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극한치가 변화의 극한치다 2/2

 

5.

한국 기업들인 아직은 좀 형편없다. 좀 더 잘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회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아직은 별로 그런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다. 우리가 지금까지는 정부와 국가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얘기를 했다. 국가의 사업에 대해서도,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예외의 공간에 두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기업은 그 논의의 예외였던 경우가 많다.

 

이게 지금 바뀌는 중인 것 같다. 기업이라고 해서 공적인 논의에서 이제 예외로 빼주지는 않는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에서 기업 문제라는 것은 삼성과 현대 문제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바깥에 있는 기업들은 대기업 문제의 연장선에서 같이 다루었다. 순환출자부터 시작되는 지배 구조의 문제와 계열사 문제들, 이게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중소기업의 문제, 이건 그냥 뭘 더 도와줄까”, 소위 진흥의 대상일 뿐이었다. DJIT 기업들도 그랬고, 박근혜도 창조경제 아래에서도 그랬다. 안철수가 4차 산업혁명 엄청 얘기한 이후, 온갖 염병들을 떤다. 도와줘야 하는 이유만 바뀌지, 큰 틀에서는 중소기업을 엄청 도와줘야 한다, 여기서는 바뀐 게 거의 없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전통적으로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다.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이 되고, 다시 그 중견기업이 대기업이 되면 많은 문제가 나아질 꺼야, 이게 큰 흐름이다. 그 생각이 21세기 초, 삼성을 마음 속으로 응원하던 판사나 검사들이 했던 얘기, “삼성만큼만 하라고 그래”, 그 얘기와 크게는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걸 전체적으로 모으면 기다리라”, 이 한 마디가 나온다. 우리의 기업 논의라는 것이, 사실 좀 그렇다. 기다리라는 것 외에는 별 거 없다. 노조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고, 회사가 좀 더 발전해서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리고,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서 시민운동이 관심 가질 때까지 기다리고우리는 그렇게 기다리다 날 새는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6.

내가 출발하려고 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기다리기에는 지쳤어우린 너무 오래 기다렸어

 

기다리던 사람의 상상, 그런 게 필요한 순간이 왔다.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아, 어떻게 보면 그게 지금 우리의 직장 민주주의 논의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건 뭐 없어?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게 뭐야?

 

회사 내의 불필요한 위계를 완화시키는 것, 조금은 지금 보다 더 수평적인 것,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평등한 관계, 이런 것들은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 하지도 않다. 다만, 그렇게 상상하는 것 자체가 회사라는 구조 내에서 쉽지 않았을 뿐이다.

 

질문하는 각도를 조금 바꾸면, 지금 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으로 갈 수 있는 개선책을 훨씬 쉽게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먼 곳 같아 보이지만, 생각보다 해법은 단순할 수 있다.

 

문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 뿐일지도 모른다.

 

지난 번 50대 에세이 작업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 역사에서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오성과 한음이다. 그들이 맹활약하던 시기는 조선이 위기에 빠졌던 시기다. 그래서 그들의 우정이 더욱 빛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성과 한음의 나이 차이가 다섯 살이다. 자신의 절친이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한 살만 차이가 나도 엄청 선후배라고 나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입상 동기, 한 해 차이면 엄청 무서운 차이다.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오성과 한음, 뭐야 이건?

 

회사 안의 위계, 어떤 것은 기업이 자연스럽게 만든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것도 있다. 선후배와 연령별 위계, 이런 것의 상당수는 한국 사회의 질서가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다섯 살 차이면 친구 안돼? 대부분 안된다고 할 것이다. 오성과 한음은? 걔들이 선후배 사이는 아니쟎아?

 

상상하면 변화할 수 있지만, 상상도 못해 본 변화를 만들어 내기는 어렵다. 한국의 회사가 변한다면, 그것은 상상했던 최대치 이하의 변화이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변화의 극대치가 상상의 극대치보다는 작을 것이다. 그러면 더 많이 상상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우리의 상상력 역시 제약되어 있다. 경험해보지 못하고, 들어보지 못하고, 본 적이 없는 것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7.

여기까지는 차분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얘기다. 한국 경제라는 특수한 상황과 우리가 가졌던 자본주의 역사, 이런 것의 별스러움 같은 것들을 놓고 보면 차분하게 얘기를 정리할 수는 있다. 그게 엄청나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전에 썼던 조직의 재발견작업 위에 세우는 거라서, 기능적으로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상상이라고 하는 개념을 끌고 나가게 되면, 글을 쓰는 양식에 대해서도 같이 질문을 하게 된다. 불행히도 우리가 사회과학에서 쓰는 문체와 서술 방법이 상상력을 확 넓혀주는 데 유리한 방식은 아니다. 아무리 유연하게 쓴다고 해도, 논리 진행과 전개가, 아주 빡빡하다. 게다가 시대가 또 변했다. 책을 읽는 사람도 더 줄었고, 책을 보면서 상상력을 펼치겠다고 마음을 먹을 사람은 더 소수일 것 같다.

 

내가 부딪힌 벽은 여기다. ‘상상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해서 사람이 상상하지는 않는다. 진실을 필터 없이 바로 눈 앞에서 보여준다고 해서 상상하게 되지도 않는다. 외국의 선진 사례를 마구마구 던져 놓고, 원래는 이런 거야, 이런 성공 스토리혹은 모범 사례들을 막 던진다고 해서 마구마구 상상하고, 그런 것은 아니다.

 

글의 양식에서, 어떤 것이 좀 더 독자들에게 더 많은 상상이 가능할 수 있게 해주는 양식일까? 이건 사실 안 해본 고민이다. 문체와 서술 방법에 대한 고민은 꽤 했는데, 양식 자체에 대한 고민은 나도 처음이다. 주제가 주제라서 그렇다.

 

나라고 무슨 엄청난 방법을 처음부터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한 것은 아니다. 얘기를 하나씩 정리하다보니 결국 양식의 문제까지

 

8.

일단 결정한 것은, 상황을 설명하는 몇 개의 콩트를 넣기로 한 것이다. 단편소설 보다 훨씬 짧은 A4 2장 내외의 콩트를 통해서 압축적으로 상황을 설정하는 것. 재밌는 시도이기는 하다.

 

문제는, 이것을 몇 개나,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할 것인가? 아직 마음을 못 정했다.

 

극단적으로는 전체 얘기를 전부 개별 꽁트로 바꾸고, 여기에 약간의 설명들을 뒤에 다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하려면 할 수는 있는데, 제도의 기원과 유래와 같은 깊은 얘기들을 설명하는 데에는 양식 자체가 한계가 있다. 국가 복지와 기업 복지의 차이 같은 것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려면, 머리에 쥐 엄청 날 것 같다. 쥐 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설명 자체가 부차적으로 보여서 아에 못 달 수도 있다. 이 정도 되면, 뭐가 우선인가, 좀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남아있는 결정은, 설정에 해당하는 꽁트와 설명을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할 것인가, 그 정도 된다. 말은 복잡하지만 10, 20, 30, 이런 개수에 해당한다. 개수가 늘면 설명이 줄고, 개수를 줄이면 서술적인 설명 부분이 더 늘어나게 되고.

 

지난 한 달 동안, 솔직히 이 개수를 두고 아침에 맘 변하고 저녁 때 맘 변하고, 그랬다. 별로 본질적인 것도 아닌데, 어느 정도의 실험적 시도를 할 것인가, 사실 그걸 놓고 오락가락 하는 내가 좀 한심해 보이기는 한다.

 

사실 책은 내용이 가장 중요한데, 내용과는 별 상관도 없는 양식 문제를 가지고 몇 주째 죽을 동 살 동 몸부림을 치고 있는 나를 보면 좀 한심 맞기도 하고.

 

그래도 방법이 다른 없다. 더 고민을 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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