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환기


1.

올해 3, 둘째가 폐렴으로 병원에 거푸 입원하면서 내 삶도 많이 바뀌었다. 주변에 정신 없이 널려 있던 일들을 내려놓았다. 어떤 건 정리하고, 어떤 건, 말 그대로 그냥 내려놓았다. 내가 누굴까, 글쎄 그런 어려운 질문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내년 3월이면 다시 봄이 된다. 그 때까지는 아이들과 있을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그리고 둘째가 아팠던 때부터 1년이 지나서도 아프지 않고 넘어가면, 그 때부터는 좀 움직여 보려고 한다. 아프면? 아프지 않을 때까지, 더 붙어 있는 수밖에 없다. 그 때가 되면, 나는 이제 쉰이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시간이다.

 

2.

마흔이 될 때에는 이것저것, 미리 생각을 좀 많이 했었다. 물론 생각한 대로 살지는 못했다. 그냥 정신 없이 시간이 흘렀다. 아이 둘이 거푸 태어나다 보니, 진짜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시간은 쏜살과 같이 지나갔다. 머리 속에 남은 것도, 특별하게 남은 기억도 없다.

 

요즘 1주일에 집밖으로 나가는 것은 한 두 번이다. 가끔은 한 번도 안 나갈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나는 진짜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혼자 노는 걸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은 뻔하다. 젊은 경제학 박사 몇 명을 보고, 영화 기획하는 2~3명의 동료들을 매주 만난다. 회사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을 몇 사람을 만나고, 에너지 쪽의 오래된 동료들을 가끔 만난다. 이래저래, 열 손가락 안 쪽이다.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좀 더 만나려고 하는데, 이젠 다 지방으로 내려가서 서울에는 남아있는 동료들이 별로 없다. 내 차는 벌써 지난 여름 다른 사람에게 줘버려서, 버스 타고 잠깐 갈 수 있는 곳 아니면 이동하기도 쉽지 않다. 이래저래, 그냥 집에 있는다.

 

둘째는 가을이 되자마자 후두염에 약한 폐렴, 겨울이 되자마자 심한 후두염을 앓았다. 그래도 입원하지는 않고 넘어갔다. 큰 걱정 덜었다.

 

살다 보면, 중간중간에 섭섭한 일도 생기고, 서러운 일도 생긴다. 1년 가까이 그냥 집에 있으니까, 별로 잘 기억도 안 난다. 아주 오래된 동료들이 가끔 보고 싶어지기는 한다. 섭섭해서 헤어졌던 옛 동료들에 대한 생각도, 그냥 애틋함만 남는 것 같다. 그래도 억지로 연락해서 보지는 않는다.

 

'이러니까, 내가 이 양반이 싫었던 거야.'

 

보지 않다 보면 애틋해지는데, 억지로 다시 만나서 예의 악의적인 수다스러움을 참으면서 웃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냥 시간이 가면서, 가슴 속에 먼지처럼 내려앉는 것에 불과하다.

 

3.

1월에 책이 나간다. 이번에는 저자 소개를 바꾸려고 한다. 예전에 쓰던 저자 소개는 너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바뀐 거라서, 지금 와서 보면 주접스럽다. 요즘 감성으로는, 아주 짧고 드라이한 게 더 좋다. 내가 누구냐,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공을 들이는 일이, 요즘은 귀찮다. 그리고 스스로 추접스러워 보인다. 내가 누군가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4.

1월이면 아내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둘째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못 쉬었다. 아내는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하고, 아이를 돌봤다. 아내 힘만으로도 벅차서, 나까지 달라 붙어 있었다. 지난 몇 달, 아이를 돌보면서, 아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나도 시간을 좀 많이 썼다.

 

아내의 연봉은 많이 줄었다. 예전에는 꽤 높은 직급이었는데, 그런 자리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아기가 많이 아팠고, 나도 아내도, 삶의 많은 부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훨씬 단촐해졌고, 조용해졌다. 이 조용해진 삶이, 나는 훨씬 편하다. 뭔가 꼭 해야 하는 일도 없고, 안 하면 큰 일 나는 일도 없다.

 

5.

봄이 되면 뭘 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몇 달 쉬면서 보니까 경제 다큐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지금 내가 벌릴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잘 준비된 경제 다큐 같은 게 있으면 사회적으로 좋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성공시킬 자신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일 자신도 없다.

 

그래서 아직은 뭐, 특별히 생각해놓은 것은 없다. 아기가 아플지, 안 아플지도 모르는 일인데,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건 좀 생각을 해보는 중이다.

 

30대와 40대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더 편안하게, 더 푸근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좀 한다. 내가 피곤해서, 그렇게 못 살겠다.

 

나를 위해서는 더 많이 웃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더 많이 눈물 흘리고, 그렇게 지내고 싶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시간에 맡겨두려고 한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결정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좋든 싫든, 이 겨울, 삶의 중요한 전환기를 보내는 중이라는 것은 알겠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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