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고양이들의 여름 나기
이번 여름은 참 덥다.
이 더위 한 가운데에, 경제학자로 살아오던 삶을 마음 속에서 내려놓는 작은 일을 겪었다.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정말로 마음 속에서 그런 걸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느끼게 만든 계기가 몇 가지 있는데, 이제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그걸 맡겨서 분석을 하도록 시킬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더운 여름에 지쳐서 뒤뜰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엄마 고양이와 바보 삼촌을 보면서, 정말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전응길 과장이라는, 오랫동안 파트너로 지냈던 한 공무원이 있었다. 그와 알고 지낸 시간이 10년이 넘는다.
"정권은 바뀔지도 모르지만, 세상이 정말로 좋아질지는 모르겠다", 그 질문을 나에게 했던 바로 그 공무원이었다.
얼마 전에 그를 만났는데, 그도 많이 바뀌었고, 이제는 변했다.
나도 변했을 것이다.
그에게 하지 못했던 답변은, 나도 마음 한 구석에 담아두기로 했다.
아내에게 이제 경제학자로서는 그만 살아가겠다는 얘기를 했다.
아내와 올해 결혼 9년차이다.
아직 밀린 일이 조금은 있지만, 아내와 나는 예전에 살던 방식의 삶을 내려놓았다.
이 녀석은 생협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녀석이다.
우연히 뛰어가는 장면을, 그래도 좀 좋은 조건에서 잡을 수 있었다.
벌써 아기 티는 많이 벗었다.
이 녀석들의 운명에 대해서,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기왕 인연이 된 것,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보살필 뿐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뭔지, 가끔 생각해본다.
positivie thinking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렇게 쓰고, 나는 '나쁜 생각'이라고 읽는다.
이런 이상한 생각을 할 바에야, 아예 생각을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한다.
간만에 마당 고양이 네 마리가 다 모였다. 얘들도 여름을 나느라고, 이렇게 다 모여있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고양이들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는 다르다. 금방 금방 시간이 지나가고, 헤어질 때가 금방 온다.
먼저 고양이별로 떠나기도 하고, 세력 다툼이 생겨서 밀려나기도 하고.
사람의 삶도 그와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사람의 시간은 좀 길다.
만약 사람보다 오래 살고, 또 사람만큼 혹은 사람 이상의 지능을 갖춘 존재가 우리를 본다면, 매 순간 내가 고양이들을 볼 때 만큼의 애틋함으로 우리를 볼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애틋하다. 삶은 애틋한 것이다.
positive thinking이라는 단어는, 그 애틋함을 마음 속에서 지워버린다.
그렇게 사람을 단세포로 만들고, 생각없는 존재로 만든다.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는, 그 말 자체가 참 부질없는 말이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엄마 고양이는 때때로 아주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내 느낌이 그래서 그런지 혹은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지, 늘 녀석은 사려깊음이 갖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최근에 제작 중인 몇 가지 영화나 시나리오를 검토하면서, 남자들이 만든 얘기에서 여성들이 갖는 수동성 혹은 피상적인 것에 대해서 종종 지적을 하게 된다.
물론 내가 만든다고 해도 크게 별 수는 없겠지만...
영화 <평양성>의 갑순이가 대표적이다. 잘 나고 강한 여자를 만든다고 만든 건데, 하나도 강해보이지 않고, 하나도 잘 나 보이지 않는다.
원치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라고 하면 그냥 해야 하고, 게다가 욕 하는 것 외에 작전을 주도해서 짜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중요한 일은 남자들이 다 하고, 그 사이에 일정한 각을 가지고 여자도 나온다, 그게 남자들이 만드는 얘기에서 여자들에게 부여하는 상의 거의 전부이다.
그리고 나름 영웅적이라고 그려낸 여자들의 대사는...
말이 짧다.
일부러 지능이 모자르게 보일려고 작심이라도 한 듯이.
엄마 고양이를 볼 때, 그런 영화나 제작 중인 시나리오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과 정 반대인 여성적 존재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이건 엄마, 혹은 대모라고 할 때의 느낌과도 좀 다르다.
인간의 말로 표현할 방법이 별로 없다.
여성이 중요한 사회가 아니라, 여성이 만든 사회라는 느낌일까?
살짝 옆모습을 보이고 돌아누운 엄마 고양이 모습을 보면서, 그런 복합적인 느낌을 받았다.
자기 밥은 다 먹고 나서 돌아섰다가, 아기 고양이 생협이 밥을 먹기 시작하니까, 까먹었다는 듯이 다시 와서 밥을 먹기 시작하는 바보 삼촌.
녀석의 본래 모습은 이런 모습이다.
아직은 아기 고양이 두 마리의 개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바보 삼촌만큼만이라도 나와 같이 오래 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그건 보장하기가 어렵다. 무사히 이사를 같이 가는 것도 큰 일이고, 그렇게 이사를 간다고 해도 새로 간 집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 이사가면서 중성화 수술을 해줄 계획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지금처럼 영원히 가족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에 대해서는 보장이 없다.
불교와 기독교에서 각기 고양이를 대하는 방식이 조금은 다를 것 같다.
사람들을 구원의 대상이라고 보는 것처럼 고양이도 구원의 대상이라고 보는 시선이 하나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조금 더 불교적 생각에서,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약간은 맘 편하지만 가슴 저린 시선이 하나.
나는 그냥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약간은 무덤덤하게 넘어가려는 편이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내가 준 먹이를 먹고, 매일매일 내가 주는 밥을 먹으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이 녀석들을 보면서 그렇게 무덤덤한 시선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양이들과 지내면서 증오 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배우게 된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기대하지 않았던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내 속에 잠자고 있던 표현의 욕구 같은 것을 일깨워준다는 것.
그래서 고양이를 영적 존재라고,때로는 숭배하거나 때로는 저주했던 것일까?
분명히 영적인 뭔가의 작동이 있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마침 아기 고양이 생협이 정면을 보고 있는 장면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는 노랑 눈동자가 더 명확해졌다.
자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퇴행일까? 아니면 발전일까?
나이를 먹으면, 그 나이만큼 섭섭함과 아쉬움이 나이테처럼 남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섭섭함을 정말로 자신의 삶에서 풀려고 하면, 정말 퇴행적 삶을 살게 된다.
저 아기 고양이의 눈을 보면서, 좀 어색한 표현이지만, 내 마음이 그 눈동자 안에 빠져드는 것 같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런 캐캐묵은 질문들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답이 있겠나, 삶이라는 것에.
그러나 더 쥐고, 또 더 쥐려고 하는 것,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정도가 내가 배운 거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아기 고양이의 눈망울을 보면서, 노을을 보면서 가끔 느끼는 그런 비어있는 울렁거림,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고양이들의 여름 나기를 보면서,
문득 삶에도 여름 나기 같은 것들이 있고,
가을을 향해 누워 지내는 그런 긴 잠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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