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6 12 29, 진짜로 낼 모래면 50이 될 그런 날이다. 오후에 두 아이 어린이집 하원 시키느라 잠시 주차하고 있다가 문자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황준욱 박사가 오늘 10:50 별세했습니다."

 

그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은 지난 여름에 들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 오지 않았으면 했다고 했다. 나보다 한 학번 위의 선배이다. 같이 공부했고, 같이 축구도 했다. 그는 진짜 마라도나처럼 축구를 잘 했다. 그리고 요리도 잘 했다. 가끔 내가 아이들한테 양 갈비 같은 것을 양념에 재워서 구워주는 적이 있다. 아이들도, 아내도, 아주 잘 먹는다. 그걸 준욱이형한테 배웠다. 유학생 살림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은데, 그 양반은 조금 가격이 싼 양고기를 잘 썼다. 그 때 요리법을 배웠다.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지만, 총리실에도 같이 근무했었다. 거기 있는 줄 모르다가, 진짜로 우연히 만났다. DJ 시절, 전자정부 만든다고 한참 난리칠 때, 전자정부 담당 전문가로 파견 근무 나왔다. 경제 조직론을 그와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후에도 종종 만났다. 황준욱, 그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늘 나에게 뭔가 하자고 했었는데, 나는 늘 별 관심 없다고 했었다. 경제 전문대학원 같은 것을 만들어보고 싶어했고, 혁신형 교육기구 같은 것도 만들고 싶어했다. 나는 그냥, 내가 벌려놓은 일이나마 망가지지 않게 하느라고 늘 정신이 없었고, 새로운 일을 벌릴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전문 대학원은, 이미 만들어본 적이 있다. 한 번 해 본 일을 또 하는 데 그렇게 매력이 당기지는 않았다.

 

아내와 대학생 아들 하나를 두고, 친구처럼 평생을 살았던 선배가 그렇게 떠났다.

 

친구의 초상에 친구들이 모이는 것은 처음 한 경험은 아니다. 그렇지만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마흔이 될 때에도 생각을 많이 했다. 진짜로 많이 했었다. 그 때는 뭘 해야겠다, 어떻게 살아야겠다, 욕망과 윤리 이런 것들 사이에서 삶을 돌아보는 게 그 시절에 많이 했던 생각이다. 이제 나도 낼 모래면 50, 쉰이 돤다. 막상 이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순간, 떠나버린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상징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50도 채우지 못하고 떠나간 친구들, 나는 뭔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나, 이런 생각도 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진짜로 낼 모래면 50이 되는 날, 친구들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너나 나처럼, 대충 산 사람이 아니라 아니라 준욱이 형이 먼저 죽다니, ."

 

빈이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한 얘기다. 맞기는 맞는 말이다. 나는 대충 살았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빈도 대충 살았다. 우리와는 다르게, 황준욱, 그는 부지런했고, 규칙적으로 살았고, 진짜로 열심히 살았다. 말도 잘 하고, 잘 생기고, 사람들도 잘 챙겼다. 그리고 축구도 잘 하고공부도 괜찮게 했다. 축구장에서든 삶의 현장에서든, 황준욱, 그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20대 중반 때, 같이 경제학 공부하던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흔한 성씨는 아니지만, 다른 두 친구들에 비하면 희성 축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한 명이 빈, 또 다른 한 명이 옥이었다. 그 시절에는 빈은 결혼을 했었다. 우리는 빈네 집에 가서 밥 먹고, 나오면서 옥이랑 한 잔씩 더 했다. "한국에서 가장 희귀한 성씨는 볍씨", 이런 아재 개그가 우리들에게 따라 다니던 농담이었다. 볍씨가 성으로 있을 리가 없다. 기구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한국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우씨, 빈씨, 옥씨가 파리까지 와서 그렇게 점심, 저녁 같이 먹으면서 어울려 다니는 게 남들 눈에는 기구해보였나 보다. 다들 가는 미국 유학을 안 가고 파리에서 모인 세 명의 희성 경제학도들게다가 옥은 변과 결혼을 했다. 희성 시리즈는 아직도 계속 된다. , , , 내 주변에 친한 친구들.

 

옥은 지방에서 오느라고 늦었고, 빈과 옥의 아내 변, 그렇게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옥은 OECD에 근무하다가 지방대학 교수다 되었다. 빈은, 그냥 민간연구소에서 정년을 맞을까 하는데, 연구소에서 나이 많다고 자꾸 나가라고 해서 고민이 생겼다. 그의 아들은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된다. 우리 집 애들은, 이제 네 살, 여섯 살이 된다. 갈 길이 멀다. 옥은 조금 얌전하게 살았고, 빈과 나는, 대충 살았다. 정열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50을 바라보는 지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대충 산 거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재밌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심통 부리고세 친구는 오랫동안 같이 모이지 못하다가 2년 전부터는 좀 자주 모였고, 자주 봤다. 술도 종종 했다. 옥은 이제 주량이 줄었다. 물론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들 보다는 많이 마신다.

 

우리가 그렇게 몰려 다닐 때, 바로 위의 선배가 황준욱이었다. 아직 결정된 것이 거의 없던 20대 경제학도들의 세상이 그렇게 소박하지만 꿈만은 찬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어느덧 20년도 더 된 기억으로 돌리며, 상가집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 그런 게 50대의 삶이라는 것을 너무 상징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상가집에서 나와서 빈과 감자탕 집에 들렀다. 소주 한 잔 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가기는 좀 그랬다. 상가집에서 각 1, 나와서 각 1,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더. 50이 되면 걱정이 줄어들까? 빈은 걱정이 없거나, 걱정이 있어도 하지를 않으면서 살았다. 산업은행을 그만두고 유학 길에 오를 때, 오죽 걱정이 많았겠나. 내 주변에 산업은행 출신들이 몇 명 있는데, 그 중에 삶이 가장 고달픈 것은 빈이었다. 그래도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지, 그러면서 살았다. 우리는 같이 50이 되었다. 빈도 이제는 걱정이 많아졌다.

 

(2016 12 30, 임시연습장 메모)

 

2.

빈의 아들은 아버지인 경제학도와는 달리 사회학도가 되었다. 빈의 아들이 수능시험 보는 전날 그의 아버지는 나와 술 마셨다. 아버지는 무덤덤하게 얘기했지만, 아들의 미래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아버지를 둔 덕에 아들이 엄청난 사교육을 받거나 그렇게 지내지는 않았다. 고대 합격이 발표되던 날, 그 날도 빈은 나와 술을 마셨다. 좋아했다.

 

옥의 일상적 삶은 잘 모른다. 별로 그렇게 지방대학도 아닌데, 지방대학 교수의 고충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정년이 보장된 것을 제외하면 엄청나게 다르게 살지는 않는다. 빈의 아들은 아직도 본 적이 없지만, 옥의 고등학생 딸은 그가 데리고 와서 본 적이 있다.

 

옥과 빈은 나와는 학교가 다르다. 나는 어차피 동문회나 동창회 같은 데는 거의 나가지 않지만, 그 친구들은 학교 모임 같은 데에 종종 나가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별로 볼 일이 없었다. 최근에는 종종 본다. 빈은 집이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진짜로 술 한 잔 먹고 싶을 때에는 같이 술 마신다. 옥은 지방에 있어서 그렇게 지나는 길에 만나기는 쉽지 않다. 벌려놓은 행사가 엉망이 되면서 급하게 대타가 필요할 때 나는 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후로는 옥도 가끔 '땜빵'을 나에게 부탁한다. 이래저래 30대에 비해서 좀 더 자주 보게 되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의 박사들, 그냥 아무 것도 없이 보면 최상급 간판들을 달고 있다. 같이 공부하던,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그래도 애 키우고, 먹고 살 것 걱정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처럼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몰려다니지는 않지만, 지금도 한국 경제나 우주의 미래 같은 얘기보다는 먹고 살고, 애들 키우는 그런 소소한 얘기들을 더 많이 한다. 서로 필요해서 만날까? 심심해서 만난다. 가끔은 그냥 이유 없이 옛날 얘기나 하거나 밑도 끝도 없이 술이나 같이 마실 사람들이 필요한 날이 있기는 하다.

 

또 다른 한편에는, 폼 나는 대학이나 남들이 알아주는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이 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친구들이 있다. 친구는 다 같은 친구다. 동선이 겹쳐서 좀 더 자주 만나게 되는 친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친구가 있을 뿐이다. 시간은 많은 것을 무디게 만든다. 50, 다시는 안 본다고 했던 친구도 다시 보면 반갑다. 무슨 그렇게 결정적인 싸움이었다고, 이젠 기억도 잘 안 난다. 친구가 많은 게 재산이라고 하는 얘기가 있다. 그런 건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그냥 해보는 얘기다.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친구는 그냥 친구다.

 

50이라는 나이를 넘으면서, 우리는 훨씬 더 평등해졌다. 이제 언제 누구 죽을지 모른다. 이제는 누가 죽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더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상가집에서 각 1, 상가에서 나와서 다시 각 1, 어차피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다. 다른 건 21세기로 넘어온다고 해도,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른 방법을 모른다. 20세기식으로, 1. 그렇다고 더 위의 사람들처럼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는 것은 어색해할 정도로는 신세대다. 미국에서 X세대라는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게 딱 내 나이부터였다. 80년대, 군인들과 87년이라는 험한 시대를 보내면서 운동권이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지만, 세계적으로는 내 나이부터가 신세대다. 50이 되었지만, 곡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친해도 그렇다. 그렇다고 국화꽃 하나 놓고 덤덤하고 쿨하게 나오기에는, 속에서는 울컥 하는 무엇인가가 남는다. 그래서 각 1, 다시 나와서 각 1, 참 올드하다.

 

3.

빈과 옥이 유학 시절의 친구라면, 그 뒤에도 친구가 된 사람들이 있다. 동선이 겹치기 때문에 아무래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공무원 중에도 진짜 친구들이 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같이 지냈는데, 친구가 안 되기도 어렵지 않은가. 지나보니까, 친구는 평생 생기는 것이다. 아마 60이 되거나 70이 되어도 친구가 생기고, 동무가 생기게 될 것이다. 사람 사는 건 그런 것 같다.

 

내 친구들 중에는 나에게 자신의 장례를 부탁하는 친구는 없다. 그 대신, 내 장례는 꼭 자기가 근사하게 치루어 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친구들은 몇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더 오래 살 것 같단다. 나는 그 말이 맞다고는 생각한다. 태견하는 친구, 술이라고는 마시지 못하는 친구, 그리고 '운빨'이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 별 거 안 했는데도 잘 살아남은 친구, 아무래도 그들이 나보다는 오래 살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그래도 내 장례를 자기들이 알아서 해주겠다고 해주는 꼴을 그냥 보고 있기는 좀 그렇다.

 

"난 장례 안 지내."

 

진심이다. 친척이라고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싸우는 게 너무 보기 싫어서 내 생일도 안 한다. 나는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 근처에서 태어났으니까, 죽으면 안산 아니면 아무 산이나 대충 뿌려달라고 할 것이다. 기일은 물론, 일절 아무 일 없이 잊혀지는 게 좋다. 그러니까 내 친구들이 내 장례식에 모여서 각 1병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몇 번은 친구들 장례식에 가서 각 1병을 하기는 해야 할 것 같다. 산다는 게 그렇다.

 

나는 오래 살거나, 잘 살거나, 그런 꿈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50이 되면서, 30년만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친구들은 내가 하는 말에 "옳다"라고 하는 일은 없다. 맞든 틀리든, 내 친구들은 "그건 아니지", 그렇게 일단 부정부터 한다. 우린 그렇게 살았다. 그 녀석들이 수 십년만에 동의한 것은, 진짜로 30년만 더, 아프지 않고, 추례하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내가 80이면 둘째가 35세다. 정말로 운이 좋다면 둘째의 아이들까지 약간은 돌봐줄 수 있을 나이다. 내 삶과 관련해서, 그 정도면 나는 정말로 더 바랄 게 없다.

 

나는 부자로 살 생각도 없고, 힘 있는 권세가로 살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아무거시', 그럴 생각은 더더욱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런 기록적인 개소리가 있다. 호랑이를 죽이고 싶어서 만든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랏님이 하시는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듣고 대충 개처럼 살라고 만든 이데올로기이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은, 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잇속이 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렇지만 50 7, 5, 두 아이의 늙은 아빠가 된 후, 염치 없이 30년만 더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평생 안 하던 기도를 가끔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오래 살게 해달라는, 그런 허망한 기도는 하지 않는다. 내가 신이라도 그런 황당무계한 기도를 하는 사람을 특별히 잘 봐주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질 것,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그런 걸 기도한다. 예를 들면, 삼성의 이재용이 2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나중에 그가 지옥에 가게 해달라고 하는 것, 그런 기도를 주로 한다. 그건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배우 김수미가 영화 <헬머니 - 확인>에서 주옥 같은 대사를 날렸다.

 

"차가게 살어."

 

내 작은 잇속을 위해서 착하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는 내 모습을 돌아보면, 참 가증스럽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없는데, 어쩔 것인가. , 명예, 그 어떤 것도 50이 넘은 사람의 30년을 보호하거나 보장해주지 않는다. 옛날 기준으로 하면, 진짜 이만큼이면 살만큼 산 거다. 세종대왕이 53세에 돌아가셨다. 22세에 왕이 되어, 30년 정도 왕노릇한 거다. 평균 100세를 살지도 모른다는 지금, 우리 모두가 평균적으로 세종 보다 2배는 더 살게 된다. 그러나 그건 평균치다. 개개인의 삶, 마치 잉글 베르그만 감독이 <7의 봉인(1957)>에서 다루었던 죽음처럼 아무 인과관계 없이 그냥 찾아오는 것이다.

 

현실에서, 나쁜 놈이라고 먼저 죽고, 좋은 놈이라고 천천히 죽고, 그런 것은 없다. 전또깡, 바로 그 전두환은 아직도 한참 더 살 것 같다. 그래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전략은, "차가게 살어", 이것 밖에 없다. 되는 대로 살고, 대충 살고, 그리고 기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빈과 옥을 위해서 소주 각 1병을 할 확률 보다는 그들이 나를 위해서 각 1병을 할 확률이 훨씬 높다. 친했던 친구를 보내고 각 1병 하는 것, 사실 80이 될 때까지는 안 하고 싶다. 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많이 벌었든 적게 벌었든, 이혼을 했든 안 했든, 지금 50인 친구들과 80까지는 어떻게든 그냥그냥 버텼으면 좋겠다. 방법은? 나도 가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 어느 추운 날의 기도

 

정말 추운 날이다. 내일은 더 추워진단다. 집은 따뜻하다. 일곱 살 큰 애는 혼자서 책 보고 있고, 다섯 살 둘 째는 혼자 로봇 장난감 가지고 놀다가 손이 끼었다고 울면서 뛰어온다. 일하다 늦게 들어온 아내는 내가 비벼준 비빔밥을 맛있다고 크게 한 입 먹었다. 나만 혼자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특별히 되고 싶은 것도 없지만, 특별히 미워하는 것도 없는 삶이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그냥 그러세요 하고 만다. 뭔가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너무 비싸, 이러고 만다. 행복하기 위해 먼저 불행해져야 하는 건 이젠 좀 지겹다. 그리고 더 큰 행복을 위해서라고, 더 큰 혐오를 갖는 것도 이젠 좀 피곤하다. 추운 날, 따뜻한 집에 있으면 더 바라는 게 없다. 아이들 뛰어 노는 소리가 들리고, 냉장고에 적당히 먹을 게 있고, 집은 따뜻한데, 뭘 더 바랄 것인가? 천국의 모습을 누군가가 그린다면 이것과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재용이 감옥에서 풀려났다. 아주 희한한 판결이 나왔다. 그들을 위해서도 잠시 기도. 지옥갈겨! 잠시 생각하다가 기도를 한 마디 더 한다. 생지옥 갈겨! 그들의 부모들을 위해서도 잠시 기도. 아멘...

 

천국을 먼 곳에서 찾을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추운 겨울, 잠시만 돌아보면 사방에 보살이고, 천국은 천지에 널렸다. 추운 날, 더욱 감사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하게 된다.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