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게 남는 거다, 영화 <킹스맨>

 

1.

 

"저건, 마가랏 대처의 암살을 막았을 때 사진."

"왜 그런 일을 하셨어요?"

"아무에게도 좋은 소리 못 들었지."

 

영화 <킹스맨>을 다시 봤다. 이 얘기는 1995 BBC에서 나온 드라마 <오만과 편견>에서 시작된다. 드라마는 6부작이다. 지금까지 나온 <오만과 편견> 중에서 제인 오스틴의 의도를 가장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의 바로 그 '오만', 다아시로 나온 사람이 젊은 콜린 퍼스이다.

 

<오만과 편견> 6부작 드라마를 다시 봤는가? 죽고 싶지 않아서 보았다. 이제 나이 50, 되는 대로 살다가는 아주 비참한 60대를 보내기에 딱 좋은 구조이다. 나는 조금 더 메이커로 살아가고 싶은데,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고민을 지난 몇 년간 너무 안 했다. 진짜, 아무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나에게 들어오는 의뢰 중에서 나도 하고 싶은 게 겹치는 게 주로 코미디 시나리오이다. 나도 해보고 싶고, 주변 사람들도 목놓고 기다린다. 몇 년 전에 정치 코미디 기획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입으로만 구상을 주변에 얘기했었는데, 이게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서 진짜로 유명한 감독들이 해보고 싶다고 건너건너 연락이 왔었다.

 

만약 그 때 차분하게 앉아서 그걸 마무리 지었으면, 지난 몇 년간 내가 겪었던 그 비참함과 비루함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차분하게 살지 못했고, 내 또래 남자들이 주로 그렇듯, 나도 희생이라는 비겁한 변명 아래 영광과 권력을 향해서 뛰어간 것 같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고 나니, 진짜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거기다, 애 둘 보고 있으면, 머리가 하얗게 된다.

 

그래서 진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잡은 게 BBC에서 만든 <오만과 편견> 6부작 드라마이다. 대략, 10번쯤 본 것 같다. 재밌다. 진짜 재밌다.

 

여기에 젊은 시절의 콜린 퍼스가 나온다. 아직은 파릇파릇하다.

 



2.

 

영화 <브릿지 존스의 다이어리> <오만과 편견>을 그대로 영화로 가져왔다. 콜린 퍼스가 연기했던 BBC 드라마의 다아시 캐릭터는 영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그 배우 그대로, 극중 이름 그대로, 콜린 퍼스가 다아시를 연기하는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진다. 영화도 대성공을 거둔다. 다아시라는 캐릭터는, 원작의 소설에서도 그랬지만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빅히트를 친다. 그리고 콜린 퍼스의 시대의 최정점을 찍는다.

 

결국 다이어리 시리즈는 3편까지 나왔는데, 나는 2편이 제일 좋았다. 특히 휴 그랜트와 콜린 퍼스가 분수대 안에서 혈투를 벌이는 장면은 진짜로 재미 얄지다. 돈 잘 버는 인권 변호사와 잘 나가는 TV 진행자가 한 여자를 놓고 한 판 벌이는 것인데굳이 한국 상황과 비교를 하자면 젊고 괜찮던 시절의 변호사 노무현과 역시 젊고 멋진 손석희가 사랑을 놓고 치고 받는 개싸움을 하는 것이다.

 

, 이들의 사랑을 받는 브릿지 존스가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 별로 그렇게 행복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젊고 잘 생긴 사람과의 다아시와의 연적 관계, 원래 <오만과 편견>에 나왔던 핵심 모티브이기도 하다.

 

드라마 <오만과 편견> <브릿지 존스의 다이어리>, 일종의 모자 관계이다. 다아시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콜린 퍼스가 두 코미디의 공유된 DNA이다. 제인 오스틴의 영국식 유머가 그렇게 찰진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3.

그리고 <킹스맨>, 역시 자잘한 영국식 유머가 넘친다. B급 정서에 화장실 유머, 한국에서는 통할 때도 있고, 안 통할 때도 있는데, 어쨌든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

 

감독과 제작을 동시에 하는 매튜 본은 원래 웃기는 거 겁나게 잘 하는 사람이다. 감옥 안에서 벌어지는 축구 시합을 그린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실컷 웃었다.

 

최근의 <엑스맨> 시리즈도 매튜 맨이 연출을 한다. 엑스맨에 유머 요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아포칼립스 스타일이다. 세계 평화를 너무 걱정하다 보니까, 잔잔하게 유머작렬시키는 영화와는 좀 차이가 난다. 그런 매튜 맨이 <킹스맨>에서는 진짜로 각 잡고 웃겼다.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의 콜린 퍼스에서 <킹스맨>의 콜린 퍼스에 이르기까지, 그 한 인생을 놓고 보면 할 얘기들이 많을 것 같다. 내가 그 안에서 읽은 것은, 대놓고 웃기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 속에 녹아들어들어가는 유머, 그런 것이 갖고 있는 미덕이다.

 

4.

나 자신을 돌아본다. MB 5, 근혜 - 아니 순실이 - 5년을 거치면서 감성이 너무 매말라 버렸다. 웃는 것도 미안하고, 웃기는 것도 죄짓는 것 같은 그 10년을 보냈다.

 

우리나라 경제만 바짝 마른 나무들처럼 매마른 것이 아니라, 나의 정서와 감성도 바짝 마른 것 같다. 독설로 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버나드 쇼가 그렇게 독설을 잘 했다고 알고 있다.

 

독설과 욕이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원래도 욕하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다. 물론 욕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만, 하고 나서 기분이 좋기보다는 뭔가 찜찜했다. 그냥 내 스타일이 원래 그렇다. 그리고 가급적 욕을 안하고 사는 방식으로 지금껏 지내왔다.

 

그러다 보니, 감정은 메마르고, 삶은 힘들고, 우리 모두 힘들고. 힘들고 어렵다, 이런 감정 말고는 남는 게 없다.

 

MB, 순실이, 책임지라고 해도 그럴 리가 없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분노? 분노로 10년씩 버티지 못한다. 진짜로 분노만 남으면, 일상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다. 분노는 때때로, 가끔 폭발하는 것이지, 분노의 마음만으로 삶을 유지할 수가 없다. 정말로 그렇게 하면 정신과 주치의가 생겨나게 된다. 그렇게는 못산다.

 

그럼 슬픔? 미안함과 슬픔, 그런 게 새누리당 아저씨들이 만들어낸 10년을 지내면서 보편화된 감정이다. 늘 미안하고, 돌아서면 슬프다. 잘 못해서 미안하고, 잘 안 되서 슬프고, 이기지 못해서 미안하고, 이길 수 없어서 슬프다. 개인사든 사회의 역사든, 지난 10년간 미안함 아니면 슬픔이었다.

 

"왜 마가렛 대처 암살을 막으셨어요?"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콜린 퍼스의 애환, 이런 게 코미디적 요소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걸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것 같다.

 

5.

BBC 드라마 6부작 <오만과 편견>에서 <브릿지 존스의 다이어리> 그리고 <킹스맨>까지, 그렇게 보다 보니까 콜린 퍼스의 일대기가 되어버렸다. 이걸 전체적으로 몇 번에 걸쳐보고 딱 남은 말 하나가,

 

"웃기는 게 남는 거다",

 

요 한 문장이다. 뭐가 웃기는 거냐? 그렇게 정색을 하고 물어보면 나도 마땅한 답변은 없다. 그렇지만 미안함과 슬픔이 있는 자리에 웃기기 위한 노력이라도 들어가야 할 것 같다.

 

50을 넘으면서, 나도 영광스럽던 지난 10년을 털고, 밑바닥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절절함이 아니었으면 20년 전 BBC에서 했던 드라마를 그렇게 목숨 걸고 다시 볼 이유가 있겠나? 읽어야 할 책은 책상 위에 가득가득 놓여 있고, 써야 할 글도 잔뜩인데, 만사 다 제쳐놓고 화면도 구린 옛날 드라마를 뭐하러 봤겠냐?

 

죽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웃기지 못하면, 남 욕이라도 하게 된다. 남 욕하는 걸 스타일로 삼는 건, 진짜로 죽기 보다 싫다. 웃겨야 산다. 웃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런 노력이 미안함과 슬픔 보다는 나에게 훨씬 낫다. 심각한 문장들, 이제는 내가 참기가 어렵다. 나를 위해서도 더 코미디 쪽으로 가보려고 한다.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