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이 함께 하기를!
‘fta 한 스푼’이 오늘 예약판매가 시작되었다. 아마, 오랫동안 시간이 지나도 이 순간을 잘 잊지 못할 것 같다. 앞으로도 몇 권 더 나올 게 있고, 책 작업은 당분간 계속 하기는 할 것이지만… 경제학자로서의 내 삶은, 이 책에 걸었다. 아니 모두 묻었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까?
열정이라…
20대에는 열정과 분노가 아주 컸던 것 같고, 30대에도 열정만큼은 컸던 것 같다. 그 대신, 나는 꿈 같은 것은 가져본 적이 없던 것 같다. 하기로 한 건 열심히 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나의 꿈인 것은 아니었다. 기후변화협약의 정부 대표로 협상에 나서던 시절, 열정적으로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게 내 꿈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총리실 근무하던 시절에도 열정적으로 일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내 꿈인가? 그런 꿈은 가져본 적이 없다.
작년 10월 후반에서 11월을 거치면서, 나는 사람들과 한미 fta라고 불리는 줄 앞에 서 있었다. 그냥 내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했다. 원래는 한미 fta에 대한 책 계획이 없었는데, 그 줄 한 가운데에서 책 한 권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는, 그 책은 쓰지 않는 편이 좋은 책이다. 그걸 내가 모르는 건 아니다. 짧게 보건, 길게 보건, 쓰지 않는 편이 낫다. 아직도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이 시점에서, 정권이 바뀌든, 바뀌지 않든, 한미 fta에 경제학자로서 반대한다는 건, 한국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냅둬요, 그냥 생긴 대로 살래요…
어차피 많은 걸 포기하고 살고, 또 포기할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 이 시점에서 이런 식으로 할 필요가 있느냐,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해준 얘기가 이런 거다.
세 번의 큰 사건이 있었다.
국회 날치기 사건이 있었고, 한미 fta 발효가 있었고, 에 또… 총선에서의 패배가 있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갔고, 시간은 흘러갔다. 포지션을 잡는다고 할 때, 이게 아주 어렵게 되었다.
그 와중에, 책을 그만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여러 번이 있었다. 일단 입장을 정하기가 어렵고, 그러다보니 어디에서 논쟁점을 잡아야 할지, 그런 기술적인 고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님 떠난 빈들에서, 그런 생각도 강했고. 이미 사람들은 다 떠났는데, 나 혼자 빈들에 앉아 이게 무슨 가지학대적인 고민이람, 그런 생각도 많이 들었다.
이미 끝난 걸 뭐하러 붙잡고 있냐, 대표적인 목소리가 이준익 감독이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진취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수 없고, 다음 방어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얘기를 주로 했다.
아 참, 내가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느껴진 건, 정말 대학 시절에 처음 경제학 책을 진지하게 보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건, 그 과정에서 거의 다 내놓은 것 같다.
삭발은 진짜 애교이고. ‘88만원 세대’ 절판은 그 다음에 이어서 한 거고.
더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있으면 더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음, 그 다음에는 내려놓을 게 없었다.
총선 끝나고, 사람들이 멘붕을 호소하는 그 시점에…
나는 금주를 했고, 한미 fta에 대한 입장과 생각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이석기 사건이 생겨났고.
그 와중에 한미 fta는 무슨…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대선이 무슨 소용아람!
시대에 뒤떨어지는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걸 감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좀 멋지게 표현하면 ‘시대의 불쏘시개’…
원래는 ‘모든 공포의 총합’으로 시작했던 컨셉에서 ‘fta 한 스푼’으로 바꾸게 된 건, 정말로 일반인들과 아주 길게 그리고 아주 오래,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이다.
‘모든’은 나는 못하겠고, ‘한 스푼’은 하겠고.
그래서 한미 fta 논의에 나는 딱 한 스푼만큼 더 한다고 가볍게 마음을 먹은 다음에, 세워놓았던 원고를 다시 붙잡을 수 있었다.
불쏘시개로 그냥 활활 타오르는, 뭐 그 이상은 나는 못하겠고.
불쏘시개에 불을 붙인다고 그게 정말로 나무에 불이 붙을지, 그건 잘 모르는 거고. 불쏘시개는 그냥 불쏘시개 답게 확 타버리면 그만 아니겠남?
하여간 책 한 권이 발간되게 하는 것, 그 이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처음에는 총선을 생각하면서 대선과 총선 사이에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조치들을 디자인하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총선 이후로는, 대선 과정에서도 한미 fta는 필요 없는 논의가 되어버렸다. 그거야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도 자신의 삶을 위해서 그런 논의가 필요한 국민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정확히 말하면 내 주변 사람들이 치룬 대가는 크다. 원고를 마무리지을 때까지, 그 전의 모든 일정들을 다 세웠고, 원래 있던 계획들은, 개판이 되었다.
내 삶도 완전 개판이 되었고, 같이 작업하던 동료들의 삶도 덩달아 같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 후에 이 상황을 수습하느라고 하는 만큼 하지만, 한 펀 개판이 되어버린 삶이, 최소한 일정이라도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난리굿을 치면서 만들어낸 책이 예약판매가 걸린 게 오늘이다.
원래 예약판매 같은 건 거의 안하는 편인데, 한미 fta 논의에서, 이것저것 가릴 게 뭐가 있겠나 싶어서 그냥 하자고 했다.
어쨌든 경제학자로서 시대의 맨 앞이 아니라, 시대의 맨 뒤에 서게 되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먼저 논의를 하는 게 아니라, 논의 다 끝난 뒤에 저 뒤에 서서,
“어, 아직 이 얘기는 안 해봤쟎아…”,
요런 상황에 되었다.
난 그걸 받아들였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맨 앞에 서는 것만이 학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 맨 뒤에 서는 것도…
비겁한 변명입니다!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행하게 된 대사가 생각난다.
맨 뒤에 서 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기는 하다. 아마 이 상태로 작은 불소시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떠랴.
이 시대에 경제학자로서 살았던 나는, 내가 꼭 해야 할 얘기를 했고, 그걸 두려워하지는 않았다는, 그야말로 내가 왜 살았는지, 그건 나한테 설명할 수는 있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 스푼’은 정말로 나를 위한 제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많은 걸 바꾸려고 하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한 스푼’ 만큼은, 혼자서라도 할 수 있는 것아닌가 싶다.
한미 fta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나는 늘 눌려 있었고, 웃음을 갖기가 어려웠다. ‘한 스푼’이라는 제목을 달고서야 비로소 유머와 명랑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 책과 함께, 내가 치룬 대가 중에 큰 건, 복지와 금융 등 많은 것을 같이 고민하던 동료들과 가은 자리에 앉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 fta의 세계로 건너갔다.
나는 건너가는 대신, 그냥 여기서 늙어 죽으리라, 그렇게 선택을 했다.
몇 년 전부터 쓰던 구호인데, 지난 몇 달 동안 나를 지켜주었던 구호가 하나 있었다.
명랑이 함께 하기를!
아직 fta의 나라로 건너가지 않은 모두에게, 이 말을 드리고 싶다.
명랑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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