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일본 호카이도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리키라는 개의 개동상은 꼭 보고 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사뽀로에서 너무 멀다. 사뽀로 거의 초북단, 조금만 더 가면 러시아고 북극일 것 같은 곳이다. 호카이도 북쪽에서는 빙하가 녹아 떠다니는 유빙을 볼 수 있다. 저곳이라면 유빙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진화의 <빙하 곁에 머물기>는 추운 얼음, 그것도 극지나 산 높은 곳에 있는 아직 녹지 않은 얼음들의 깊은 곳에 있는 얼음을 연구하는 얘기다. 극한 직업이 있는 것처럼, 극한 연구도 존재한다. 헬기가 틈틈이 등장하고, 드라마 <실팀>에서 맨날 보던, 의자를 다 떼어내거 그냥 바닥에 앉는 군용기도 종종 나온다. 

나는 마침 이 책을 식구들하고 강릉 여행 중에 읽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닌데, 우리 집 어린이들이 강릉 스테이트장에서 스케이트 타는 동안, 정말 몇 년만에 처음으로 카페에 혼자 앉아 책을 읽었다. 틈틈이 강릉 빙상경기장의 얼음 앞에 서면서 이틀에 걸쳐 책을 읽었다. 내 삶에 얼음을 이렇게 많이 보고, 이렇게 많이 생각한 것은 처음이다. 

책을 읽기 전에 <남극의 쉐프>, 일본말로 ‘남극요리인’을 봤었다. 방하 코어를 채굴하는 얘기를 본격적으로 본 건 거기가 처음이었다. 다시 봤다. 몇 번이나 본 영화인데, 전체 스토리가 이제야 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드라마 <남극 대륙>을 보기 시작했다. <빙하 곁에 머물기>를 읽지 않았으면 보지 않았을 드라마다. 일본 국뽕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개국뽕으로 마무리하는 영화다. 일본인은 약할지 몰라도, 홋카이도의 개, 아니 일본의 개는 위대하다! 드라마 뒤의 절반은 개 얘기다. 

실제 개가 남극의 겨울을 어떻게 자기들끼지 버텼는지 얘기해줄 리가 없으니, 그야말로 후반부는 개구라다. 그래도 극적으로 대장 역할을 했던 리키가 기지 앞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두 마리의 개도 살아남았다. 십여 마리의 개에 한 마리 한 마리의 스토리가 있고, 사연이 있다. 개구라일지 몰라도 혹은 개국뽕일지 몰라도, 얘기는 재미있다. 

영화 <남극의 쉐프>에서 “펭귄은 없나요?”, “바다표범은 없나요”, “그럼 귀여운 동물은 없나요?”, 그렇게 끊임없이 언급되는 쇼와 기지가 드라마 <남극 대륙>에서 국뽕이 펼쳐지는 무대다. 패전 후 일본, 여기에 뭔가 의미 있는 전환점을 만들기 위해서 기지 이름을 쇼와 기지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딴 건 없는, 완전 사막 기후에 고지에 있는 게 후지 기지다. 동물은 물론, 아무 것도 없다. 

이 후지 빙하에 대한 얘기가 신진화 책 앞 머리에 나온다. 마침 보고 있던 영화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책을 진짜 재밌게 읽었고, 책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를 느무느무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쇼와 기지의 이름은 드라마에 나와서 알 수 있었는데, 왜 후지 기지인지는 신진화의 책, 영화, 드라마, 다 봐도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찾아봤다. 남극의 고지대에 있는 거라서, 일본 후지산이 연상된다고 후지 기지란다. 아직도 빙하의 맨 마지막 바닥인 기반암에 도달하지 못했단다. 

의문점이 아직 다 해소되지는 않았다. <남극의 쉐프>에 나오는 저 후지 기지를 만들 때 기자재는 어떻게 날랐고, 보급품은 어떻게 보낼까? 몇 년 되어서 수선 작업 같은 것을 해야할 때에는 어떻게 하나? 그리고 우리나라의 남극 기지들은 어떻게 만들게 되었고, 어떻게 유지하나, 이런 것들이 아직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우리나라 남극 기지에 대한 건 아직 찾아보지는 못했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남극 얘기들을 더 볼려고 생각하고 있다. 

책에는 빙하 코어에 대한 얘기로서 영화 <투모로우>도 언급되는데, 사실 그 장면이 너무 짧게 지나가서 나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도서관신만 자세하게 기억이 났었다. 

그냥 특별한 선입관 없이 신진화 얘기를 보았을 때, 공룡 화석 발굴사를 볼 때랑 느낌이 비슷했다. 누가 먼저 티라노사우르스의 화석을 발굴할까, 누가 먼저 대형 초식돌물의 온전한 화석을 발견할까, 레이스가 붙었던 적이 있었다. 제국주의 시절의 전형이다. 동물원도 이런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앞다투어 만들었었다. 북극과 남극 탐험도 출발은 이런 제국주의 레이스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은 여기까지였다. 

공룡과 빙하 코어가 다른 점은, 공룡은 각 국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국뽕에서 얘기가 끝났다면, 산과 극지에 있는 비하 코어는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연구라는 점이다. 과연 지구의 기온이 어떻게 변했나,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무슨 시사점을 얻을 것인가, 그런 인류 생존의 관점이 공룡 탐사와는 차이점인 것 같다. 

기후 변화 현상은 없다, 이런 게 개소리인가, 아닌가? 그런 걸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해줄 단초가 바로 과거 지구의 역사 속에 있고,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빙하 코어다. 

해상도라는 개념이ㅣ 빙하 코어에 사용되는 게 아주 재밌었다. 얼마나 더 기간적으로 조밀하고, 자세한 데이타를 얻을 것인가, 이걸 해상도라고 불렀다. 너무 뜨문뜨문 데이타가 있고, 정밀성이 떨어지면 해상도가 낮다고 하는가 보다. 저자가 한 연구들이 최초의 고해상도 연구라는 얘기를 읽을 때는 나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고해상도, 그거 아름다운 거구만! 

책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윤석열 개새끼!>로 마무리된다. 연구개발비 삭감의 여파가 그렇게 상업적이거나 떼돈 벌 일 없는 빙하 연구에도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같이 연구하던 동료들이 개계약이 되지 않아 연구현장을 떠나게 되는 얘기로 마무리된다. 독자 여러분, 더 열심히 연구하겠습니다, 힘내세요, 이렇게 책이 마무리되지 않는다. 저자 역시 정규직 연구원이 아니라서, 언제 빙하 연구를 떠나야할지 모른다는 게 끝이다. 이걸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윤석열 이 가이스끼,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유학 갔을 때, 처음 불어를 배웠던 곳이 그르노블이었다. 알프스 한 쪽 귀퉁이에 있는 도시다. 그때 매일매일 알프스를 보면서 살았었다. 거기에서 빙하 연구도 한다는 것은 나는 꿈에도 몰랐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큐빅처럼 귀엽게 생긴 크고 작은 건물들이 연구 단지에 있던 것들은 본 기억이 난다. 세계 최고급의 빙하 연구가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나는 정말 몰랐었다. 

이 책을 다 보고 나면, 위스키가 마시고 싶어진다. 신진화를 연구 세계로 이끈 사람에 대한 얘기다. 극지에서 빙하 연구를 하고 나서, 얼음넣은 언더락스로 위스키 한 잔을 마시는 게 이 아저씨의 낙이었단다. 어느 날 얼음이 떨어져서, 과감하게 연구 중인 빙하 몇 조각을 넣어서 마셨단다. 그런데 뽀롱뽀롱, 얼음에서 기포가 막 나와서, 신기, 신기. 그렇게 빙하에 옛날 대기가 같이 얼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옛날 빙하를 잘 녹이면 그 당시의 대기 성분을 피피엠 단위까지 밝혀낼 수 있다는.. 그런 에피소드 때문인가. 영화 <투모로우>에서도 빙하학자들이 위스키 마시는 게 몇 장면이 나온다. 추위에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다같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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