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 책을 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한 것은, steady state라는 단어의 용법들을 찾아보다가 빅뱅과의 논쟁사 자체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기왕 보는 김에 좀 더 찾아보면 좋을 것 같아서 천문학을 좀 들여다보는 중인데, 워낙 나도 문과쟁이라서 천문학에는 잰병이다.

 

박창범의 <인간과 우주>와 사이먼 싱의 <우주의 기원 빅뱅>을 고른 것은 별 다른 이유는 없고, 서점에서 내 수준에서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대충 집어들은 것이다.

 

어땋게 보면 프레드 호일이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내가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아,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 더 많이 알면 좋겠구나, 그런 것은 아니고 빅뱅과 steady state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 호화찬란한 논쟁 자체를 더 재밌게 생각한다는... 그런 음흉하고도 음험한 이유로 책을 보니, 방정식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야말로 불량 독자다.

 

생각해보니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고등학교 때 읽은 이후로 입문 수준이나마 천문학 책을 집어들은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어설프게 물리학 공부 하면서 본 거, 양자역학 책에서 지겹도록 나온 우주기원에 대한 애기, 그리고 과학논쟁사나 인식론 같은 데서 나온 얘기들 어깃장으로 모아서 알고 있던 게 내가 알던 천문학의 전부였던 셈이다.

 

사실, 박창범 교수의 책은 나온지 10년 정도 된 거고, 그 이후에 논쟁이 어떻게 되었는지가 여전히 궁금해서 사이먼 싱의 책을 집어든 것이기는 한데. 어쨌든 여전히 '지금'과는 약간의 격차가 있기는 하다.

 

그리고 나서 다른 책을 찾느라고 책장을 뒤지다보니, 개마고원에서 나온 <그림으로 보는 우주과학사>와 기타 초보자들을 위한 유사한 책이 몇 권이 더 있었다. 사실 내 수준에서는 이 정도 수준이면 딱 아닌가?

 

(이렇게 뒤지다가 아내가 사놓은 수학사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는데, 엉겹결에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는 과정을 보면서... 사실 내가 보고 싶던 내용은 수학사 책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강생심이다. 대중을 위한 책을 보면서, 최근 천문학의 논쟁들을 좀 알면 좋겠다는, 이런 택도 없는 희망을 갖다니!

 

하여간 몇 년 동안 하다보니 주로 읽은 과학 분야의 책들이 생물학 관련된 책들이었는데, 물리학적 사유에서 나온다고 하면서, 지나치게 생물학이나 생태학 책만 읽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꽤 전부터 누군가 선박의 역사니, 철강의 역사니 그런 책들 필요하면 준다고 했는데, 안 그래도 책장이 좁아서 도저히 정리불가인 상태라서, 괜찮습니다... 라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

 

기왕 얘기 나온 김에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과학 다큐멘타리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물론 그나마 이제는 KBS나 EBS나 다큐멘타리는 대폭 줄인다고 하니, 과학 다큐멘타리 보고 싶으면 다시 BBC나 NHK를 뒤져서보는 수밖에 없는 그런 나라로 가고 있는 셈이지만.

 

영화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운 것처럼, 과학 다큐멘타리도 펀딩 과정이 필요하고, 제작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작자가 특별히 그런 것으로 덧칠하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도, 자연히 '우주 과학 입국' 그런 필터를 끼워서야 겨우 제작하게 된다. 순수한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은 정말로

사이언티스트' 일각에서만 해당되는 일일 것이고, 과학자는 물론이고 다큐멘타리 제작자도 실제로 이데올로기 심지어는 정책 홍보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비유를 들어보면,

 

최근에 항일투쟁과 관련된 다큐멘타리를 제작한 제작자와 좀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민족주의 코드를 강하게 넣으실 필요가 있었나요?

 

안 그러면 시청률이 전혀 안 나오는데, 어떻게 해. 결국 좀 넣어주는 수밖에.

 

제작 과정에서 제작자가 알면서도 결국 흔한 상업성 코드를 집어넣게 된다. 보는 사람이 알아서 필터링해서 보면 좋겠다는 게 제작자가 설명한 취지였다.

 

천문학에 관한 국내 저술에서도 그런 여러가지 제약 조건들이 있을 것 같다.

 

박창범의 <인간과 우주>는 그런 면에서 비록 오지이기는 했고, 관심은 없었지만 한국의 천문학이 그나마 이데올로기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시절의 마지막 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요즘에 이런 책을 쓴다면, 당연히 우리별 시리즈에 대한 얘기가 길게 나올 것이고, 우주를 잘 안다는 것이 국민경제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허블 망원경이 미국 경제에 얼마나 기여를 했고, 등등의 얘기가 부록처럼 죽 따라붙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과학은 과학일 뿐이다라는 명제가 있다.

 

글쎄...

 

이 명제를 천문학에 대입하면, 천문학은 천문학일 뿐이다...

 

이런 시기가 한국에도 최소한 90년대 중후반까지는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많은 천문학자들은 여전히 배고플 것이지만, 지금도 천문학은 천문학인지, 우주과학은 우주산업이 아닌지,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는 여전히 국가가 자리잡고 있고, 또한 정치가 자리잡고 있는지.

 

어차피 뻔한 질문이지만, 그런 생각을 잠시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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