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명랑

 

하여간, 하는 일마다 안 되는 시기가 있다. 요즘 내가 그렇다.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내가 그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다.

 

동료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 그게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괴로움이다.

 

운동권으로 살아온, 그야말로 전형적인 80년대 인생으로서, 서로를 지켜줄 수 없다는 과거를 환기하는 것이, 이 나이에도 여전히 힘들다.

 

500번대 채널에서 집중분석 take라는, 그야말로 아무도 보지 않을 듯 싶은 방송을 같이 만든 것은 3월 중순부터이다. 연초부터 시작한 방송인데, 나는 좀 뒤늦게 결합했다. 믿거나 말거나, 하여간 처음부터 내가 하는 역할이 있던 그런 방송이라고 하는데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이다.

 

나름대로 정도 들고, 동료들에 믿음도 생겨나게 될 순간, 방송 개편이 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1년 정도는 하지 않을까, 그렇게들 50여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정성으로 붙어 앉아서 만들었던 방송이다.

 

100회부터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까, 그렇게들 생각했는데, 현실은… 100회 기념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정도 구조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듯이, 기분 참 더러울 구조이다.

 

, 살다 보면 이런 일 한 두 번 겪는 것은 기본이니까,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그 방송을 작게 쪼갠 방송 중에 하나를 내가 맡게 된다는 걸 알게 된 후에

 

뭐 데쓰까

 

이거 뭐지?

 

업친데 덮친 격으로, 몇 년째 같이 일하던 에디터가 최근 책의 판매 부진으로 출판사를 옮기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 내가 잠시 헤매고 있는 동안, 내 주변에서는 그야말로 난리 뽀가리가 나고 있던 거라.

 

지난 주말, 아주 약식으로 동료의 환송회를 해주었다가, 늦게 들어왔다고 아내한테, 정말 더럽도록 심하게 깨졌다.

 

그날 따라 아기는 아주 사람 염장하게 한 난리 친 날이었다. 아기 기분 돋는 날, 정말 사람 기분 돋게 만든다

 

아내한테 엄청 터지고, 그냥 또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니가 애기 아빠야?

 

, 사실, 할 말은 없다.

 

사는 게 뭐, 그런 거지.

 

하여간 더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그런 몇 주를 지냈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45년 인생, 지거나 이길 수는 있어도, 이렇게 진 것도 아니고 이긴 것도 아니고, 그냥 덤덤하게 버틴 것은정말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이었다.

 

명랑을 모토로 살았던 내가, 아주 깊은 상처를 받았다.

 

이거, 인상 쓰면 지는 거고, 웃으면 위선이고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몇 주를 보냈다.

 

그 동안에 글이라도 잘 써지면, 그래, 나는 또 내가 할 일이 있어, 그러겠는데

 

이 심정에 글이 써지겠는가? 그리고 설령 혹시 써진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 글이겠는가?

 

당연하다 싶게, 글도 안 써지고, 이렇게 쓰고 버리고, 저렇게 쓰고 버리고.

 

그 동안에 되는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써 질 글이 뭐가 있었겠는가?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더라도, 그게 무슨 최선이었겠는가? 그야말로 민폐 아니면 다행이지

 

하여간 그리그리하여, 내가 하던 거의 대부분의 것들을, 가장 가까운 시간에 내려놓기로 하였다. , 내가 그렇게 즐겁지 않은데, 억지로 뭔가 한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게 맞는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탈탈 털고, 그만둘 것은 그만두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이게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한 일이다. 뭔가 찾고 만들고, 시도하기 위해서 시간을 쓴 게 아니라, 내가 하던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엄청 노력하는

 

그래, 참 열심히 살았다!

 

그래도 재미없고 신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면서, 어떻게 명랑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 어쨌든 이래도 의미가 있고, 저래도 의미가 있고, 이건 이래서 중요하고, 저건 저래서 중요하고

 

썰레발

 

을 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거..이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명랑할 수 있을까. 그게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부딪힌 고민과 질문이다.

 

하여간 이렇게 계속 고민을 하다가, 오늘 오후에 스쳐가듯이 잠시 결심을 했다.

 

어쨌거나 명랑

 

원래도 나는 명랑이 모토였는데, 지금 갑자기 인상 쓰고, 뭔가 힘들어한다고 해서, 그게 더 좋을 이유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나는 명랑하고자 할 때, 내 삶이 제일 재밌었었다.

 

그게 남들에게도 명랑이거나 재밌었었는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거나 명랑, 그거 외에 이 삶이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후로, 같이 일하던 동료작가들에게 술 한 잔 사겠다고 전화를 했다.

 

술이 뭐 중요하겠는가, 그냥 마음이 함께라는 얘기 한 마디라도, 이 정도의 결심을 하고 나서야 겨우 할 수 있었던 것을.

 

새로 시작하는 방송, 목요일 날 첫 녹화가 시작된다.

 

take라는 이름으로, 보는 사람은 없어도 자랑스럽게 얘기했던 방송 대신, 하는지 안하는지, 정작 진행자인 내가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모르겠다

 

어쨌거나 명랑,

 

다시 한 번 명랑을 모토로 세우려고 한다.

 

웃어야지, 어쩌겠냐.

 

아주 예전에, 내가 힘들었을 때 했던 생각이다.

 

전쟁은 이길 수 없어도, 전투는 이길 수 있지 않느냐

 

아주 작은 전투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사람이, 명랑을 모토로 작은 전투라도 의미 있게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지는 건 괜찮다. 그러나 정말 무의미하게 밀리고, 그 사이에서 웃음마저도 잃는 건 너무 싫다.

 

그리하여, 별 볼 일 없는 삶을 마이너 리그에서 보낼지라도,

어쨌거나 명랑!

 

그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내가 생각한 어쨌거나 명랑의 의미이다.

 

나의 동료들과 이 작은 결심을 나눌 수 없는 것은, 여전히 마음 아프다.

 

그러나 이 정도로라도 내가 마음을 먹어야, 그들과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다시 한 번 명랑, 어쨌거나 명랑.

 

 

지난 대선을 코 앞에 두고 영안실의 고혼이 된 이재영이 늘 말했었다.

 

나는 지는 법이 없어…”

 

그 이재영의 웃음을 다시 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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