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에도 계몽의 시대가 있었는가, 가끔 그런 질문을 해보게 된다. 노태우 시절, 금서가 애매하게 풀리던 시절, 사회과학 책에서 백만 부 종종 넘기는 책들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맑스, 레닌, 대충 이름만 달아도 어지간히는 나갔다. 보다보다 못해서 레닌의 부인이었다는 쿠르스카야인가, 하여간 그런 책도 봤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농담으로, 그 시절 출판사 사장들만 건물 사고 실제로 생긴 변화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사회과학 책은 어디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고, 사실상 쟝르가 붕괴한 상황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한 때 한국을 뒤덮던 계몽의 시대는 끝이 난 것 같다. 경로에 대한 해석은 복잡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보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계몽을 하거나 말거나, 변하는 것은 없다. 뭘로 계몽을 할 것이냐도 문제지만, 누가 누구에게 계몽을 하겠느냐? 이건 답 없는 질문이다. 지금 우아하게 '계몽'이라고 이름붙여진 일을 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게 없다. 한 때 한국에도 원로 같은 게 있기는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있는 원로 자체가 없다.
계몽이 성립하려면, 뭔가 더 알거나, 더 깨달았거나, 하다 못해 먼저 했거나, 그런 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용자의 조건 같은 것도 필요하다. 2020년대를 바라보는, 21세기 하고도 물경 1/5이 지나간 지금, 그딴 건 없다. 이건 꼭 우리 편, 남의 편으로 나뉘어서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런 팬덤 현상이 벌어지기 전에 권위는 이미 사라졌고, 누군가의 말을 귀담아듣는 시대도 사라졌다. 신문과 잡지의 위기가 그런 거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렇게 되었다. Mb가 집권하기 전에 Kbs가 공신력 1등이던 시절이 있었다. 좋든 싫든, 그 시대는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2.
그러면 이 세상이, 아니 이노무 '대한민국'이라고 목 놓아 부르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느냐? 그런 것도 아니다. "기다리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이다", 그런 낙관론의 대표적인 책이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세계관일 것이다. 기본적인 것은 이제 어느 정도 되었고, 이제 좀 더 '심화학습' 단계로! 뭐, 그 낙관론은 현실 앞에서 여지없이 부수어졌고, mb, 근혜를 거치면서 절망의 끝자락으로 달린 것 같다. 그 시기는 탈계몽의 시대라기 보다는 '증오'의 시대였던 것 같다. 우리 모두 증오했다. '쥐박이'를 증오했고, 순실이를 증오했다. 그것도 그냥 증오한 게 아니라, 정성껏 증오했다.
나는 문재인이 뭔가 좀 잘 할 수 있는 시대를 희망했다. 꼭 조국 사태 때문에 뭔가 엄청나게 변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그 증오 위에 우리는 또 다른 증오를 더 했다. 10년 전에는 싫어도 식구들끼리 정치 얘기를 하고, 아빠와 딸과 아들이 등 돌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정치 얘기는 안 한다. 하면 등 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막 뭔가 던져버릴 정도로 인식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계몽? 그딴 건 이제 없다.
10대와 20대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을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탈 코르셋 논쟁은 10대 여성과 30대 여성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나이가 어릴수록, 10대일수록 그 민감도가 특히 높았다. 야,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구나!
조국 사태에서 많은 사람들은 20대들에 주목을 하지만, 진짜로 그 사건이 영향을 주는 것은 10대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끼리' 잘 논의하고, 얘기해보면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딴 시대도 끝났다. 그리고 한국에서 '계몽의 시대'는 정말로 끝이 났다. 한국에서 누가 그들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인가? 쉽지 않다.
3.
'농업 경제학'은 형식적으로 중학교 2학년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하려고 한다. 마음은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내가 할 수 있을지, 최종적으로 마음을 먹지 못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아주 고전적인 관계에서 어떻게 권위적이지 않고, 강요하는 방식의 아닌 지식에 대한 얘기가 가능할 것인가? 이게 아주 어렵다.
그야말로 '지대루 계몽적', 이렇게 되기 딱 좋은 위기다. 이래라, 저래라, 제대로 꼰대처럼 보이기 딱 알맞다. 게다가 주제가 농업이다. 관심도 없을 얘기다. 안 하는 게 맞는데, 나는 지금 왜 이 이야기 앞에 서 있는가?
학부 시절에 농업에 대해서 별 게 배운 게 없다. 경제사 시간에 이래저래, 조금씩 본 게 다다. 그 때는 경제학과에서 회계원리 배워야 한다고 난리가 났다. 한다, 안 한다, 좀 복잡하기는 했는데.. 배워둔 게 나중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 농업 같은 얘기,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철학과 청강하고, 사학과 수업 듣고, 남는 학점은 전부 수학에 몰았다. 뭐, 학기 시작만 그랬고, 4학년 1학기 때에도 시험 거부를 주동한 처지라. 중간 고사 이후로는 수업은 커녕, 시험도 맨날 거부였다. 1학년 1학기 때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서 시험 못 봤고. 2학기는 건대 사태로 시험 거부. 그냥 안 본 정도가 아니라, 맨날 주동하는 처지라. 학점은 커녕, 학교 제대로 다닌 학기가 거의 기억에 없다. 그래도 2학년 때부터 틈 나는 대로 대학원 입학 준비를 했더니, 시험만큼은 왠만큼 봤다. 그런 처지에, 농업 공부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해야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나중에 유학 가서 대학원 논문을 국제 자원 중에 쌀시장을 가지고 썼다. 와.. 이 논문 점수가 걔들 표현대로, 환상적으로 나왔다. 대학원 입학 성적이 거의 꼴지 비슷했었는데, 졸업할 때에는 논문 점수 배점이 워낙 커서 좀 점수 떨어지는 과목들 평균점 다 올려주었다. 졸지에 1등으로 졸업하고, 박사 과정도 이 논문 점수 덕분에 1등으로 들어갔다. 편하게 유학하는데, 진짜 1등 개국공신 같은 주제였다. 물론 박사 과정에서 그걸로 계속 논문을 쓰지는 않았다.
하여간 그 때 논문 준비하면서 농업경제학이라는 걸 처음 공부했다. 90년대 초반인데,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아직 냉전이었고.
다시 농업경제학을 공부한 것은 회사를 그만두고 녹색당 만드는 일을 하다가, 이게 농업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농업공부모임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아내와 결정적으로 결혼하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고, 내 측근들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농업을 계기로 만나게 되었다.
그 때 생각한 것은.. 이건 나의 양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지금까지 온 것이다.
그 시절에 식품 안전을 놓고 법 같이 준비하던 수의사가 박상표와 송기호다. 송변은 될 듯 말 듯 여전히 잘 버티고 있다. 박상표는 벌써 자살했다. 참, 사는 게 뭔지! 약간 뒤에 FTA 논의로 윤석원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그 시절에는 거의 매주 봤다. 그 때 정부 쪽 전문가로 논쟁하던 양반이, 논쟁하다가 정이 들었는데, 지금은 농촌경제연구원장이다. 노무현 때 6헥타르 정책 놓고, 진짜 지겹도록 논쟁을 했다. 장태평 장관 시절에는 GMO 문제 가지고 장관하고 논쟁을.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다. 한 때 농업 문제로 같이 논의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청와대 농업비서관 아니면 행정관이라도 되었는데, 다들 그 자리를 정거장으로만 썼던 것 같다. 청와대 가면 엄청 뭐 할 것 같더니, 금방 출마할 자리 알아보고들 했다.
그렇게 농업 경제학 공부하면서, 즐거운 일도 많았고, 가슴 아픈 일도 많았다. 죽거나 사라진 사람들이 많다. '토사구팽'이라는 전화 한 통화를 남기고 더는 보기 어려워진 누님 등등.
둘째 태어나면서 그 시절과 단절하게 되었다. 더는 나도 시민단체의 농업 얘기를 맨 앞에서 발제할 처지가 아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농지제도연석회의라는 시민단체가 잠시 있었고, 내가 사무국장을 맡았었다. 강기갑, 단병호, 이런 사람들과 한참 논의하던 시절이.. 농지은행 도입할 거냐, 말 거냐, 그런 거 가지고 엄청 논쟁하던. 다 옛날 일이다.
4.
계몽의 시대는 끝났다.
어떻게 해야 이 얘기를 계몽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아직은 실마리를 못 찾았다. 딜레마다. 아내를 목졸라 죽였던 알뛰세의 책을 한참 많이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절친이었던 에티엔 발리바르가 "Tais-toi, Althusser!", "입 좀 닥쳐라, 알뛰세!", 그런 책을 쓴 적이 있었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뒤, 진짜 알뛰세 말 많았다.
내가 책을 쓴다고 해서 10대들이 읽을 것 같지도 않고, 읽는다고 해도 뭔 반응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게 지금 나의 딜레마다.
술 한 잔 마시고, "때려쳐!", 딱 이게 제일 좋은 전략이다. 나도 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이게 내 양심의 문제라서 그렇다. 생태에 관한 얘기는, 농업이 빠지면 한 바퀴 돌지를 않는다.
예전에 이상의 산문집을 읽다가 만주로 도망간 자기 여동생에게 쓴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 고3 학력고사 끝나고였는데, 사실 충격 받았다. 그 충격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에고, 아직까지 그 모양으로 살아간다. 자기는 충분히 자유롭게 살았는데, 여동생에게는, 니가 그러면 안 되느니,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동거는 안 된다, 정신 차려라, 하여간 엄청 빡빡한 내용이었다. 꼰대 꼰대, 왕꼰대의 편지였다.
그런 편지를 쓰고 싶지는 않다. 근데 지금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누가 쓰더라도 이상이 여동생에게 보내는 것처럼 써지게 되어 있다. 지금의 딜레마다. 아직 딱히 해법을 못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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