하지는 않는다. 얘가 바보 같아 보여도, 마음이 참 넓고, 이것저것 나누어주는데 박색하지는 않다.
바보 삼촌이 다 먹고 떠나간 다음, 생협도 먹겠다고 나섰다가, 강북한테 몇 대 맞았다.
고양이과 동물들이 후려치는 힘이 만만치 않다. 싸울 때 주로 쓰는 무기가 그야말로 펀치인데, 생협이 강북에게 펀치 몇 방을 제대로 맞았다.
지켜보는 나야, 그냥 마음이 아플 뿐이다.
자기들 사이의 질서이고, 그들 세계의 일이라, 개입할 수도 없고, 개입할 방법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싸움이 커지지 않도록, 그리고 힘이 없어도 충분히 먹을 수 있게 넉넉하게 주는 방법 밖에 없다.
워낙 큰 캔을 뜯어줘서, 생협에게도 차례가 갔다.
(얘들 밥 먹이는 게 큰 일인게, 내가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검둥이가 와서 나머지를 다 먹어치운다. 검둥이는 새로 회색빛 애인이 생겼는데, 거기도 아주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3마리 달려 있다. 그 검둥이의 회색빛 애인과 엄마고양이, 그리고 바보 삼촌이 며칠 전에 한바탕 신경전을 벌인 적이 있다.)
고양이들의 갈등을 보면서, 한국에서 어느덧 무시할 수 없는 지배층으로 성장해버린 졸부들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졸부라는 말은 어느새 쓰지 않는다. 스노비즘이라는 19세기 유럽에서 주로 쓰던 말이 귀족들의 꼴불견을 사회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단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에게는 졸부라는 말이 스노비즘과 유사한 기능을 했다.
이제는 그 졸부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졸지에 부자가 된지 20년 가량 지나버렸으니, 어느새 '졸'은 아닌 게 되어버렸고, 무엇보다도 국가 지배장치와 문화적 전파 장치들을 이들이 장악했다. 스스로 졸부라는 말을 쓰겠는가? 그리고 졸부라고 견제하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 힘이 없어져버렸다.
그들을 우리 사회는 '루저'라고 부른다.
"너네 졸부쟎아", 이 말을 꺼내기에도 힘이 부칠 정도로,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정서적을 취약하고, 문화적으로도 빈약해졌다.
부자나 특권층이 생겨나는 것을 막기는 어렵다. 프랑스 대혁명 때, 혁명의 지도자들과 민중들은 서로를 Citoyen, 시민이라고 불렀다.
대격동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시기에 이름에 붙는 존칭을 없앤다. 꼭 무슨 법칙이 있지 않더라도, 이런 호칭은 변화의 시기에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Camarade, 동지 혹은 동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말은 사회주의 태동기에 서로를 불렀던 말이다. 내가 보았던 가장 눈물나는 Camarade라는 호칭은, 프랑스의 베트남 반전 집회에 대한 필름에서 보았다. 대중들 앞에 샤르트르가 섰는데, 정말로 복부에서 피눈물과 함께 터져나오는 목소리로,
"꺄마라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정말로 눈물 날 뻔했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한국은 존칭이 완화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존칭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요즘은 만년필, 자동차 엔진은 물론이고, 화장품, 립스틱, 하다못해 주사에도 존칭을 붙인다.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큰 일 날 것 같은, 이 고통스러운 사회 분위기, 우리는 더욱 더 강한 억압으로, 사람이 사물에게도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 있다.
그야말로, 이런 니미럴...
한동안 현대 백화점식 존칭이라고, 표준 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가진 사람의 횡포가 더 심해지니까,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다. 아니면... 바로 죽는 거 아닌가? 언제든지 해고 시킬 수 있고, 재계약에 대한 권한을 가진 사람의 완장질이 극에 달하니까, 자연스럽게 부자들 자동차, 벤츠나 폭스바겐 혹은 토요타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BMW 가진 놈이 무서운 거지, BMW가 무서울 게 뭐가 있냐? 그래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어디에서 날아올 칼을 맞고 죽을지 모르는데, 사람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벌벌 떨어야 하는 시기, 그게 우리가 사는 2012년 아닌가?
대통령에게 '님'을 잘 붙이지 않고, 정말로 대통령을 직접 만나야 하는 사람은 각하라는 별도의 호칭을 썼다.
없는 사람이 더 몸을 낮추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에게도, 꼭 님자를 붙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대체 넌 뭐야?
죽고잡냐?
요런 기이한 흐름이 생겨났다.
그런 기기묘묘한 사회적 서열이 주는 공포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고, 그 공포는 더욱 강해진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강북에게 밀려서 기다리고 있던 생협에게도 먹을 차례가 갔다.
그러나 이건 우리집 마당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개뿔, 아무 것도 없고, 그렇게 내내 기다리던 우리의 청춘에게 사랑과 출산이라는 것은, 너무너무 먼 나라의 일이 되어버렸다는 걸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선진국이 되면, 먹고 사는 것에 대한 1차적 공포로부터 국민들이 최소한 정신적으로 해방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그 공포가 더욱 더 깊어져서, 고객은 왕이다, 그러나 진짜 왕은 구매력에 의해서 따로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우리에게는 공포가 더 강해졌고, 삶에 대한 팍팍함이 극한치로 가고 있는 중이다.
명박과 4년을 보내면서, 이젠 립스틱이나 핸드백은 물론이고, "주사바늘이 굵으세요", 주사바늘에게도 존칭을 붙이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가 되었다.
주.사.바.늘.이.굵.으.세.요.
내재화된 공포, 이 사회에서 기다림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그 공포 통치를 5년간 더 하겠다는 사람들, 그들의 두목 근혜 공주가 오늘 대단한 포부를 밝혔다.
사람이 사물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이 기막힌 시대,
죽어라고 국격을 외치지만, 이놈의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의 인격, 서비스 해야 하는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는 힘 있는 놈들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 싶다.
인격, 사람은 누구나 동등하게 존경받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낸 나라에서 비록 허울 뿐인 이데올로기일지라도, 최소한 입에는 달고 다녔던 말이다.
재물의 평등은 아니더라도, 정신의 평등 혹은 영혼의 평등을 얘기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벤담이 공리주의를 외칠 때, 모든 사람의 행복의 합이 사회적 행복이라고 말했다. 논란거리가 되지만, 한국 사회는 지금 벤담의 공리주의만도 못한, 야만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듯 싶다.
인간이 사물을 보고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지금, 이건 우리가 가야할 길은 아닐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