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다시 만년필을 꺼내 쓰기 시작했고, 오늘은 노트를 샀다. 노트는 많이 있었는데, 아내가 가져다 쓰기 시작했다. 아직 몇 개 남아있기는 할텐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결국 새로 샀다.

 

살면서 공부를 내가 언제 했더라? 잠시 생각을 해봤다.

 

중학교 3학년 때 공부를 좀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무슨 평가시험 같은 것을 봤는데, 전국 석차로 28등인가 나왔던 것 같다. 3 때 공부 조금 하고, 다시 공부를 한 건 대학교 2학년 1학기 때였다.

 

사실 난 경제학이 뭔지도 모르고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냥 점수 맞춰 아무 데나 갔다. 서울대 국문과 정도 갈 생각이었는데, 딱 공부도 그만큼만 했다. 근데 등록금 내줄 아버지랑 식구들이랑 국문학이나 역사학 같은 것은 안 된다고 생지랄들이시다. 정 그럴 거면 육사 가라, 아니면 공사라도. 내가 모아둔 돈도 없고, 세상을 진짜 안이하게 살았다는 작은 속상함 (그 때 술 처먹기 시작한 게 아직까지도 술을..)

 

방법 없어서 그냥 아무 데나 점수 맞춰 갔다. 어차피 재수할 거면 연대 경제학과나 고대 법대 가라고.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아버지 애기를 따른 순간이었다 (그 후로, 아버지 얘기는 들은 적도 없고, 같이 살기도 싫었다. 결국 대학교 3학년 올라가면서 집을 나왔다.)

 

고대는 집에서 너무 멀었다. 세상 끝까지 가는 것 같았다. 서울대 적당한 데 내고 재수할까 싶었는데, 여기도 대충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래서 집에서 제일 가까운 연대에 갔고, 거기서 제일 점수가 높다는 경제학과에 갔다.

 

고등학교 선배가 아주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공부는 겁나 잘 했다. 나중에 cpa랑 행정고시랑 그런 거 몇 개를 붙었다 (그렇다고 좋은 인생 사는 걸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양반이 서울대 경영학과에 갔다. 그래서 경영학이 뭔지는 좀 알았는데, 경제학이 뭔지는 정말.. 이게 뭐야? 이걸 왜 해? (그래서 지금도 청소년을 위한 경제학 책, 이런 거 부탁 오면 청소년이 무슨 경제학이냐.. 그러고 안 쓴다. 나도 그런 거 안 봤다. 심지어 나는 경제학이 뭐였는지도 몰랐으니까..)

 

대학교 1학년 때는 그냥 술만 마셨다. 그나마도 5월에 교통사고가 나서,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그 때 나에게 공부 좀 하라고 이것저것 챙겨준 누님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나중에 공부해서 지금은 경기연구원에.. 내가 세상에서 본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누님이다. 내 인성은 물론 경제학의 성격은 거의 다 누님의 인성에서 배운 것 같다. 자주 보지는 않지만 여전히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그리고 그만큼 존경했던 누님이 나중에 대장금의 작가가 된 김영현, 늘 웃었다. 그리고 인상 좀 쓰지 말라고.. 책은 잠깐만 읽고, 술만 마셨다.

 

대학교 1학년 겨울, 삭발을 했다. 술 먹고 일어난 아침,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내 손으로 머리를 밀었다. 뭐 이것저것 속상할 일이 겹쳐서 벌어지기는 했는데, 총체적으로, 이렇게 사는 건 좀 아닌 듯 싶었다. 그리고 강릉으로 갔다. 여인숙에서 하루를 자고, 동해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아주 예전의 7번 국도.. 속초까지 걸어가서, 거기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며칠간 우셨다. 삭발을 한 후,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집안에서 아무도 없었다. 나를 키워주신 외할머니 외에는 친척은 아무도 안 만났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친척은 아무도 안 만난다. 그렇게 살았다.

 

학교로 돌아와서 학교 매점에서 바인딩 노트를 비롯해서 노트 열 권 정도를 산 것 같다. 그리고 비싼 건 아니지만 만년필 세 자루와 형광펜 두 자루를 샀다. 그리고 어머니한테 책 살 돈 달라고 했다. 그 시절에는 복사본이라서 원서가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다. 선형대수 등 수학책을 포함해서 원서 교과서 30권 정도를 산 것 같다.

 

그렇게 대학교 2학년 1학기가 시작되었다. 그 때 내 생각은, 경제학과를 계속 다닐지 말지는 잘 모르겠는데, 경제학이 뭔지는 알고나 그만두어야겠다는. 한 학기 다녀보고 경제학 재미 없으면 그만 둘 생각이었다. 그래도 뭔지는 알고나 그만두는 게 맞을 것 같은.

 

그 한 학기가 끝나갈 때쯤 한열이가 죽었다. 그래서 나의 공부도 그걸로 쫑. 다시 술 먹고 놀기 시작했다.

 

대학을 통틀어서 진짜로 공부한 건 그 한 학기였던 것 같다. 나중에 보니까 경제학이 의외로 간단한 거였다. 한 학기가 공부 했는데, 대학원 시험 보는 데 아무 문제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경제학 대학원 시험이라는 게, 전세계적으로, 뻔하다. 심지어 박사 코스웍 때 게임이론 추가적으로 공부한 거, 나중에 미분방정식 공부한 거, 이 정도를 빼면 대학교 2학년 1학기 때 공부한 걸로 박사 졸업할 때까지 특별히 뭐가 더 어려운 거는 없었다. 문과 수준보다는 조금 어려운 수학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거야 하면 되는 거고. 선형대수 보고, 집합론 보고, 토폴로지 조금 더 공부하면, 경제학과 박사 코스웍까지는 약간의 미분방정식 말고는 더 어려운 거는 안 나온다.

 

어떻게 보면 2학년 1학기 때 몇 달 공부하고, 결국 그걸로 박사 코스웍까지는 무난하게. 심지어 나는 박사 과정에 1등으로 들어가서 코스웍 시험까지는 1등이었다. 심지어 처음 유학 가서 치룬 석사 입학 시험과 석사 1학기 시험 몇 개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과목이 1등이었다. (프랑스는 시험 보고 나면 점수를 다 과사무실 앞에 붙여서 공개한다.)

 

자본론은 2학년 2학기 때 도서관에서 읽었다. <국부론>은 유학 가서 읽었는데, 하여간 그 시절 나온 책은 다 읽은 것 같다. 그렇지만 솔직히, 그건 공부라기 보다는 독서에 가까웠다.

 

노트를 다시 산 건, <촌놈들의 제국주의> 준비를 시작하면서 산 것 같다. 지금 쓰는 크로스 아포제 만년필이 그 때 산 거다. 좀 쓰다 잃어버릴 줄 알았는데, 어캐어캐 아직도 내 몸에 붙어있다.

 

<불황 10> 때부터 노트를 안 쓴 것 같다. 큰 애 태어난 시기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시기가 대충 비슷하다. 하여간 노트고 뭐고, 죽지 못해 사는 시기였던 것 같다. 나도 내가 뭐하는 줄 모르고 대충 산 시기이고. 노트만 안 쓴 게 아니라, 가방도 안 썼다. 방송하면서 가방을 쓰기는 했는데,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방송할 때 합숙갈 때 외에는 빈손으로 다녔다. 당연히 노트도 쓸 수가 없었고.

 

물론 그 시기에도 노트를 아예 안 쓴 건 아니다. 인터뷰할 때에는 노트를 쓴다. 그리고 라미 만년필을 썼다.

 

<당인리>를 준비하면서 만년필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래도 본격적으로 노트를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보령이라는 도시가 끼어들면서 도저히 내 머리만으로 정리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당인리>2년 정도 준비한 거라서, 기본적인 얼개는 물론이고 자료 준비까지 다 끝났다고 생각을 했다. 요이 땅..

 

그런데 뭔가 잘 안 된다. 전사로 설계해놓은 것을, 동료들은 그걸 뒤에서 흩어서 보여주지 말고 그냥 셋업에서 사용하자는 거다. 고래에?

 

보령이라는 도시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는데, 보령이라.. 이건 또 뭐지? 에 또, 에 또..

 

2016년 봄, 둘째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내가 하던 일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리를 할지, 아내에게 그냥 피박쓰라고 하던지.

 

그 때 애들 다 데리고 아내와 보령의 한화콘도에 며칠 갔다. 그래서 보령에 여행을 간 적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 때는 내가 머리가 복잡해서, 바닷가 풍경 잠깐 본 거, 재래시장에서 물고기 산 거, 그런 작은 풍경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다.

 

태안과 당진은 좀 안다. 서산도 좀 알고. 그런 데 얘기로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바뀌면서 보령이 그 자리를 차고 들어왔다.

 

머리가 혼돈스럽다는 표현을 쓴다. 살면서 머리가 혼돈스럽다는 생각을 한 적은 별로 없다. 난 언제나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고, 설령 방향이 크게 바뀌더라도 뭘 준비하거나 아니면 그냥 기다리거나, 어쨌든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설사 뭘 해야할지 모르더라도, “그냥 버틴다혹은 기다린다아니면 움직인다”, 이런 최소한의 원칙이나 기준을 늘 정해놓고 있었다. 머리가 혼돈스러운 경험은 별로 없다.

 

내가 진짜로 혼돈스러웠던 순간, 그건 대학교 1학년 2학기 끝나고 삭발을 하기까지의 그 며칠 간이었다. 유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며칠 생각해서 간다, 안 간다, 원칙을 정하고 학위 받을 때까지, 지지리 고생은 했지만 혼돈스러운 적은 없었다. 시간강사하던 시절도 그랬다. , 이건 아닌 것 같다, 취직을 해야겠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갈 수 있는 곳에 갔다. 물론 괴로운 시간들도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혼돈스럽지는 않았다.

 

보령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접하고, 잠시 혼돈스러워졌다. 2년 전에 내가 설계를 잘 못 했다는 건데.. 된장. 그래, 나도 이제 50이다. 이제 더 이상 내 머리도 노트 50개쯤은 머리 속에서 동시에 기록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다시 노트를 사러 갔다.

 

평생 노트를 샀다.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된 것도, 모닝 글로리를 가지고 썼던 짧은 꽁트였다. 이화여고 얘기를, 이화고녀로 뒤틀어서 모닝 글로리의 창업 스토리를 짧게 쓴 글 아내에게 주었다. 아내는 그 때 나가 천재인 줄 잘못 알았던.. (지내보니까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절절하게 알게 된. 그 정도가 아니라, 이런 병신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딨냐 싶은.. 아내도 살아야겠다, 일단 돈부터 몰수!)

 

그래도 노트를 사는 순간이면, 삭발하고 대학교 매점에서 노트를 고르던 그 열아홉 살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난 그 때 경제학이 뭔지도 몰랐고, 이걸로 평생을 살아갈지도 몰랐다. 마르크스, 아담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살아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멀고 먼 길을 돌아서, 다시 노트 앞에 선다. 새로 산 노트 앞에 맨 처음 쓸 글자는 보령이다.

 

그리고 맨 처음 생각나는 장면은, 박경리 선생이다. 이 양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원주 사람들 잔디밭에 모아 놓고 대화 비슷한 강연을 한 게 방송으로 남아있다. 겁나게 재밌고, 느껴지는 것도 많은 방송이다. 토지 문학관에 가서 좀 지내도 된다고 했는데, 나는 회의만 하러 갔다.

 

일산에서 인공폭포를 지나 광화문까지 오는 버스 안에서 벌어진 얘기는,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얘기는 통영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 통영 얘기는 좀 실망이었다. 통영을 러시아 대문호들 얘기를 섞어서 문장과 문체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데, 그 얘기를 저렇게 어렵게 밖에 못하실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죽기 전에 혹시라도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해야 한다면 저렇게 어렵게 얘기하지 말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리고 어렵지 말고.

 

노트를 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프지 말고, 어렵지 말고..

 

초등학교 3학년이면 알아먹을 수 있는 얘기를 하고 싶다. 난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복잡한 것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렵지 말고, 그건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 노트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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