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24, 김훈...

독서감상문 2009. 11. 9. 19:16

http://www.yes24.com/ChYes/ChyesView.aspx?title=003004&cont=3925

 

yes24에 김훈에 대한 리포트가 하나 올라왔다.

 

와 재밌다.

 

장정일의 신작 소설책을 읽으면서 간만의 충격에 전율을 느끼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충격감과 절망감들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비교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잠시 김훈을 떠올렸다.

 

김훈, 참 재밌는 사람이다.

 

김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여전히 뻥은, 한국에서 김훈이 최고다. 조선일보는 황석영, 백기완 이런 사람들을 구라꾼이라고 부르지만, 원단 구라는, 김훈이 원단 구라이다.

 

옛날 사람들 중에서, 김훈의 원형에 해당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아마 이병주가 아닐까?

 

장정일은, 구라와는 또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여간 아직은 충격파에 휩쌓여, 생각이 잘 정리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간만에 펌질이다.

 

(나는 김훈의 팬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스토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내가 알고 있는 진짜 김훈의 모습은, 김훈은 그의 소설에서든, 간담회에서든, 단 한 번도 꺼내지를 않는 것 같다. 딱 한 번, 어느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사케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그 김훈은 내가 아는 김훈의 모습과 가장 유사했다.)

 

 

그랬다. (할 수)없는 것은 (할 수)없는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고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으며, 육하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다가갈 수 없고, 긍정할 수 없는 죽음도 있으며, 해석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죽음도 있었다.

바다사자는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일어설 수 없는 몸을 일으키려는 몸부림도 쳤다. 아들의 개죽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오금자도 있었고, 딸의 개죽음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방천석도 있었다. 추적할 수 없고 전할 수도 없는 세상을 말할 수밖에 없는 문정수도 있었고,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노목희도 있었다.

『공무도하』(김훈 지음/문학동네 펴냄)는 그랬다. 이해를 바라지도 않고, 억지로 설명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폭력적이 되곤 한다. ‘나를 설득해 봐’라며 이해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강요하기도 하지만, 책은 그런 태도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어쩐 일인지 뜬금없이, ‘세상에 해가 되는 일을 하느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경구가 떠오르기도 하는.

지난달 26일 서울 홍대 부근의 ‘카페 홍’에서 『공무도하』 출간 기념으로, ‘김훈, 소설가로 사는 법을 이야기하다!’라는 주제로 독자 만남의 시간이 있었다. 아주 분명하고 의심이 없는 태도로 일관했던 그는, 좋아하지도 않을, 힘들었을 이 만남을 감내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행사는 출판사의 상업적 동기가 있다. 책을 써서 원고를 서랍에 넣어둔 게 아니고 출판사에 넘긴 것도 상업 행위에 가까운 거다. 왜냐면 나는 소설을 썼을 때 많은 독자에게 읽히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잖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업적 유통망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럴 때 상업적 유통망은 건전한 거다. 상업적 동기가 있다는 것도 건전한 거다. 상업적이라고 해서 비루하고 추잡한 게 아니다. 이런 자리에 나온 것이 비루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힘든 일이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상업적 동기를 놓고, 비루하다, 고매하다,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일상 속에서 필요한 것이다.”

나 역시 이것은 삶을 버티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 쪽도 편들지 않는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당신의 마음에 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않는다. 독자들과 김훈 작가가 나눈 만남을 그저 나의 시선으로 전할 뿐. 독자들이 던진 비슷한 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묶었다. 막막하긴 해도 최소한 치사하지는 않아서 나는, 썼다. “그래도 기사는 쓰지 마. 치사해. 막막한 쪽이 치사한 쪽보다는 견딜 만할 거야.”(p.129) 당신이 싫어도, 나는 어쩔 수 없다. (※ 사진제공 : 문학동네)

『공무도하』, 40여 년을 묵혀둔 발효소설

『공무도하』는 40여 년 마음에 남아있던 것을 끄집어낸, 말하자면 ‘발효(숙성)소설’이다. 언젠가는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알다시피, 우리가 알고 있는 「공무도하가」라는 고전가요에서 비롯됐다. 나루터에서 벌어진 익사 사고에 대한 이야기. 출전문헌인 『고금주(古今注)』는 이렇게 전한다. 어느 날, 백수 광부가 강에 뛰어들어 죽고, 백수 광부의 아내가 함께 죽었다. 그 광경을 뱃사공인 곽리자고가 보고 자신의 아내인 여옥에게 이야기했고, 여옥이 그 여인의 슬픔을 ‘공후’라는 악기에 맞춰 노래한 것이 공무도하가이다.

“(백수 광부) 부인의 죽음은 백수 광부를 말리려다 그런 것인지, 백수 광부가 죽은 것이 슬퍼서 투신자살한 것인지 경위가 분명하지 않다. 그 경위가 항상 궁금했다.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슬프다. 여옥이는 뱃사공 아내인데, 공후라는 하프 같은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이는 일반 가정에서 보기 어려운 악기였을 텐데 뱃사공 아내가 그걸 탔고, 노래는 삽시간에 동네에 퍼져, 매우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었다.”


책을 읽고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에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노목희, 장철수, 박옥출, 오금자, 방천석 등. 마침 한 독자가 물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에 특별한 이유라도? “사실 이름을 짓기 싫어서 아무렇게나 했다. 특별한 느낌을 갖는 이름은 공을 들여 짓기도 한다. 노목희라는 여자의 ‘목’ 자는 먹일 목(牧) 자다. 목동 할 때, 가축이나 짐승을 거두어 먹인다는 뜻이고. ‘희’ 자는 계집 희(姬) 자. 나머지 이름은 대충 지은 거다. 이름 짓기는 정말 싫다. 특히 여자 이름은 더 그렇다. 소설에 여자가 나오면 이름을 짓는 데 너무 힘들다. 나오더라도 처음에 빨리 죽어야 돼. (웃음) 여자가 없어지면 소설 쓰기가 편해. 되도록 안 나오게 하려고 했는데, 앞으로는 나오게 하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 노목희는 언제나 문정수를 먹인다. 늦은 밤, 갈 곳을 찾는 어린 양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하사하는 존재. 짐승을 거두어 먹이는 목희. 그렇구나. 『공무도하』의 끝을 놓고, 희망과 절망 중 어느 것에 가깝냐는 질문에 그는, “희망이나 절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일상”이라고 답했다. 그는 수평선 너머 등대의 불빛처럼 인간이나 인류를 인도하는 희망 따윈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상처럼 무서운 운명은 없다고 본다. 그 안에 희망도, 절망도 있는 거다. 동양인들에겐 등댓불 같은 희망은 없다. 그런 희망이 없어도 건전한 사회일 수 있다. 동양인이 생각하는 희망은 인의예지로, 참 아름다운 것이다. 멀리 있는 오랜 생명과 투쟁의 과정을 거쳐 쟁취해야 될 목표나 도덕이 아니고, 이 자리에서 우리들 사이에서 실현되어야 할 덕목이다. 희망의 등대와는 전혀 다르고 고귀한 것이다. 일상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 다음 소설에는 약간의 희망을 말하고 싶다. 물론 그 희망이 일상의 구체성을 배반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읽고 당신은 바뀔 수 있는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바뀌지 않는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걸까. 그는 주희의 『근사록』을 꺼낸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주희가 제자들에게 그런다. 논어와 맹자를 읽고 나서 읽기 전과 마찬가지 인간이라면 구태여 그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너 자신이 (책을 읽고 나서) 변화를, 새로움을 이뤄낼 수 없다면 그 책은 무의미한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는 거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책 읽기가 필요하다는 것. 지식이나 오락을 위해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책을 통한 존재의 바뀜, 실존적인 변혁이 보다 근본적으로 요구된다는 것. “나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길을 본 적이 없다. 책 속에는 글자가 있다. 말의 구조물이 있는 거다. 지식은 있으나 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길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땅 위에 있는 거다. 나와 자식, 친구, 이웃 사이에 길이 있는 거다. 책 속에 길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길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있으나 마나다. 책 속에 있다는 길을 이 세상의 길로 끌어낼 수 있느냐, 내가 바뀔 수 있느냐가 문제다. 혹시 말을 잘못 알아듣고 김훈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쓰는 사람은, 정말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웃음)”

그런 한편으로 ‘지금’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필사적으로 온 힘을 바쳐서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답한다. “젊은이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온 나라가 개탄하는데, 그들은 근본적으로 대중문화의 권역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그것은 매우 건강한 삶의 태도다. 책보다는 음악이나 영화에 빠져 있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본다. 꼭 책을 읽어야 건전한 거라고 보진 않는다. 소설을 보면서 현실의 의미를 돌이켜 볼 수도 있겠지만, 극단적으로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고 본다.”

그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은, 파브르의 곤충기와 식물기, 그리고 장자란다. “요즘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데, 곤충과 식물에 대해 그렇게 스토리텔링이 잘되고 재미있게 쓴 책은 처음 봤다. 장자도 뛰어난 스토리텔러고. 그래서 요즘은 스토리텔링 어떻게 해야 할지 연구 중이다. 여러분도 한 번 봐라.” 아울러, 과학 기술과 관련된 책을 보는 것을 즐긴단다. 서점에 가면, 항해사, 조종사, 소방관 등의 자격시험 문제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그는 가령 항해사 자격시험 문제집을 보면서, 배가 깜깜한 밤에 바다를 뚫고 나가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서정시집을 보는 것보다 그게 더 문학적이다.”라고 말한다.

김훈에게, 글을 쓴다는 것

그는 기자를 직업으로 가졌고, 기행문 혹은 에세이를 썼고, 소설을 지었다. 글로 벌이를 하면서 살았고, 살고 있다. 방송 작가를 하고 있다는 한 독자가 그 차이점과 어떤 직업을 가졌을 때 유쾌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분명하다. “직업은 유쾌한 것이 없다. 밥벌이는 지겨운 거다. 정말 징글징글한 거다.” 그건 결코 변하지 않을 세상의 진실이자, 그의 진심이 아닐까.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그는 이것을 말한 바 있다.

“나는 신문기자를 25년쯤 했는데, 왜 기자가 됐고, 왜 에세이를 쓰느냐고 물어보는데, 그런 질문은 질문으로서 성립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가 왜 소설 쓰냐고 하면, 그것이 밥을 벌어 먹고 사는 생계의 수단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저속하고 속물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건전하고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돈을 벌어 밥을 먹기 위한 목적을 향해서 글이나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걸 써서 밥을 먹을 수 없다면 나는 안 한다. 왜? 딴 것을 해서 밥을 먹어야 하니까. 그건 정당한 생각이다.”

누군가는 밥을 굶어가면서 목숨을 바쳐가면서 글을 쓰고, 소설을 짓는 사람도 있었고 지금도 있겠지만, 그는 “나는 그런 선배를 존경하지만 뒤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자가 됐던 것 또한, 군대를 제대하고 길바닥을 헤매다가 취직한 곳이 신문사였단다. 배가 고파서! “돌이켜보니 그렇더라. 그런 세계를 과장하고 미화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글 쓰는 것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잘 쓰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의 삶은 저속하고 진부하고 일상적인 것과 싸우면서 이뤄진다. 유쾌한 직업은 없을 거다.”


한 독자는 그의 글에는 냄새에 대한 묘사가 많은 것 같다며,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에게 냄새는 아주 중요한 감각이다. 이성적인 감각기관인 시각에 비해, 냄새는 짐승에 가깝고, 본능적인 것으로 그것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중시한단다. 개는 사람보다 후각이 200배 이상, 청각은 50배 발달했는데, 사람보다 수백 배 많은 삶의 체험과 질감과 느낌이 축적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언어가 없어 표현하지 못할 뿐. 개만도 못한 것이 사람이지만, 말을 하기 때문에 개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우리말은 냄새를 표현하는 말이 너무 빈약하다. 비린내, 구린내 등 대여섯 어휘밖에 없다. 모든 냄새를 다른 사물을 이용해 표현할 수밖에 없다. 썩은 고기 냄새, 꽃향기와 같이. 맛도 그렇다. 프랑스 말을 잘하는 친구에게 와인 맛과 향기를 표현하는 어휘를 모아달라고 했더니 300개를 모아왔다. 오랫동안 와인을 마셔서 발달했겠지만, 된장, 김치를 수백 년 먹었으면 그만한 어휘가 발달해야 하는데 우린 없다. 우리말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섬세하며 과학적이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우리말을 폄하하는 게 아니고, 한국어는 한참 더 보완하고 많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야 할 미완성의 언어다.”

아울러, 그는 우리 언어가 대역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설이나 문학을 쓸 수 있는 글, 문학적 어휘가 따로 있다고는 생각 안 한다. 내 소설에는 모든 기술용어, 외래어, 은어가 서슴없이 들어가 있다. 앞으로도 많은 외래어 등을 쓰려고 한다. 많은 외래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넓어져야 한다. 한글로 좋은 말을 쓰려면 한문이나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

다만, 젊은 세대들이 많이 쓰는 말 줄임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드러냈다. “자기네들끼리 쓰는 암호처럼 되어 가고 있다. 그건 잘못된 거다. 말은 교양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말을 통해 감정이나 느낌에 대한 표현은 잘해도 사유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미숙한 것 같다. 점점 깊이가 없어져 간다.”

김훈이 말하는 김훈

한 독자가 보수·마초적이라는 일각의 비판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가히 틀린 것 같지 않다. 보수는 경험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다. 멀리서 비추는 희망의 등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삶이 더럽고 비루해도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보수적인 기질과 성향을 가진 사람이지만 보수주의자는 아니다. 보수의 틀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의 성향이고 정서다. 또 마초라고 하는데, 그런 소리 들을 만하다. 여성을 그릴 때 나는 여성 생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젊은 여성의 생명력은 아름답고 건강하다. 생명을 다루다 보니, 짐승 같은 거다. 나의 작가적 미숙함 때문에 마초로 오해를 받는데, 어떤 여자들은 마초가 좋다고 그러대. (웃음)”

아내의 영향에 대해 묻는 질문에도, 그는 아내의 영향이 별로 크지 않고, 스스로 가부장적인 남자라고 단언한다. “그건 아버지, 집안의 혈통에 유전되고 있는 가부장적인 질서에 의한 거다. 그게 편안하다. 절대 여자를 무시하지도 않고, 다치게 하지 않게 한다. 여자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쓰는 것은 건달이다. 가부장은 여자를 보호하면서 지배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평화와 행복이 있다. 내 아내는 그런 가부장적인 질서 아래 사는 여자인 셈이다.”

독자와 김훈 작가의 관계는 어떠할까. 서운한 독자가 있을지 몰라도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어느 연령대 독자가 많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는 “독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단다. 인터넷에 연재를 하면서도 댓글을 쓴 적이 없고, 그것이 설혹 독자에게 무례한 처사일 수 있지만, 독자의 반응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태도다. “소통은 끌어안고 뒹굴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고, 독립된 이성을 가진 개체들이 적당히 아름다운 거리에 떨어져 있을 때, 소통이 가능하다. 여러분과 다른 생각일지는 몰라도, 군중들이 한자리에 모여 같은 구호를 외치고 뒤엉키는 건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젊은이라고 특별히 애정을 갖고 있지도 않는단다. “50대와 20대가 인류학적으로 어떤 다른 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젊은 독자들이라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나는 젊은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미워하거나 무시하지도 않는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건 나도 좋아할 수 있지만, 젊은이들을 보면 내가 저렇게 무질서하고 계통이 없는 나이를 지나갔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젊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런 나이를 지났다는 것에 크게 안도하고, 여러분을 보면 아름답고 발랄하나, 어떻게 늙어가나 하고 걱정도 된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좋다.”

재미있는 질문이 있었다. 김훈에게 사랑이란? 그는 소름이 끼쳐서, 닭살이 돋는 것 같아서 글을 쓰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단다. 왜냐면, “그 단어가 너무 사회적으로 타락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단어가 그렇게 무참히 타락해버리다니…….”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과 아집에 대해, 남발된 사랑에 넌더리를 쳤다. “대표적인 게 우리나라 주부들의 모성애인데, 그게 나라를 망쳐가고 있지 않으냐. 학교에서 치맛바람 일으켜 사교육비를 올리고 사회적 폐해를 일으키면서 우리 사회가 진화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내 자식을 위하고 사랑하는 것도 개들도 다 한다. 인간의 모성애가 위대할 수 있으려면 옆집 자식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대학시험 보는데 엿 붙여 놓고 빌고 그러잖나. 그것이 사랑이라는데, 그건 사랑이 아닌 정신병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도 그런 게 있을 거다. 욕망과 아집을 사랑이라는 것으로 위장해서 미화하는 게 있을 거다. 사랑을 부정하는 게 아니고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폐해를 말하는 거다. 대중가요 대부분이 사랑 노래잖나. 꼭 연애 중독자 세상 같다. 대중 정서가 어찌 사랑뿐이겠느냐. 연애 중독자의 세상이 된 거다.”

신문 기사의 스트레이트 문장처럼 쓴 사랑, 연애, 치정의 소설을 보고 싶다는 바람도 나왔다. “스트레이트는 정말 쓰고 싶고 좋아하는데 자신이 없다. 스트레이트 문장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내장돼 있다. 『공무도하』를 쓰면서도 그런 걸 해 보려고 애를 썼는데, 뜻대로 안 됐다. 연애는 심정묘사여야 하는데, 남녀관계를 스트레이트로 쓰다가 실패한 흔적이 나온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남녀 간 연애 속마음이 꼼지락거리는 거, 속살 떨리는 거, 못 쓰겠다. 잘 쓰는 사람도 있지만, 난 못 할 것 같다.”

무엇이 행복인지도 물어보자. “나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진 않았다. 그렇다고 불행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꾸역꾸역 산다. 그래야지 무슨 수가 있겠나.” 그는 강 냄새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의 글에서 강을 묘사한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상류를 좋아한단다. 연어처럼 강의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 강물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들고, 노을이 지는 강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면 노을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새로운 시간이 몸속으로 들어와, 지나간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것 같다. 그때가 제일 신바람 난다. 강에서 놀 때, 저녁이 오고 별이 뜨면 참 좋다. 사는 게 덜 힘 든다. 삶의 하중이 덜 느껴진다. 나도 글이 안 써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일 안 한다. 그냥 논다. 나는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잘 놀아야 조화로운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꾸역꾸역, 다시 일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홍대 부근은 번잡했다. 그날 내겐, ‘꾸역꾸역’이라는 표현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삶이, 일상이, 미화되거나 과장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던 시큰둥한 삶에도,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절실한 무엇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언제나 늦게 찾아온다고도 생각하지만, 삶이 지속돼야 할 이유가 굳이 따로 있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냥 사는 거다. 그게 삶이니까. 부모 잘못 만난 죄, 그따위도 없고,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행, 그따위도 없다.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야 하는 것이 내겐 일상이자 삶이다.

김훈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가 장철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노목희에게 “난 아무래도 이 세상을 단념할 수가 없어.”라고 말을 건네던. 또 “세상을 긍정하니까 단념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런 세상은 아니야.”(pp.30~31)라고 말을 잇던 그 장철수. 무엇보다 장철수가 장례식에서 읊었던 이말. “(…)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p.35) 곧, 그것은 김훈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독자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소통’을 거들먹거리며 공허한 말의 유희로 누군가와 꼭 인연을 맺어야 하는 것이 삶은 아니니까, 소설가의 임무도 아니니까. ‘작가의 말’에서 그는 표현했다.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문제다.”

때론 나는 외롭다고 징징대면서 타인을 욕망하는 인간들이 역겹다.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도 그럴 때가 있으면서도. 『공무도하』의 어떤 인물들은 그래서 좋았다. 공연한 일로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지 않아서. 나는 간혹 누군가로부터 듣는 “모든 인연을 소중히 생각한다.”라는 말도 허풍이고,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그 천연덕스러운 거짓에 배시시 웃고 마는 나도 개 같은 놈이지만.

사실 나는 김훈 작가의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흰 머리칼이 가장 부러웠다. 그의 어떤 말이나 글보다, 그 흰머리가 주는 시간의 체적과 일상을 견딘 흔적이 내 마음을 끌었다. 그것이야말로 일상이 아니겠는가. 대항할 여지도 없고, 벗어날 틈도 없는, 일상의 그 무엇. 하다못해, 국가가 그렇게 요구하고, 혹자는 이걸 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말하는 결혼도, 실상은 ‘감정을 죽이고 일상이 강해지는 그런 것’ 아니겠나. 일상은 그렇게 힘이 세다. 나는 또 하루를 버텼다. 일상을 건넜다. 나는 강을 건넌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이 책을 읽고 나라는 인간은 읽기 전과 마찬가지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삶의 하중이 덜 느껴지고 사는 게 덜 힘든 밤, 그것이 궁금해졌다. “강경감의 말처럼, 해망은 해망의 방식대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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