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푸시킨)

 

솔직히 요즘 내가 행복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10달된 아기 아프지 않고 잘 크는 것, 이젠 슬슬 노묘급으로 나이먹어가는 야옹구가 여전히 발랄하게 잘 노는 것, 함께 이사온 마당 고양이들 특히 새끼를 세 번이나 낳았던 엄마 고양이와 하루에 2~3번은 꼬박꼬박 만날 수 있는 것, 한 마디로 아기와 고양이들 빼면 내가 하는 일은 다 잘 안 된다.

 

나만 잘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내 동료들은 다 힘들어하거나, 잠수 탔거나, 심지어 핸펀 번호를 바꾸어버리기도.

 

이게 다 박근혜 때문이야, 그렇게 치부할까 싶지만, 그러면 또 내 삶이 너무 구질구질해 보인다. 어쨌든 나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지만, 뭔가 잘 안되고, 사람들도 구심점을 잃고. 한 마디로 그냥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중인 듯싶다. 모든 일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고, 반전의 계기는 보이지 않고.

 

하다못해, 올봄에 달았던 모기장이 부실하게 달려서 몸통에 세 줄이 있어서 아디다스 모기 혹은 타이거 모기라고 불리는 녀석들에게 온통 뜯기면서 글을 쓴다거나. 아니면 멀쩡하던 아이폰 단자가 맛탱이가 가서, 정말 하기 싫었던 핸펀 바꾸기를 해야 한다거나. 뭐가 이렇게 되는 일이 없어!

 

동료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기는 정말 힘들다. 게다가 뭐 딱히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는 일도 잘 안되고, 친구들이 하는 일도 잘 안되고, 모기들은 신나게 달려들고. 이게 이번 여름을 맞은 내 형국이다.

 

솔직히 대선 끝나고 그냥 일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조용히 연구한다고 처박히면 될 일을, 왜 그 때 꼬질꼬질한 5년을 버티겠다, 그렇게 호언장담했던가! 이런 후회가 가끔 드는 것도 사실이다.

 

푸시킨이 썼던 싯구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라.”

 

이걸 국정원으로 바꾸어서, 국정원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라, 워매, 이런 얘기 입에서 툭툭 튀어나올 지경이다.

 

그래도 국정원 탓만 하고 있으면, 이건 꼬질꼬질한 것을 넘어서 너무 남루해질 것 같다. 하여간 문제는 있다는 것을 누구나 생각하지만, 막는 쪽이나 공격하는 쪽이나 정말 너무너무 남루해진 것이 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류현진 야구경기만 죽어라고 보면서 현진 오빠 최고”, 이러는 것도 영 모양새 안 빠지고, LG 10연속 위닝 시리즈를 했다고, “나가자 LG, 싸우자 LG”, 이러고 있는 것도 내 나이에는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이게 원래 사람이 맛탱이가 가는 게, 뭔가 엄청난 사건이 생겨서가 아니라 긍지와 보람을 무너뜨리는 자근자근하면서도 소소한 일들의 연속으로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방송을 하나 맡아서 MC 자리에 앉게 되기는 했다. 근데 이게 또 제약조건이 엄청 많은 데다, 전형적인 3부 리그 모양새다. 경제 채널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고 알고는 있지만, 막상 그 안에 몇 달 들어와보니, ,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그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라, 이 말이 절로 입에서 나온다.

 

슬프하거나 노여워하거나, 이게 아니라 그냥 서글퍼지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 나이 46, 박사 18년차, 과도하게 많은 영광을 누리기도 했고, 삶도 행복한 편이다. 결혼이 늦고, 아이가 늦었지만, 그 덕에 할 일 없이 버텨야 하는 시간에 육아라는 하늘이 내려준 아주 훌륭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뒤집어서 보면, 삶은 늘 행복하다.

 

살다 보면 나도 결정적인 위기와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순간이 있기는 했다.

 

술 마시다 나도 한 때 엄청 힘들었어”, 이런 얘기 했다가 , 이 개새야, 지금 어디서 자랑질이야”, 친구들한테 술 얼굴에 뒤집어 쓸 뻔 했다. 힘들었었다니까, 이런 말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통하지가 않는다.

 

지금도 좀 그렇기는 하다. 나는 힘들고, 구색 안 나고, 보람만으로 움직여야 하는 땡볕 방송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10명 넘게 내가 하는 일을 같이 하는 스탭들이 있고, 김영사에서는 이 내용으로 책을 만들겠다고 대기 중이다. 게다가 담당 에디터는 모피아때부터 호흡을 맞춰왔던 친구. 게다가 2주 전에 즉흥적으로, 카페라도 만들자, 그렇게 나왔던 얘기를 실제로 도와주는 또 다른 동료들이 몇 명.

 

게다가 1년 넘게 방송으로 호흡을 맞춰왔던 사랑하는 아우, 선대인이 여전히 내 곁에 있다.

 

결정적으로 내가 카페라도 만들고 굽신굽신하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선대인과 TV판 나꼽살을 만들어볼 수 있는 가느다란 가능성이 아직 열려있기 때문이다.

 

나꼽살이 평균 다운로드 400만 정도 되었고, 기분 좋을 때는 700만까지 갔는데, 지금 내가 시청률 0.25%라는 현실에 서 있다는 게, 참 망연자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그 냉정한 현실 앞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라, 푸시킨 선생 말씀.

 

진짜 대선 이기면 공중파에서 한 번도 없던 경제방송 기획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쩔거냐, 밑에서라도 박박 기고, 방송 스킬과 포맷에 대해서 맨 몸으로 배워나가는 수밖에.

 

선대인이 그런 걸 좀 하고, 형님 여기서 이런 거 하시죠, 이렇게 불러주면 딱 좋겠구만. 그렇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면 그건 선대인이 아니지. 약간씩 나사가 풀리고, 조금씩 핀트가 안 맞아도, 열정과 정의감 하나로 물불 안 가리는 하버더선대인, 그래 그게 선대인이지.

 

하여간 이런저런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나는 또 내가 하기로 한 것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렇게 7월을 맞는다.

 

본인에게 직접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강수연과 하는 방송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얼마 전에 했었다.

 

강수연과 만나서 소주도 한 잔 한 적이 있기는 하는데, 그녀는 나를 ‘88만원 세대의 저자로 알고 있고,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젊은 경제학자

 

아주 어린 시절의 일이지만, 윗동네랑 눈싸움 하다가 키 큰 강수연한테 엄청 눈으로 많이 맞아 터진 기억이

 

어린 시절, 나는 키도 작았고, 또래보다 많이 왜소했다. 생각보다 많이 맞고 다녔다.

 

다른 건 몰라도 경제방송에 관한 기획은 앞으로도 좀 더 해보고 싶다. 내가 나꼽살의 기획자 아니었더냐! 매주 기획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선대인한테 좀 넘길려고 했더니, 안철수 캠프에 들어간다고 한 주 하고 도로 나한테 넘긴. 에고고고

 

경제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낸 것은 이명박 정권 초기였는데, KBS 정연주 사장 날아가면서 동료 PD들도 같이그것도 에고고고. 그렇게 묶혀두고 있던 것을 이번에 꺼내들은 게, ‘우석훈의 사람이 사는 경제이다.

 

상황은 말할 나위 없이 열악하다. 이보다 나쁠 수 없을 조건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

 

김유식 PD가 이번에 자신의 삶을 나한테 걸었다. 내 어깨 위에 올라탄 사나이들이, 특히 중년 아기 아빠들이 한 명씩 늘어난다.

 

어쩔 수가 없어서, 나도 이 번에 이것저것 막 날린다. 카페 운영은 여러 번 했지만, 내가 직접 만든 것은 처음이다. ,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 누군가 대신 해 줄 그런 한가한 상황도 아니다.

 

이번에는 걸린 게 많다. 그래서 무조건 성공시키는 것 외에는 외통수다.

 

그래서 굽신굽신, 좀 도와줍쇼!

 

경제방송으로 다양한 시도도 해보고 싶고, TV 버전 나꼽살도 만들어보고 싶고, 그것도 각 지역 버전으로 풍성하게 해보고 싶다.

 

그럴려면, 무조건 굽신굽신, 좀 도와줍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말고,

카메라를 매고 땡볕으로 가려고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경제 휴머니즘이라는 말 한 마디라도 남기고 싶다.

경제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황토길편, 간만에 버찌의 검붉은 색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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