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종의 전쟁, 꺼져, 트럼프!


 


1.


-미셀 발랑탱(Jean-Michel Valantin)이라는 프랑스 학자가 있다. 만날려면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억지로 누군가를 꼭 만나는 것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아직 만난 적은 없다. 어쨌든 내 인생을 가장 극적으로 바꾼 한 사람을 꼽으라면, 이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장-미셀 발랑탱일 것이다. 지금 살아있는 학자 중에서, 나와 싱크로율이 가장 높은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장-미셀 발랑탱을 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내가 그의 책을 가지고 죽도록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책 두 권 정도 내고 시시껄렁하게 지내고 있던 시절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나 아내는 괜히 돈 쓰는 걸 죽도록 싫어했다. 아내는 그 때 활동가 생활을 접고 박사 과정에 다니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프랑스 문화원에 가서 이것저것 잡지 뒤적뒤적거리고 가끔 신간 찾아보는 게 거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그 때 두둥, -미셀 발랭탱의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나보다 2~3살 많을까?


 


하여간 붙잡자 말자, 바로 번역하기 시작해서 번역을 끝냈다 (그리고는 수 년, 내가 아는 모든 출판사에 출간을 의뢰했는데, 한국에서는 시장성 없다고 결국 못 냈다. 내가 한국어 출판을 위해서 뛰어다니는 동안, 그 사이 영어로는 번역되어서 나왔고, 이 분야 고전처럼 되었다. 엄한 책을 집었던 것은 아니라고 약간은 안도…) 번역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 나온 영화들은 구할 수 있는 건 일단 다 샀고, 구할 수 없는 것은, 그래도 구해서 봤다. <노스페라투> 수준의, 정말 오래된 영화라서 포스터만 볼 수 있는 몇 개 빼고는 다 구했다. 그리고는? <콜래트럴>처럼 3~4번 보면, 진짜 지겨워서 어쩔 수 없는 것 빼고는 100번씩 봤다. 영화 한 번 보면 100번씩 보는 내 습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00? 어떤 놈은 분석도 하고, 관련된 영화 감독과 제작자 다 만나서 물어보고, 시시껄렁해 보이는 메모들까지 다 뒤져서 책을 내는데그 분석을 뒤에서 따라가면서, 아 그렇군, 배 내 밀고 고개 끄덕끄덕하면서 건방 떨어서야 내 입에 밥이 들어가겠는가? 그런 생각을 했다.


 


천외천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그 말도 장-미셀 발랑탱 이후로 쓰게 되었다. 정말로, 하늘 밖의 하늘을 본 것 같았다. 위대하고 거대하고, 에 또, 고매하고 그런 저자나 작가들은 많이 보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고, 그런 비슷한 것도 없는 분석을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오방. 외울 수 없으면 많이 보기라도. 정말로 죽도록 보고, 대사 적어가면서 보고, 그렇게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또 봤다.


 


그렇게 하나의 테제에 집중해서, 이미 누군가 친절하게,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그렇게 해놓은 것을 따라가면서 그냥 보는 일을 죽도록 했다. 효과가 있었을까? 직접 효과는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게 생난리를 치고 난 다음에 낸 책이 처음으로 만권을 넘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낸 책이 20만권을 넘어갔다. 그게 <88만원 세대>…


 


그 때 배웠다. 잘 난 넘 있으면, 흉내라도. 난 흉내는 냈다. 안되면 시늉이라도.


 


2.




-미셀 발랑탱의 책은, 당시만 해도 불어 아니면 볼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영어로도 볼 수 있고, 문고판은 정말 싸다. 그 뒤로는 번역본 출간에 대한 노력은 접었다.


 


대학교 때 미학 공부를 한 적이 좀 있었고, 어설프게나 영화 미학 같은 것도 좀 봤다. 그 시절에는 리얼리즘 미학이 왕 먹던 시절이다. 그 때, 헐리우드는 상업적 코드와 제국주의 코드를 가지고 있으며, 디즈니의 악한 점은 어쩌구, 저쩌구, 그렇게 배웠다. 돈 되는 건 뭐든지 하고, 뭐든지 하지만 문화 제국주의의 첨병으로서, 뭐 그랬다.


 


-미셀 발랑탱 얘기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거다. 다른 어떤 나라의 영화와도 다르게, 펜타곤과 백악관과 밀접하거나 때로는 심하게 반목하면서, 어쨌든 때로는 협력 때로는 갈등, 그런 장르의 영화들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이런 '전략 영화'의 범주와 범위가, 상상초월 넓다. 아 그렇구나, 끄덕끄덕.


 


-미셀 발랑탱은 영화 전공자가 아니라 국제 정치학 혹은 국제 관계학 전공이고, 미국 분야에서 나름 특성이 있는 학자다. 근데 왜 영화를 이렇게 많이 봤고, 이렇게 잘 알아? 할 말이 없었다.


 


그 때 헐리우드 영화의 겉얘기와 속얘기라는 것에 대해서 좀 알게 되었고, 영화 기획 단계부터 어떤 것들이 때로는 협력적으로 때로는 적대적으로 작동하는가, 이런 걸 좀 생각하게 되었다.


 


헐리우드 영화는 아무 얘기도 없이 그냥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만 범벅? 그런 게 아니란다. 고뤠?


 


그야말로 해석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렇지만 장-미셀 발랑탱이 때로 들이대는 사무실과 사무실 사이에 오갔던 팩스의 문구, 그런 게 반영된 주요 정치인의 연설문 속의 거의 아무도 보는 문구들, 이런 걸 보면서, 그야말로 입 딱. 할 말 없다.


 


, 세상에 뭐 이런 넘이 있나 싶었다.


 


3.


<혹성탈출> 68년에 나왔다. 한국에서도 워낙 인기가 높아서, 혹성은 제대로 된 말이 아니고 행성이라고 해야 한다는 친절한 지침서가 등장할 정도로. 이제는 <혹성탈출>이라는 영화를 표현할 때만 우리는 혹성이라는 말을 쓴다. 안 그러면, 무식하고, 일본식 한자어를 쓰고, 더럽게 터진다. 혹성 아닙니다, 행성!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6학년 때인가, 주말의 명화 같은 데에서 처음 봤던 기억이다. 앞에부터 다 보지는 못했고 중간부터 봤는데, 찰톤 해스턴이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는 엔딩신, 그건 그 시절의 나에게도 충격적이었다. , 이런 게 있구나.


 


그 때의 충격이 워낙 강해서인지, 그 뒤에 나온 자잘한 후속편들도 거의 다 본 것 같다. 물론 날 잡고 본 게 아니라서 쫙쫙 줄거리가 서 있지는 않다.


 


오래된 영화이기는 하지만, <혹성탈출>이 이 비슷비슷한 시리즈물에서 우뚝 서 있는 이유는, 이게 '우주 아니다, 지구야 지구', 이런 라인을 세운 첫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마 문화적으로 가장 전격적으로 <혹성탈출>의 대척점에 서 있는 얘기를 잡자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일 것이다 (<스타워즈>도 역시 우주 얘기이기긴 하지만, 이건 기획 의도나 전개가, 조금 다른 각도다.)


 


<혹성탈출>이나 <파운데이션>이나, 핵전쟁과 그 이후의 지구 오염을 모티브로 하는 것 같다. 냉전 시대에, "나가자 우주로", 이 얘기를 가장 대중적으로 축으로 세운 것이 아이작 아시모프 정도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가자 우주" sf 문학이나 sf 영화의 기본 줄기가 된다. 버리자고, 지구는.


 


과학을 좀 하고, 공부를 좀 한 사람들은 60년대에 "나가자 우주", 쒼나게 상상을 펼쳤다. 그 흐름 속에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도 세계적 빅힛트를 쳤고,


 


그런데 갑자가 유인원들이 말 타고 등장하는 영화가 두둥둥, 뭐야 이 촌스러운 것들은, 보던 관객들들은 너무너무 후지고 감성적으로도 올드하다고 느꼈다.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 신을 보기 전까지는.


 


영화가 이제 끝나나, 크레딧 타이틀이 올라가려나, 대체 뭔 소리한 거여, 이렇게 슬슬 엉덩이를 들썩 거릴즈음, 오매나야, 여그가 뉴욕?


 


먼 우주를 돌고 돌아, 이상한 행성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참말로 뉴욕? 그렇다니까!


 


우주냐, 지구냐, 이 끝나지 않을 SF 장르의 논쟁의 대척점 하나를 거대하게 세운 것이 바로 <혹성탈출>이다. 지구를 수백번 터뜨리고도 남을 핵전쟁, 그리고 미소의 냉전 갈등, 알아 알아그런데 우린 뭘 해야 해? 우주로 갈까? 아니거던요. 지구에서 그래도 버티면서 살아남는 수밖에 없거던요!


 


요 라인을 타고 막 21세기로 넘어가려는 시점에 <매트릭스>가 나오게 된다. 그 정도 기술이 발달하고, 그 정도 과학이 발달했으면 안드로메다는 아니더라도 어디 명황성 정도 가줘야 하는 거 아냐? <매트릭스>는 지구 땅 구석 어딘가에 있는 시온의 땅을 찾아 헤매고, 프로그램 내의 위상 공간을 헤맨다. 우주? 몰러, 거긴 멀어.


 


그냥 냉전시대와 핵전쟁 위험만을 얘기했으면 <혹성탈출>이 지금의 그 위치에 가지고 못했을 것이고, 그야말로 리부팅해서 다시 3부작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원숭이 분장하고 허접한 옷 입고 말 타고 다니던 이 영화가 문명사에 남을 정도로 깊은 충격을 준 것은, 우주냐 지구냐, 이 깊고 오래된 논쟁에 한 축을 빡 그었던우주복 입고 진공 놀이하면 재밌디? 좋아 보이디?


 


4.


전작은 이리하여 역사가 되었고, 다시 3부작을 시작한지도 몇 년, 이제 그 대단원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소소하게는 배경과 주요 등장인물 등 차이가 좀 있기도 하지만, 원전 <혹성탈출>과 가장 큰 차이점은, 핵전쟁이 영화 배경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 사이에 냉전은 깨졌다. 소련은 벌써 망했고, 동독 출신의 과학자가 이제 독일의 지도자다. 동독? 뭐여? (이언주가 한국의 메르켈이 되겠단다. 이건 또 뭔 소리여?)


 


냉전, 핵전쟁 그리고 살아남는 존재들의 미래, 이런 굵직한 소재 위에 혹성탈출이 얹혀져 있었다. 핵전쟁을 빼고 나니까, 확 힘 떨어진다. 그래 이제 21세기니까! 그럼 이제 뭔 얘기를 하지? , 이거 어려운데. 여기서부터가 창작자의 고통이다. 게다가 리부팅 이후 이미 성공한 1, 2편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1, 2, 3편이 독립된 각각의 구성이라고 놓고 분석하는 방법이 있고, 3편을 위해서 1, 2편이 셋업이라고 분석하는 방법이 있다. 어느 편이든, 자기 맘대로일 때가 많다. 원작자가 이런 것까지 얘기해주는 법은 거의 없다. 그럴 리도 없고, 그렇게 소소하게 설명하는 것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어쨌든 3 <종의 전쟁>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명백히 그리고 다른 소리 할 것 없이, 이건 지도자에 대한 얘기다. 지도자의 속성, 지도자의 덕목,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지도자? 뭔 맥락없이 갑자기 지도자?


 


하여간 3편은 유인원의 유일무이한 지도자인 시저와, 사람들 사이에서도 배척당하고 결정적인 타격을 기다리고 있는 대령, 그렇게 주요 대립을 형성한다. 그리고 실패한 지도자 코바의 죽은 혼령과, '당나귀'라고 불리는 굴욕을 참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코바의 옛 부하들, 그렇게 한무더기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모든 얘기들은 '증오'라는 한 단어로 수렴된다.


 


증오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코바는 증오를 내려놓지 못했는데, 과연 우리들의 지도자 시저는? 그렇다면 저 잔혹무도한, <지옥의 묵시록>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대령은? 그리고 그의 증오는? 그는 증오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마지막이 너무 비참하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최후의 자존심을 놓고 몸부림을 치는 것인가?


 


원자탄을 내려놓은 <혹성탈출>이 세롭게 안티테제로 형성한 것은 증오에 기반한 국가주의 그리고 그런 상징들이 엉겨 붙으면서 만들어진, 두둥, 바로 극우파 아니겠는가? 여기에 유럽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 미국식 인종주의.


 


유럽에 극우가 또 다른 정당으로 형성된 것은 이미 90년대이고, 일부에서는 대선 결선투표까지도 갈 정도다. 브렉시트로 상징되는 이런 극우파의 흐름에 헐리우드가 눈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영화적으로 핵전쟁이 갖는 짧고 강한 임팩트에 비해서, 극우파와 증오는 형상화시키기 어렵다. 그리고 그 딜레마를 개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형상화하기는 더욱 어렵다.


 


3편 클라이막스의 약간 복잡한 설정은 극우파 코드가 비쥬얼로 형성화시키는 것이 한계를 어느 정도는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옥의 묵시록> 이후, 독단적인 지휘관이 독자적 카리스마가 보여주는 비극적 결말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기획하고 준비할 때부터 유럽은 물론이고 전세계를 한번쯤 덮치고 갈 극우파의 시대를 어느 정도는 예견한 것 같다. 우파든 좌파든, 인간의 조직이라는 한 번쯤 "지도자는?", 이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게 사람 사는 사회다.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시대가 변하면서 새롭게 다시 한 번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를 준비하면서 이미 '트럼프의 미국'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것은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이고, 누구든 상관없다. 증오와 두려움 위에 세운 독재, 그리하여 자신들 안에서도 영원하기 어려운 짧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다 (북쪽의 상관이 기동하는 강력한 부대가 영화 안에서 과연 왜 필요했던 것일까,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를 만들 때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 <종의 전쟁> "꺼져, 트럼프!"라는 짧은 명제와 기묘한 싱크로율을 만들어 내었다. (미국 보수들 내에서도 트럼프가 지나치게 독단적이고, 너무 강하다는 불만이…) 우연이겠지만, 기막힌 우연이 되었다.


 


만약 우리가 <종의 전쟁> MB 정권 마지막 해에 봤다거나, 아니면 박근혜 한참 헤매던 2~3년 차에 봤다면, 우리의 이 영화 해석법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탈애굽 이후, 낙원에 도착하기 직전의 행복감을 맛보려고 하는 시점이다. 극우파 혹은 증오만 강조하는 지도자, 아니, 이건 지나간 얘기라니까. (그러나 미국이라면!)


 


증오와 차별, 어쨌든 21세기가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당면하게 되는 주요 주제가 이미 되어버렸다. 이걸 잠시 환기하게 해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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