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중학교 때 명동에 있던 유네스코 빌딩의 작은 극장에서 처음 보았다.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어송과 함께 갔는데, 밤 늦게 끝나서 거의 마지막 버스를 타고 콩닥콩닥, 그런 마음으로 집에 온 게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아마 지금까지 백 번도 넘게 본 것 같다.

 

여기에 그런 얘기가 나온다. “신은 한 쪽 창문을 닫을 때, 다른 쪽 창문을 열어 주신다.” 어린 내 마음에도 이 말이 참 좋았다. 그리고 그 때는 이 작은 대사 하나가 나의 삶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말이 될 줄은 몰랐다.

 

교회에 대한 경험들이 좀 진하게 있다. 그 안에는 증오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싫었다. 하긴, 그 시절 사랑의 교회에는 사랑이라고는 정말 돈에 대한 사랑과 지위에 대한 사랑 밖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게.. 장로가 되려고 하는 명박이 주차 안내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단 한 명을 저주하고, 남들에게 욕 퍼붓는 게 정신의 핵심인 종교가 어디 있겠는가. 다 불운했던 한국의 근현대사가 만들어 놓은 이상한 현상일 뿐이다.

 

2.

둘째가 아파서 하던 일들을 모두 내려놓던 순간 아니 그 기간을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는 못할 것 같다. 익숙해서도 그렇고, 아까워서도 그렇고, 선뜻 뭔가 결심을 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나는 결심을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현실은 그렇게 되었고, 그걸 피할 수 없던 상황을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나중에 미화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아팠고, 아내는 육아 우울증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은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내용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은 그 기간들을 지내면서 사후적으로 선택한, 아니 다른 선택지는 없는 상황을 그냥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 화려함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같이 내려놓았다. 언젠가 있을 또 다른 성과를 위해 현재를 희생? 그런 건 비겁한 변명이다. 그냥 이렇게 살다, 때 되면 눈 감는. 그런 내 삶을 받아들였다. 내 나이 50, 남들은 한참 활동한다고 할 나이이고, 인생 2모작이니, 내 인생은 60부터, 그런 소리들을 찍찍 한다.

 

다 개체적 욕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나타난 기현상이다. 자연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지도 않다. 그냥 자본주의적일 뿐이다. 병든 한국 자본주의에, 뭐라도 한 번 더, 그런 개인의 욕망이 만나서, 같이 병들어 가는 것일 뿐이다. 휴식 없이 죽을 때까지 개지랄을 한 번 더’, 그냥 그걸 언론의 언어로 바꾼 것일 뿐이다.

 

죽을 때까지 뭐라도 돈을 부여잡지 못해서 발버둥치게 만드는 것, 최소한 이게 노르딕 스타일도 아니고 복지 국가의 미래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돈이든 명성이든 아니면 권력이든, 놓지 못해서 끝까지 부여잡고 아둥바둥하는 스타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바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내면, 나는 죽을 때 눈을 못 감을 것 같다. 도대체 뭐하고 산겨? 만족할 인생을 살지는 못해도 괜찮지만,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게 내가 생각한 찌그러지는 맛이다.

 

마지막 눈 감는 그 순간까지, 난 찌그러져서 살기로 했다. 그리고 조롱을 견뎌냈다. 무기력도 견뎌냈다. 냉정한 현실을 참았다. 그래도 내가 잘나서 이렇게 한 거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작년부터는 은행 잔고가 그렇게 바닥을 치는 순간은 벗어났다. 호사롭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세 끼 밥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 없다. 몇 년만에 내 통장에 돈이 좀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깊게 고인 물은 아니지만, 흘러 들어오는 대로 바로 흘러 나가는 옹달샘은 아니다.

 

3.

지난 10, 한국은 연성, 그야말로 극도의 연성적인 매체들만 살아남는 사회가 되었다. 경성이라고 불렀던 그런 분야는 진짜로 돈은 먹고 죽으려도 없다는 상황이 되었다. 인식론에 hard sciencesoft science를 구반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hard, 그야말로 하드코어 영화의 한 구석에나 나오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경성의 스타일인 것만은 아니다. 아주 부드럽고 상업적인 매체도 다룬다. 그렇지만 내가 쓰는 글들은,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딱딱하고 경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분야일 것이다. , 그 중에서도 사회과학은 가장 딱딱하다.

 

그냥 생태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시대와 구조의 변화에 맞추지 못해 죽어가는 멸종 위기종에 가깝다. 그런데 딜레마가 있다. 사회과학을 비롯한 경성 과학이 죽으면, 그 사회도 같이 죽는다. 아주 오래된 얘기지만, 맛있는 것만 먹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아이들이 먹고 싶어하는 체리와 캔디 그리고 초콜릿만 주면 좋은 부모일까? 당연히 그런 건 아니다.

 

자본주의는 체리와 캔디만 주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와 같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것만 한다면, 대학이라는 게 왜 존재하고, 학문이 왜 존재하겠는가?

 

나는 이런 질문 앞에 서 있다. 그래도 괜찮은 것은, 나는 한 번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탈탈 털어버린 이후의 삶이기 때문이다. 보람도 없느냐, 그런 건 아니다. 이런 딱딱한 분야가, 그래도 보람은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보람과 행복 그리고 소소한 잔재미들은 있다.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는가? 다행히도 나는 이제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있는가?

 

그걸로 먹고 살 수 있어? 이 질문은 어렵다. 나는 충분할 정도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나 내 뒤에 올 사람도 그럴 수 있느냐, 그게 보장이 없다. 그래서 판 걷어내고, 다른 양지 바르고 부드러운 데로 이사,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작은 이정표 역할은 하게 될 것 같다. “여기로 가면 딱딱한 길이 나옵니다.” 그렇게 알려주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그냥 내 건강과 여력이 허용하는 그 시간 정도일 것이다.

 

이정표가 이정표 역할을 하는 건 내 일은 아니다. 그건 내 능력 범위를 넘어선다. 그래도 이정표 역할이나마 하게 된 건, 어쩌면 50이 된 신이 나에게 열어 주신 또 다른 작은 문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내 삶은 편안하다. 건강이 메롱이지만, 그래서 더 살살 산다. 무리하는 일은 절대 없다. 그래도 이 만큼이라도 버틴 게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는 정도는 안다.

 

<음식국부론> 내고, “그런 걸 알면 삶이 더 찝찝해져서 그냥 모르고 살래요”,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뭐라고 하지도 않았고, 그런 걸 탓해본 적도 없다. 그냥 나는 알면 찝찝한얘기를 하는 사람인 내 모습이 좋다. 다만 좀 더 그걸 웃을 수 있게, 유머러스하게 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알면 인생이 더 피곤해져”, 그런 벽 앞에서 나는 춤추고 노래한다.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 더 작은 마이크를 들었고, 더 작은 규모의 사람들과 대화한다. 괜찮다.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으련다.. 누군가는 아주 딱딱한 코어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그리고 아직은 그런 걸 몇 번은 더 할 수 있다는 게, 썩 고맙기만 하다.

 

(쥴리 앤드루스가 가장 멋있었던 것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 아니라 <프린세스 다이어리>였었다. 진짜, 멋졌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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