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한지> 혹은 번쾌의 눈물
나는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많은 종류를 보지는 않는다. 한 가지 영화를 100번씩 보는 걸로, 그걸로 유명해졌다. 참 웃기는 일이다.
공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영화를 본다. 교과서를 여러 번 보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많이 운다. 나야 원래 눈물이 많으니, 내가 운 것은 아무 정보도 아니지만, 보고 또 봐도 눈물이 나는 건, 그건 정보가 좀 된다.
이준익 감독의 실패한 영화 중의 대표작, <즐거운 인생>, 거기에서 혁수가 공항에 있는 신부터 그 뒤에 몇 장면까지, 그건 보고 또 봐도 눈물이 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영화 <화차>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변영주 감독이랑은 아주 친하고, 어쩌면 인생의 파트너 혹은 파트너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화차>를 보고 울지는 않았다. 물론 울지 않았다고 재미없는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어쩔지 모르지만,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반지의 제왕>도, <매트릭스>도, 좋아하고 dvd는 물론이고 블루레이까지 모으는 영화지만… 이 시리즈에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울었다는 것과 좋아하는 영화라는 것은, 아무 상관 관계도 없다.
아, <레지던트 이블 4>는, 극장에서 졸면서 하품하다가 울었다… 왜, 이거 아직도 안 끝나…
하여간 그렇다.
별 시시껄렁한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도 울고, 어지간한 영화에서는 한 장면씩 울기도 하는데, 또 전혀 울지 않는 영화들도 있다. 좋은 영화, 나쁜 영화, 그 기준과 나의 울음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내가 울었다는 건, 아무 정보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참 내… 드라마 <대물>에서 고현정의 너무 뻔한 연설에서도 울었고, 선덕여왕의 한 장면에서도 울었고, <커피 프린스>는 거의 매회 울었고…
할 말 없을 정도다.
자, 그런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그리고 나의 영화 역사상으로도 가장 많이 운 영화가 있으니, 바로 영화 <초한지-천하대전>이다.
영진위 통계로는 9만 3천, 10만도 못 든 영화이다.
보통 내가 있는 영화사에서 중요 영화가 나올 때, 관객수 내기를 하는데, 그 때 보통은 50만, 좀 작으면 30만 단위로 내기를 건다. 10만 관객은, 내기 단위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한 마디로, 한국에서는 완전 실패한 영화이다. 뭐, 더 할 얘기가 없는,
이 정도면, 아주 졸작이거나, 아주 예술 영화이거나 혹은 독립 영화이거나.
물론 이 수준으로 망한 영화 중에 수작은, 구로자와의 <카케무샤>. 한일 문화교류를 시작하면서 첫 빠따로 들어온 영화가 공교롭게도 사무라이 영화, 그것도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전쟁과 관련된 것이었으니, 맙소사… 어쨌든 영화는 좋은 영화였다. (물론 이 영화에도 내가 우는 대목이 몇 장면 나온다.)
자, 나의 영화의 울음에 대한 썰래발은 이 정도로 충분.
누구나 다 아는 항우, 바로 그 항우와 우미인이 나오는 이 영화를 dvd로 빌려서 보면서, 나는 정말 눈물이, 거짓말 안 보태고 닭똥방울 떨어지듯이 떨어졌고, 다섯 번쯤 다시 돌려보았는데, 볼 때마다 눈물 뚝뚝.
물론 이건 좀 특수한 상황이다. 영화 자체가 그렇게 대단했다는 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이랑 너무나 같아서…
항우와 유방의 싸움이라는 초한지의 구조는 너무 간단하고, 몸만 있는 듯한 항우와 머리만 있는 듯한 범증이 한 편. 그리고 머리만 있는 장량, 몸만 있는 번쾌, 머리와 몸이 다 있지만 운이 없는 한신… 그리고 그 아무 것도 없지만 하늘의 뜻이 있는, 그리하여 결국 삼국지 유비의 선조가 되는 유방, 그들의 얘기이다. 뭐, 그들의 얘기와 각각의 사연들이야 너무 잘 알려진 것들이고.
영화는 처음부터 항우와 유방의 두 대빵은 좀 모자란 사람인듯, 애초부터 앵글 밖으로 빼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듯, 범증과 장량의 머리 싸움으로 각을 잡는다.
물론 이 각이면 한신이 좀 나와야 할 듯 싶지만, 한신은 영화 <해운대>에 잠깐 등장한 롯데의 이대호처럼, 소리만 시끄럽고 내면의 얘기는 아주 없는… 그런 대갈 장군처럼 나온다.
(한신을 너무너무 좋아했던 나로서는, 참 아쉽다, 그가 그렇게 소리나 꽥꽥 지르는 돼지처럼 나오다니…)
장기라는 걸 두면, 양 쪽의 왕에 나오는 초라는 글자와 한이라는 글자, 바로 그 전쟁에 대한 얘기이다.
영화는, 아마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본 영화 <초한지>는 통일을 끝내고 어떻게 유방이 그의 측근들을 쳐버릴 수밖에 없는가, 거기에 시선을 맞춘 영화이다. 그래서 이건, 전통적인 유방과 항우의 대결과도 좀 시선이 다르다.
(어쩌면 지금 중국의 상황에서, ‘토사구팽’,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는 상황이 좀 반영된 거 아닌가라는 약간의 추측을…)
이 영화의 하일라이트이자 결정적인 시퀀스는, 보통은 항우의 마지막에 맞추어져 있을 것 같지만, 그 전투가 끝나고 바로 한신과 장량을 잡는, 그렇게 연결된다.
이유는 없고, 설명도 안 해준다.
다만, 너무 강한 한신을 잡기 위해, 그가 있는 방을 포위하고 활을 날리는 궁사들만이 있을 뿐, 그리고 거기에 대항해서 뭐라도 해보는 한신의 모습.
장량은 더 초라하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말을 타고 도망가는 장량, 그리고 결국 활에 맡고 사막의 모래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장량의 말…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번쾌가 유방이 자고 있을 것이 뻔한, 왕실로 들어간다.
당근빠따, 쫄따구들이, 이제는 대장군이 된 번쾌를 막아선다.
근데…
그 앞에 유방이 나선다.
내버려두어라…
번쾌, 씨부린다.
나, 번쾌, 좃도 아닌데, 니를 따라 나섰고, 블라블라, 하여간 한신, 장량, 다 니가 좃도 아닐 때 니랑 내랑 쟤들 좃도 아닐 때 이렇게 저렇게 꼬드겨 데블고 나온 얘들,
별 잘 못한 것도 없는데, 그리고 내가 걔들한테 하자고 했는데, 니가 이렇게 쳐죽여,
니, 이제 내 필요 없지?
나, 번쾌, 이제 필요 없는 존재이구나…
요 시점에, 유방이 한 마디 할까 말까, 숨 죽이고 봤는데, 역사 속 우유부단의 대명사, 유방과 유비, 역시 한 마디 없고…
번쾌는, 순간…
그가 항우와 맞대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던 그의 칼로 그의 목을 그어버린다…
번쾌의 최후.
요 시퀀스가 다 합치면, 10분 조금 넘는데, 야…
유방의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장면에서 한신이 죽을 때부터 번쾌가 죽을 때까지, 나는 거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냥 울었고, 울고 울고 또 울었다.
몇 번을 돌려봐도, 울고 울고 또 울음이 났다…
이건 미래 시점에 대한 감정이입이 아니라, 바로 그 날의 감정이입이라고나 할까?
한명숙이 민주통합당 당대표가 되고, YMCA의 이학영 대표가 최고의원에서 떨어지던 날…
모르겠다…
그 뒤의 시대가 좋아질지는… 하지만 죽어나갈 사람들의 모습들이 너무 분명해보였던 밤,
영화 <초한지>를 보면서 참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 더 울었던 건,
“이러면 안된다”고, 최소한 영화 속에서는 한 마디 했던,
그런 번쾌도 우리에게는 없을 것이라는 걸.
그래서,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었다.
이 얘기를 한참이나 지난 오늘 다시 회상하는 것은,
지금의 민주통합당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데이터상의 승부를 보고, 토사구팽을...
(영화 볼 때에는 없었던 일인데, 나중에 박선숙이 자신의 전략공천을 포기하면서, 번쾌가 아주 없지는 않구나, 그런 걸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선숙, 그가 번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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