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관하여..

책 쓸 때 제일 어려운 것이 감정을 만드는 일이다. 논리야 자료도 분석하고, 숫자도 맞추어가면서 이렇게 저렇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누구에게 이 얘기를 할 것인가, 어떤 기분으로 말할 것인가, 그렇게 감정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게 없으면 기능적인 보고서가 되어버린다. 

얘기 만들기에서도 가장 어려운 게 감정이다. 특히 나처럼 섬세함과는 상관이 없이, 대충대충 살아가는 스타일에게는 감정이 가장 어렵다. 

감정을 만들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서 좀 억지로 감정을 만들게 된다. 분노라는 감정이 가장 컸는데, 촛불집회 이후로 나는 분노를 내려놓고 살려고 한다. 분노가 가장 쉽고, 잘 통한다. 그런데 분노를 내려놓고 나니까, 더더욱 감정을 만드는 게 어려워진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책 쓸 때 왜 아무도 안 만나려고 하는지 잘 몰랐다. 내 경우에는, 감정 때문에 그렇다. 이럴 때 만나면 인위적으로 올려놓은 감정 때문에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를 것 같은.. 그렇다고 그 상황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도 어렵고.. 

오후에 농업 관련된 회의에 간다. 오전에 한참 감정을 잡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가, 오후에는 또 아주 냉정하게 정책의 기반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하고.. 

이렇게 전혀 다른 감정과 전혀 다른 톤의 상황에 들어가는 게 요즘에는 더 힘들다. 

강연도 더 줄이고, 사람들 만나는 일도 더 줄이려고 한다. 감정이 농축되면,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농업 경제학 하느라고 한참 감정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작업은 감정을 더 많이 쓰게 된다. 

30대에는 무슨 회의 같은 데 가도 나이 순으로 맨 끝에 앉고, 딴청도 부리면서 딱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도 별로 신경 안 썼다. 

나이를 처먹고 나니까, 이제 숨기 좋은 가장자리로 가기가 어렵다. 그리고 다들 내 입만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다. 졸기도 어렵고, 숨어서 딴청 부리기도 어렵다. 

박원순 상가에도 가야하는데,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보통 상가집은 첫날 바로 가는데, 요즘 너무 자주 갔다. 김종철 선생 상가 간 게 며칠 안 된 것 같은데.. 

공교롭게도 노회찬 상가부터 계속해서 문 앞에서 진선미와 만났다. 연속으로 몇 번째.. "상가집에서만 보내요", 어색하게 인사했던. 

나이가 주는 무게감이 이제는 좀 부담스럽다. 난 좀 편하고, 남들 안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삶을 살고 싶은데.. 이제는 옛날처럼 그렇게 도발적으로 하기가 어렵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가 뭐하나 쳐다보고 있어서, 숨어서 잠행하면서 혼자 조용히 기록하고 분석하고..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보수 쪽 신문에서 글 써달라는 부탁이 요즘은 많이 온다. 주제나 상황 봐서 쓸 수도 있다고 가볍게 생각하는데, 술 마시다가 그런 상의를 하면 아주 난리가 난다. 뭔가 어디에 묶여 있는 건 별로라고 생각하는데, 글 하나 쓰는 것도 주변 눈치를 엄청나게 보게 된다. 그것도 감정 소모다. 난 더 이상 20대에 그랬던 것처럼 전사도 아니고, 무슨 엄청난 조직을 끌어가는 그런 책임자도 아니다. 

암 것도 아니다. 그냥 애 보면서 글이나 좀 쓰는, 엎어진 김에 아예 자리 깔고 누워버린. 

그래서 더 편하게 맘 먹고 지내고 싶은데, 책을 쓸 때면 다시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분노 빼고. 그게 여전히 어렵다. 

코로나 이후로 수영장이 닫아버려서, 감정을 식히기가 더 어려워졌다. 수영은 좋은 게, 물 속에서 아무 생각도 안 난다. 그저 힘들어, 그만 하고 싶어.. 배고프다, 집에 가자.. 걷는 건 좀 다르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고, 자꾸 지난 시간을 복기하게 된다. 고맙고 행복하다는 생각보다는, 원망스럽고 밉고, 그런 감정이 걸을 때 더 많이 생긴다. 온갖 잡생각들이.. 

그 감정을 모으고 모아서 증폭시키는 것까지는 좋은데, 넋이 나간 것처럼 한동안 지내게 된다. 

헤겔은 센스 데이타부터 감정을 거쳐서 이성으로 간다고 했다. 지내보니까, 그건 머리로 생각한 생각의 순서인 것 같다. 논리는 쉽고, 이성은 달래기가 용이하다. 어려운 건 감정이다. 논리가 지나가면 감정이 생긴다, 진짜 감정이. 쟤, 진짜 나쁜 넘이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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