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책 끝내고 다음 작업 시작하기 전에 잠시의 모색기 중이다. 예전에 민주당 당직자 한 명이 나에게 이런 평가를 한 적이 있다. 

“그 양반은 멀리 보고, 멀게 가는 사람이라서, 약속 지킬 거다.”

물론 별로 중요한 의미도 없는 일이라서, 약속은 지키기는 했는데, 그 양반이 말한 “멀리”가 뭐였는지는 지금도 알쏭달쏭하다. 멀리고 가까이고, 난 당췌 뭔 생각을 깊게 해보지 않고 사는 스타일이다. 궁극의 목표,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해보지 않은 지 좀 된다. 

코로나와 함께 일상적인 것들이 모두 깨어졌고, 우리는 임시적인 형태로 살아간다. ‘스탠바이 모드’ 그리고 일상화된 것을 전제로 계획을 세웠다가, 다시 뒤로 미루고, 그렇게 된다. 일상성의 중요성과 함께 일상성의 반란도 함께 겪는다. 나는 누구인가, 어느 때보다 이 질문이 많았다가, 다시 그딴 질문은 일상적인 삶 앞에서는 필요 없다는 마음 속의 반란이 일어난다. 

나에게도 이러한 변화가 생겨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라는 한국에서 익숙한 이 틀에서 내가 특별한 재미를 못 느낀 것은, 나는 나를 진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언젠가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은 맞다. 지구는 물론이고 태양도 사라진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영원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얘기하듯이, 생태니 지구보호니 이런 얘기는 다 bullshit이고 헛소리이고, 지구를 떠나서 영원히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서 우주 여행을 위해서 마지막 남은 지구에 남은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그렇게 진보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계화가 만들어낸 불균등 속에서 떼 돈 본 다국적 기업들이 그렇게 발생한 이윤들을 탈탈 털어서 영리적 우주 관광을 명분으로 상업화된 우주 여행에 한 발 더 나아가는 세상이다. 후세의 역사로 보면, 그들보다 더 진보적인 집단이 있겠는가? 

진보는 나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 난 평생을 뭔가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지구 생태계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쓴 이후로, 새만금을 지키기 위해서 살았고, 가까이는 신공항으로 황폐하게 될 가적도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했다. 중앙화된 전력 그리드의 문제점을 얘기하는 소설을 썼고, 요즘은 문화다양성을 지키는 일 쪽으로 요즘 하는 일들이 옮아가는 중이다. 상영하기 어려운 영화들을 만들거나 지키는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코로나 국면에서 연극이나 뮤지컬 같이 버티기 어려운 분야들이 버틸 수 있는 메커니즘에 대해서 글을 쓰는 중이다. 

내가 진보일까? 좌파라고 하면 말이 된다. 자본주의는 그 시스템이 효율적이든 아니든, 수많은 부작용을 발생시킨다. 대안을 찾든 아니면 완화책을 찾든, 자본주의 특히 한국 자본주의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을 막거나 약간의 방향 전환이라도 하도록 만드는 데 많은 힘을 기울이면서 살았다. 한국 자본주의는 성숙한 유럽 자본주의나 강렬한 미국 자본주의와도 다르다. 결국 자살율 1위 시스템이 되었고, 출산율 최저 시스템이 되었다. 

한 때 정수라의 “아!대한민국”이 나오면 사람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고”라는 가사 끝에 “돈 있으면”이라는 후렴구를 달아주었다. 오래 전부터 한국은 돈만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살기 편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지금은? 사시사철 강해진 미세먼지 때문에 최고 지역은 아니지만, 플랫폼 노동자들과 선구자적인 배달업으로 더욱 편한 시대가 되었다. 가난한 청년들의 뼈골을 갈아 넣어 위험은 외부화되고, 편익은 잔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에 미세한 변화가 하나 생겼다. 선진국에서 그렇듯이 한국에서도 하위 50%가 가진 자산은 5% 정도다. 여기에 한국의 자산은 평균적으로 80%가 부동산이다. 대체적으로 55% 수준이었던 자가보율 기준 등을 염두로 보면, 집 가진 상위 50%와 그렇지 않은 50% 사이에서 국민들이 두 개 집단으로 딱 갈리게 된다. 

1:99 논의는 2011년 월가 시위를 경계로 확산되었다. 1%의 금융자산가들이 나머지 99%를 착취한다는 말이다. 10:90은 그 후에 세습 자본주의 얘기와 함께 주로 강남좌파 혹은 586 등 교육을 매개로 중산층 지위를 자손에게 세습하는 상위 중산층의 자산 얘기와 함께 나왔다. 시기적으로는 조국이 이 상황에서 딱 상위 10%를 감정적으로 상징하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물론 조국의 자산은 상위 0.1% 정도 해당하겠지만, 그가 전형적인 1%의 금융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은 아니라서, 이렇게 묘하게 형성이 되었다. 마침 그 이름도 해괴한 펀드와 연관되면서 그야말로 감정 폭발을 일으켰다. 

이념적 혹은 감정적으로 사람들이 1:99냐, 10:90이냐, 이 논쟁을 하는 사회에 한국 사회는 매우 빠르게 50:50 사회로 이전되어 갔다. 이건 인류 사회는 물론이고 자본주의가 한 번도 본격적으로 해보지 않은 경제 전쟁이다. 역사적으로는 가장 위의 상층부에 있는 왕의 권력을 해체하는 일을 해보았고, 경제 가장 하단에 있는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해보았다. 그리고 1945년 이후로 ‘영광의 30년’ 동안 중산층을 형성시키는 일들을 해보았다. 한국에서는 그런 변화가 전두환과 노태우가 지배하던 시절, 노동 생산성을 훨씬 상회하는 임금 상승률이 발생하던 시기에 벌어졌다. IMF 이후 한국의 임금 상승률은 급감하기 시작해서 2004년경에 노동생산성 증가가 임금 상상률보다 높은 시기로 돌입하게 된다. 이때부터 한국 증산층에 위기가 오기 시작한다. 

벌써 15년 정도 진행된 변화인데, 중산층의 위기가 일정 한계에 도달하자 ‘자산 전쟁’의 축이 경제의 상층부나 하단부가 아니라 딱 중반부에서 벌어지게 된 일이다. 아주 오랜 자본주의의 역사로 보면 ‘튤립 전쟁’이 벌어졌던 17세기의 네덜란드가 이와 비교적 유사했을 것 같다. 아주 짧은 시간, 네덜란드가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 경제의 성과과 구조적 모순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딱 맞는 경우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유형이 발생하는 것은 1997년 IMF 경제 위기에서 ‘줍줍 경제’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파트를 사지 않으면 영원히 위로 갈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었다. 그러나 공포로 인해서 섣불리 집을 사지 못 했었다. 

내가 아파트를 처음 산 것은 2000년이었는데, 부천에 있던 다세대주택을 처분하고 이것저것 다 털어 넣어 문정동의 아파트를 샀었다. 총리실과 용인에 있는 회사 두 군데를 다니기에는 부천이 너무 멀어서 그런 것도 있고, 집값이 너무 급하게 올라서 더 기다리면 곤란해질 것 같다는 판단도 있었다. 몇 달만 먼저 움직였으면 7천만 원에 살 수도 있었던 아파트를 귀찮다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1억이 넘는 돈에 샀다.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 때의 내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정치적 의식이나 구호는 언제나 경제적 상황이나 인식보다 늦다. 그때 문재인 측근들은 1:99와 10:90 사이에서 니가 맞니, 내가 맞니, 그러고 있었지만, 이미 한국은 최소한 2016년부터는 50:50 사회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20대~30대 청년들 특히 중산층 출신 청년들 사이에서는 상위 10% 정도를 제외하면 50:50 사회 안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김현미에서 변창흠에 이르는, 국제 경제의 흐름과 자산의 변동에 대해서는 거의 ‘빠가급’의 국토부 장관들이 연이어 염장질 제대로 했다. 50:50, 이건 자본주의가 별로 겪어보지 못한 자산 전쟁이다. 한 칸만 더, 한 칸 만 뒤로, 이런 작은 차이가 어마무시한 차이를 만들어내는데, 너무 상층부에서만 편하게 산 소위 민주인사들의 진보 세력은 이 변화를 포착하지 못했다. 

영끌이 생겨났고, 빚투가 생겨났고, 주린이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 흐름은 그대로 암호화폐붐까지 연결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98년 IMF 경제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달리 다단계가 별로 극성을 부리지 않은 일이다. 당연한 것은, 다단계는 환상의 소득 증가를 약속해도 자산증가를 약속하지는 않는다. 50:50의 자산격차와 시스템의 불안정성이 만들어낸 이 전쟁터에 다단계가 낄 자리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일지도 모른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만들어낸 5%의 자산만을 가진 하위 50%의 불만이 폭발을 준비하는 기간에 정부가 선택한 ‘소득 주도 성장’은 정책이 갖는 anasynchroty의 사전적 정의에 기가 막히게 들어 맞는 사건이 되어버렸다. 방향이 틀린 게 아니라 우선 순위와 감도의 문제가 너무 컸다. 뒤에서 보조적 역할을 해야 할 정책이 선봉장이 되면서 그들이 말하는 ‘사회적 진보’를 위한 격렬한 전쟁 대신 우군 없는 이름 없는 동네 뒷골목에서 전멸하는 일이 벌어졌다. 소득불평등은 감소했는데, 이들은 왜 이리 소득을 높이는 정책에 대해서 왜 이리 적대적인가? 50:50의 경계선을 놓고 자산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이라서, 죽고 죽이느냐, 49%와 51%를 경계선으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소득이 조금 높아지거나 조금 높아지거나, 그게 최전선이 되지가 않았다. 

상황은 이렇다. 

우파들이야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는 늘 승리한다, 시장은 언제나 옳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단 대기업에게 적정 이윤을 보장하면서.. 이 간단한 몇 개의 코드만 있어도 그들의 시스템은 돌아간다. 어차피 우리의 출발은 45년 식민지 아니면 50년 전쟁 이후의 폐허의 땅이었는데, “이 놀라운 위업을 보라!”, 이 한 마디면 기본 3점은 난다. 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문제가 생기면 고치면 되고, 고치는 방법은 미국이 하는 법 혹은 일본이나 유럽 어디선가 했던 입에 맞는 수정 적당히 가지고 오면 된다. 그리고 그것을 ‘혁신’이라고 부르면 된다. 

그 반대편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원래가 그렇다. 매뉴얼대로 하자는 게 쉽지, 매뉴얼을 한 줄이라도 고치려고 하면 알아야 할 게 매뉴얼 전체보다 많다. 베끼는 건 쉽다. 80년대까지는 일본 책 적당한 거 베껴오면 그게 한국에서 고전이고 경전이었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도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베껴오는 방식이 잘 안 통하게 되었다. ‘지식소매상’이라는 말이 급격하게 사라진 것은 그런 얘기들이 한국에서 잘 안 먹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 아닌가? 

백 투 더 베이식! 보수에 대비하면서 “우리는 진보야”, 그런 얘기가 아니라 “난 이거 싫어요!”, 좀 더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가벼우면서도 심정적인 좌파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50:50 전장터를 떠나면 더 밑에서, 그냥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고, 별 인기는 없어도 자기 가치를 지키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냥 날 때부터 반골이거나, 정서적으로 주류를 따라가는 게 싫은 사람들이 있다. 학습과 교양, 나는 그딴 거 싫어하고, 또 그럴 얘기할 처지나 능력도 안 된다. 애들 데리고 하루하루 사는 것도 버겁다. 요즘 아내도 너무 바빠져서 그런지, 매일 싸운다. 설거지 좀 더 해라, 빨래 좀 개켜라, 나도 힘들어 죽겠다, 애들 먹는 거 그렇게 챙겨줄 필요 없다, 그 시간에 청소기나 좀 돌려라.. 내가 누굴 가르치고, 무슨 교양 애기 하겠나? 게다가 이미 탈계몽의 시대다. 알아서 찾아보는 지식 말고, 찾아가서 전달하려는 지식, “개나 줘버려!”, 돌 맞아 죽기 딱 제대로각이다. 

그래도 빨갱이에 대한 에세이집을 써보려고 하는 것은, 나 같은 사람이 한국에 나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소한 희망 때문이다. 나는 빨갱이가 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빨갱이가 삶의 목표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좌파가 좌파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뒤틀린 한국 사회의 역사적 아픔(!) 속에서 적당히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이 별 거 하지도 않으면서 너무 많이 가져간 이 상황이 좀 이상하기는 하다. 

경제가 좀 편안하면 아무나 국회의원하고 적당히 대통령 해도 별 문제 없다. 지역 자치에 기반한 스위스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면서도 1인당 국민소득 7만 달러 넘어가고, 그냥 소박하고 순박하게 잘들만 살아간다. 그런 사회에서도 극우파 정당이 커져가고, 그걸 막아야 한다는 학계의 절박한 움직임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생활인들은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이 균형을 이루면서 적당히 잘 돌아간다. 

이유야 어떻든, 한국 자본주의가 불편하고, 소소한 삶 속에서 나름대로 지킬 거 지키고, ‘소심한 복수’ 정도 하는 ‘생활 좌파’들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한국에서 어느덧 좌파라고 말하면 소수자가 된다. 진보 아니라 좌파라는 데도 ‘입진보’라고 하고 드럽게 괴롭힌다. 생태와 젠더 얘기하는 유럽식 신좌파인데도, 여전히 좌파라는 의미에서 ‘구좌파’라고 난리를 친다. 한국에 구좌파가 있느냐? 민주노총이든 한국노총이든, 상층부는 다 양대 거대 정당 어딘가 연합해서 정계 진출을 도모한다. 성공했느냐 아니냐, 그 차이만 있지, 노조에서도 좌파는 보기 드문 희귀종이다. 

내가 만약 나의 정체성을 ‘진보’라고 생각했으면 벌써 한 자리 하고,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생활 조건에서 살아갔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좌파고, 빨갱이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숨기면서 일 해야 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얼마 전부터 내 인생에 작은 목표가 생겼다. “그래, 나는 좌파다”, 이 얘기를 해도 당당한 정도의 사회는 내가 죽기 전에 만들었으면 좋겠다. 

꽤 전부터 사민주의 얘기를 했었다. 실제로 생각했던 것은 그런 마일드한 ‘사회민주주의’ 방식으로라도 진보는 좀 떼어놓고 사회주의 얘기 같은 것을 할 시대를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 민주당 당대표 시절의 손학규에게 그 얘기를 했었다. 그랬더니 손학규가 자기의 노선이 사실상 사민주의라고 말했다. 웃었다. (노선, 입장 같은 거 생각 안 하고 그냥 노는 거로만 치면 술은 손학규와 마시는 것이 최고로 재미있었다.)

나는 정치를 할 것도 아니고, 공직에 갈 것도 아니고, 무슨 근사한 노후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서 좌파라고 얘기해도 된다. 그래서 남은 나머지 인생을 소수자로 살아도 괜찮다. 한국에서 좌파는 여전히 공직과 정치 등 많은 사회 생활에서 암묵적으로 배제되는 소수자다. 그래서 내 주변에서는 내가 좌파라고 말하거나, 빨갱이라고 말하는 것을 말린다. 언제 공직으로 갈지도 모르는데, 그런 얘기는 나중에 ‘흠’이 된다고, 좀 자제하면 좋겠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내가 더 나이를 처먹어서, 은퇴 말고는 할 게 없는 나이가 되어서 “나는 빨개이였다”, 이런 것도 좀 모양 빠지는 일이다. 그냥 내가 바라는 것은, 다음에 누군가는 나보다 좀 더 편하게 “나는 좌파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회 아닌가 싶다. 

정치에서의 다양상, 사상의 다양성, 그런 눈으로 보면 한국은 진보와 보수만 놓고 하나 고르라고 하는 사회에 가깝다. 그나마 20세기에는 군인 보수와 경제 보수, 그렇게 두 개만 있었는데, 좀  나아진 건가? 그래도 21세기인데, 좀 더 다양하게 생각하고, 다양하게 대안을 논의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 약간의 바램을 가지고 빨갱이 에세이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정리해보기 시작한 것은 좀 된다. 이제 남은 고민은 그걸 지금부터 조금씩 써 보기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다음 정권 다 결정되고 난 내년 3월 이후로 할 것인지, 그런 시기의 문제다. 내가 쓰는 에세이는 지난 몇 번, 내리 망했다. 그래서 주저하는 게 제일 크다. 꼭 판매가 목적은 아니지만, 완전히 꼴아 박는 책에 대한 부담감이 좀 생겼다. 어차피 꼴아 박을 게 뻔한 책들은 별 수 없이 자꾸 뒤로 가게 된다. 사회과학에 대한 책이라는 게 별로 안 팔리는 상품이 되어버려서, 비즈니스라는 말을 붙이는 게 좀 민망스럽기는 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스몰 비즈니스’, 규모는 작아도 출판사에 최소한의 손익분기점은 넘겨줘야 한다는 그런 부담감이 여전히 있다. 40권 가까이 내면서 두 권 정도가 그걸 못 넘겼는데, 그 중에 한 권이 가장 마지막으로 낸 에세이다. 그래서 한동안 에세이는 그냥 접고 있었는데, 폭상 망했던 그곳에서 다시 출발하는 게 현실적인 부담감이다. 지난 번 에세이가 망해도 적당히 망했어야 했는데, 아예 명함도 내기 어렵게 폭삭 망했다. 1년에 서너 개 정도의 에세이에 대한 제안 같은 게 이런저런 경로로 들어왔었는데, 그후로는 일절 없었다. 스몰 비즈니스도 엄연히 비즈니스다. 망해도 대충 망한 게 아니라 기념비적으로 망해서, 제안만 없었던 게 아니라, 나도 한동안 책을 안 냈다. 2년 전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겹쳐서, 결국 데뷔하고 처음으로 책을 한 권도 못 낸 해가 되었고, 작년에도 <당인리> 한 권 내고 한 해를 마감했다. 주변에서는 이제 책 시장은 망했으니까, 어딘가 취직해서 적당히 인생을 마무리하라는 조언을 많이 했었는데.. 그냥 버티고 버텨서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당인리>가 내 책 인생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 것은, 실제 현실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에세이는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무슨 있지도 않은 첫 사랑 얘기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리는 먼 곳의 사랑을 얘기할 수도 없고. 눈 감으면 생각나는 게 지난 주 광주 충정로 뒷골목에서 먹었던 돼지 국밥의 아련한 국물 맛의 뒷끝이니, 이거야 영. (그게 생각나서 월요일에 서울의 순대국밥집에서 국밥 먹었다가, 나트륨 과다 섭취로 계속 물만 들이키게 된, 에라이!)

바야흐로 한국은 변호사의 시대다. 경제학자 전성시대는 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앞으로는 더 올 일 없을 것 같다. 경제가 이러든 저러든, 그건 돈 주고 사람 쓰면 되는 일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법조인의 시대다. 아마 그 뒤를 이어 의사들의 시대가 한 번은 올 것 같다. 팬데믹은 우리에게 떠나지 않고, 조선 최대의 전문가들은 의사들이 될 것이다. 

마이클 샐덴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참 유행할 때, 이게 너무 극한값 위주로 사례를 정리한 법철학 책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 읽어봐도 사실 정의론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무도 정의란 무엇인지는 모르는 책이다. 그의 전대에 존 롤스의 정의론은 훨씬 더 경제학 책에 가까워서 알아먹기도 쉽고, 응용하기도 쉬웠다. 맥스민, 경제학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1분 이내에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게 법학자의 시대로 미국이 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도 지금 그런 변화가 온 것 아닌가 싶다. 

재판 위주로 생각하면 자주 벌어지지 않은 극한값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된다. 라디오에 나오는 변호사들이 설명해주는 이혼 소송 사례나 유산 소송 사레들이 다 특이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공판 중심으로 가면, 그게 중요해진다. 반면에 경제학은 기본적으로는 평균값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 학문이다. 그런 평균적 움직임이 아닌 매우 특이한 경우는 ‘코너 솔류션’이라고 부르고, 교과서에서만 가끔 다루고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맞고 틀리거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두 생각이 갖는 흐름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 역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평균치적인 사유를 훨씬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익숙하고 편하다. 평균을 잡고, 예외를 생각하는 것과, 예외를 먼저 생각하고 지금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결론이나 연구 결과가 좀 다를 수 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우리는 지금 변호사 전성 시대로 들어가는 중이다. 사례 중심, 판례 중심, 이런 데 익숙하다 보니까 평균적 흐름 같은 것에는 민감도가 좀 떨어지는 것 같다.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얘기는 결국은 평균값에 대한 얘기다. 자본주의의 양상이 변한다는 얘기는 평균값이 변한다는 얘기다. 평균의 세계에서 예외적인 얘기는 극값 정도로 처리한다. 50:50의 사회는 평균값 내에서도 중앙값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평균의 평균에 관한 얘기다. 변호사 전성 시대에는 변두리에 있는 고루한 학자들이 괜히 해보는 얘기일 뿐이다. 나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안 팔리고, 괜히 인생만 피곤하게 만들 게 상당히 뻔한 얘기를 정리해보려고 하는 이유는.. 내가 독자들 덕분에 먹고 살았고, 나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내 책을 읽어주었기 때문에 내가 밥 먹고 살았다는 거.. 인세로 내 삶의 기본을 형성하고, 그 범위 내에서 내 삶이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대충 평균(!) 내어보니까 저자가 된 이후의 내 생활비하고 인세가 대충 비슷하다. 물론 매년 그게 딱딱 맞는 건 아닌데, 평균적으로는 비슷하다. 아마 내 앞에도 그렇고, 내 뒤에도 그 수치를 대충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등장하기 어렵다고 들었다. 나는 워낙 책 시장이 안정되었을 때 데뷔했었다. 그리고 아직 사회과학이 완전히 망하기 전에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정성으로 먹고 살았는데, 좀 더 최전선으로 이동해도 되지 않을까, 좀 더 안전하지 않고 위험이 따르는 곳으로 가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놈 잡아라, 저 놈 죽여라, 이런 하루하루 주가 움직이는 것처럼 인기 척도가 움직이는 시대, 무슨 빨갱이 얘기냐, 그렇게 사람들은 볼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런 얘기도 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50대 중반이다. 명예를 찾을 나이도 지났다. 높은 자리 가봐야 귀찮기만 하다. 돈을 쫓을 나이도 지났다. 지금부터 내 실력에 돈을 번다고 해서 얼마나 벌겠냐. 책 써서 떼 돈 버는 시대는 오지 않고, 내가 다루는 얘기들은 그럴 성격의 것들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라는 식탁에서 별로 찾지는 않아도 몇 사람은 별미로 먹는 그런 찬거리 하나다. 그거면 족하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식탁에 작은 찬거리라도 ‘좌파가 올라오면 ‘에비’하고 젓가락으로 내다 버렸다. 
내가 내 소개를 직접 쓰는 걸 별로 하기 싫은 것은, ‘좌파 경제학자’라고 쓰면 누군가 거기에 꼭 손을 대서 ‘진보’ 경제학자라고 바꿔 달았다. 진보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그런 게 너무 싫어서 데뷔할 때에는 ‘C급 경제학자’라고 달았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우파 경제학자들이 A급, 민주당 근처에 주로 있던 진보계열 경제학자들이 B급 그리고 급은 커녕 축에도 못 끼는 좌파 경제학자는 C급, 그렇게 분류하면서 살았다. 별의별 얘기를 다 들으면서 한 평생을 살았지만, 나는 진보가 아니라 좌파다, 그 얘기를 지금도 못 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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