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할배가 '삼성만큼만 하라 그래', 그런 시대를 열었다...)

 

왜 지금 직장 민주주의인가?

 

1.

기업 문제에 대해서 경제학은 입을 다무는 쪽이다. 기업은 무엇인가, 명확한 정의가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없다. 투자하는 주체 정도이다. 그리고 이윤 극대화, 이것은 일반균형 모델을 풀기 위해서 왈라스 등 한계효용 학파에서 수리적으로 제시한 가설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장에서 최고 가격을 받고 물건을 파는, 특정 재화의 독점 공급자라고 정도의 위상을 갖는다. Initial endowment라고 하는, 이유는 모르지만 하여간 어떤 물건을 가지고 시장에 거래하러 나오는 사람, 이 사람이 기업이다. 일종의 1인 행위자 모델이다.

 

맑스도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과정이라는 개념은 있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 이렇게 점 세 개로 처리한다. 모른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기업을 블랙박스라고 불렀다. 진짜 말 그대로 블랙박스다. 우리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진짜? 진짜로 그렇다. 밖으로 드러나는 기업의 행위를 알 수 있을 뿐이지,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이 일에 관심이 있던 사람은, 한국 특히 한국 노조에서는 괴물 정도로 간주되는 장 밥티스트 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이는 사장 출신이었다. 그래서 기업 현상에 관심이 많았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 현상에도 관심이 많았다. ‘세이의 법칙말고 세이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전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어쨌든 그는 솔직한 사람인 것은 맞다. 그만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기업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 것은, 세이 정도다.

 

그리고 제도학파, 톨스타인 베블렌으로 넘어온다. 19세기의 얘기들이다. 기업가 정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가의 본능에 대한 얘기는 베블렌이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슘페터의 이론을 재해석하는 순간까지도 사람들은 기업이 아니라 기업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기업=CEO, 이게 보편적인 생각이다. 맑스는 이것을 육류화된 자본, 이렇게 사장을 정의했다. 자본이 피와 살을 갖추면, 그게 사장이다, 그런 얘기다. 그러면 사장 혼자 다 해쳐먹는 거야? 당연히 그 질문이 나온다. 이렇게 물어보면, 경제학자들은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혁신가 정신이라는 둥, 창조적 파괴의 본능이 있다는 둥, 좀 이상한 소리를 하는 수밖에 없다.

 

신제도학파에서 조직론 정확히는 조직 현상이 주목을 받으면서 기업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조직의 재발견이라는 졸저는, 이 이론들을 정리했던 책이다. 이 이상 더 자세한 이론은, 경제학에는 없다. 신기하겠지만 기업 내부의 문제는 경제학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에이전시 이론 등이 부분적으로 이 영역을 다룬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기업은 이렇고, 이래야 하고, 이런 것은 없다.

 

2.

그럼 뭔 소리를 할꺼야?

 

기본적인 틀은 이렇다. 경제가 사회 속에 존재하고,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쉬운 말이다. 물론 이 쉬운 말을 겁나게 어렵게 하는 방법도 있다. 칼 폴라니의 embedness에 관한 것이라고 하고, 우리 말로 배태성이라고 부르면 갑자기 사람들 머리 돌아가기 시작한다. 배태성? 이런 말을 알아 처먹을 한국인이 있을까 싶다. 하여간 경제인류학에 나오는 개념이다.

 

80년대와 90년대, 한국을 선도하는 그룹을 기업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은 건국 초기 이후로 군인들의 나라였다. 한국의 원형, 그게 군대가 아니라고 해도 이상하다. 70년대에 수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이 사이로 상인들 아니 넥타이들의 시대가 열린다. 876월의 넥타이 부대를 가장 부드럽게 정의하는 방법이다. 이즈음에 군인들로부터 회사의 넥타이들로 리딩 그룹에 대한 전환이 발생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90년대 후반에 대기업에 다녔다. 그 때 내가 본 회사는 그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뛰노는 동네는 아니었다. 군인들보다는 나았던 것 같다. 요기까지가 기본 가설이다.

 

21세기가 되었다. 한국 사회는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사회 일반과 기업의 수준에서 역전 현상이 벌어진다.

 

그 전에는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잘 안되면 전부 민도탓을 했다. 국민 수준이 안된다는 얘기다. 군인도 민도라는 말을 입에 썼고, 회사 사장들도 그렇게 했다. 군대, 기업, 이런 데가 엘리트 집단이고 그 밖에 있는 일반 국민들은 제3세계 민중 수준이라는 의미다. 사람들이 무식하니까 되는 일이 없어, 그렇게들 우리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민주당 정권 10, 한국당 정권 10, 그렇게 21세기의 시간이 흘렀다.

 

어쨌든 21세기에 들어오려는 시점에 한국 기업이 아주 후지지는 않았다고 치자. 이건희가 고딴 소리를 종종 했다.

 

지난 20년간, 뭔가의 변화가 생겼다. , 이 변화가 무엇일까? 지금 한국의 회사 일반이 국민 일반의 수준보다 높을까? 이제는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촛불이 만든 변화라고 하든, 민주주의가 누적된 효과라고 하든, 지금 한국에서 국민의 민도,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민들이 무식해서, 대중들이 우매해서, 요딴 얘기는 이제 한국에서는 안 통한다. 그게 촛불이 만든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3.

사회 일반과 기업 일반의 수준에서 불균형이 생겨났다. 이 불균형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주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이 불균형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기업을 계속해서 이 사회 내의 블랙박스로 둘 것인가, 아니면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모종의 과정을 만들어낼 것인가?

 

대한항공 조씨 우리는 그 조가 일가를 이렇게 불렀다, 매우 독특했다 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20세기에도 그 지랄들을 했을 것이고, 21세기가 되어서도 조가 방식으로 계속 지랄들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게 문제가 돼? 조가들이 이해 못하는 변화가 한국에 생겼다. 이제는 그러면 안된다.

 

근데 문제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이게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혹은 공기업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을까? 임금과 복지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생지랄은, 대개 거기서 거기다. 이 사회가 같은 사회인데, 민간기업과 공기업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벌어질까?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정도. 내가 보기에는 별 차이 없다. 민간기업의 50대 이사와 정부의 50대 국장 사이에 엄청난 문화적 차이와 지성의 차이가 있을까?

 

내가 이제 그 나이가 되었다. 그놈이 그놈이다. 중소기업은 좀 차이가 난다. 규모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들이 있고, 지나치게 우대를 받다 보니까 발생하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사회 일반과 기업 일반 사이의 차이를 줄이는 것, 이게 지금 한국에서 내가 생각하는 직장 민주주의다.

 

20세기에는 아주 웃긴 대중들에게 회사 사장들이 기업만큼만 해라, 그랬다.

 

삼성만큼만 하라 그래!”

 

이건 정확하게 내가 들은 단어 그대로다. 판사 한 명, 검사 한 명, 진짜로 요렇게 말하는 것을 내 귀로 들었다. 21세기 초반의 일이다. 지금은 이게 역전 되었다.

 

이 차이의 잣대가 효율성, 엄밀성, 정당성, 정의 등등이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이번에는 민주주의라는 저울을 쓰려고 한다. workplace에서 발생하는 민주주의의 문제

 

(물론 고전적으로 독일에서 얘기하던 산업 민주주의의 일환으로의 직장 민주주의와는 조금은 결이 다른 얘기다좀 더 우리의 상식에 가까운 방식으로 정의한…)

 

http://cafe.daum.net/workdemo/iPgv/16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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