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라는 소수자" 정도의 제목으로 생활 좌파 에세이를 써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난 번 에세이집이 왕창 망해서, 에세이집은 쉬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도 생활 좌파에 대한 얘기들이 뭔가 가슴에 불을 당긴다. 의무감으로 쓰는 책들이 있다. 농업 경제학이나 젠더 경제학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도서관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에세이집은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글들이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아직은 그런대로 머리가 도는데, 몇 년 지나면 이것도 힘들 것 같다. 아직 힘 있을 때, 이런 불편하고 골 아픈 얘기를 한 번 다루어 보고 싶어졌다. 

데뷔할 때 ‘C급 경제학자’라는 타이틀을 들고 데뷔했다. 실제로 그 시절 사람들이 나를 부르던 별명이 그거였다. 그냥 나는 평생 C급 타이틀을 들고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빨갱이는 줄이라도 잘 서야 하는데, 나는 그것도 싫었다. 

DJ 정부 때 청와대에 들어갈 일이 있었다. 적당히 좌파 말고 진보 경제학자라고 하고 청와대 행정관 정도 하면 좋겠다고 하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 나이에 그렇게 나의 신념을 접으면 평생 이상하게 살 것 같았다. 그냥 싫다고 했다. 인연이 이상하게 꼬여서 청와대 가는 대신에 총리실로 가게 되었다. 

그 뒤로는 청와대 갈 생각을 진지하게는 한 번도 안 해 본 것이, 내가 거길 갈 마음이 있었으면 30대 초반, 진작에 갔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나는 나 혼자서 ‘자랑스러운 빨갱이’로 이번 생을 살아가고 싶어졌다. 세상을 왕따시키는 편을 선택한 것 같다. 니들하고는 안 놀아.. 

요즘 생각이 든 건, 한국에서 좌파들이 당하는 취급은 일종의 소수자 취급과 같다는 것이다. 진보라고 하면 주류인데, 좌파라고 하면 갑자기 비주류다. 그 중에서도 빨갱이라고 스스로 말하면, 소수자가 된다. 그걸 나는 ‘비주류의 비주류’라는 말로 이해를 하면서 지냈던 것 같다. 

이제 내 나이도 50대 중반이다. 이 나이를 먹고도 “그래, 나는 빨갱이다”, 이 말을 당당하게 못 하면 도대체 내 인생은 뭔가, 그런 생각이 들 것 같다. 내가 무슨 영광을 더 보겠다고, 적당히 묻어가고, 적당히 숨어서 살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워낙 인생이 삐딱선이라서,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래도 그냥 막 살기는 싫고, 그런 사람들은 내 뒤로도 나오고 또 나올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밀리고 밀리고, 결국은 혼자서 많은 것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세 끼 밥 먹고 살면 더 이상 행복할 게 없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았다. 남들 은근슬쩍 다 하는 소소한 부패도 나는 손이 떨려서 못 했다. 내 노동 소득 외에는 다른 소득을 갖는 것도 나는 싫었다. 집 몇 채씩 사고, 틈틈이 이사 가고, 주식도 여기저기 적당히 털어놓고, 그렇게 해서 돈을 벌어서는 나한테 떳떳하지가 못할 것 같았다. 

아마 남은 인생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적당히 개기면서 살아갈 것 같다. 

좌파라고 해서 꼭 무슨 정당 활동을 해야 하거나, 시민단체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건 지금까지도 넘치도록 많이 했지만, 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들을 소소하게 생활 속에서 지키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런 걸 ‘생활 좌파’라고 부르고 싶다. 아마 나는 그런 정도의 모습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 것 같다. 

난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로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고, 명랑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다. 그리고 남을 웃기지는 못해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고 싶다. 

누가 나한테 여유로운 삶을 살았겠다고 얘기하면 “네, 큰 고생은 없었네요”, 그러고 만다. 내가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지, 살아남기 위해서 뭔 짓들을 했는지, 그걸 구질구질하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건 그냥 가슴 한 구석에 가끔 꽃을 피는 선인장처럼 살아남아 있으면 된다. 지우려고 해도 잘 지워지지 않는 그 기억들을 굳이 꺼내서 인생을 다시 지옥 같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해봐야, 결국 아무도 감동받지 않는 빛 바랜 영웅담의 우중충한 이야기일 뿐이다. 

생활 좌파 정도로 키워드를 잡을까 했는데, 기왕에 좌파 얘기 하는 것, 아예 화끈하게 ‘빨갱이’로 키워드를 잡고 나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언제 이런 얘기를 또 쓰겠나 싶다. 이게 묘하게 진보라는 말과 좌파라는 말의 차이점이 있다. 진보는 뭘 바꾸어야 할 것 같다. 옘병. 한국의 진보들은 세상은 안 바꾸고, 자기 인생들만 바꾸었다. 좌파는 변하지 않는 태도를 지키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고, 자본주의에 대한 삶의 방향 같은 것이다. 

나 아직도 진보가 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한 번도 나의 정체성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세상은 변한다. 계속 변한다. 방송에서는 시사 교양이라고 부르는 분야들이 소위 ‘연성화’를 넘어서 괴멸적 타격을 받는다. “이게 맞다, 저게 맞다”, 그런 얘기하는 시기는 한국식 계몽주의의 종료와 함께 끝났다. “가르치는 것 같아요”, 뭔가 얘기하려는 것은 외면 받는다. 시대가 그렇다. 

그래도 여전히 교양이 중요하고, 삶에는 원칙 같은 게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얘기하는 사람 한 명쯤 한국에는 있어도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드냐”, 그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권력이 그렇게 좋드냐”, 그런 말 하는 사람 한 명쯤 있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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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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