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만들기

 

김영현이라는 양반이 계시다. 아마 나한테 영향을 많이 준 사람 중에 몇 손가락에 꼽힐 것 같다. 대학교 입학식도 안 했을 때, 당연히 나는 학교에서 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같은 건 안 갔고, 그냥 학생회 가서 놀았다. 일부러 그렇게 할려고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는데, 너무너무 재밌어서 막걸리 마시면서 밤을 새웠다. 그 날 있었던 나머지 사람들은 잘 기억이 안 나고, 누님 두 분과 형님 한 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난다. 그 때의 그 형님이 민주노총에 오랫동안 계시던, 지금도 가끔 소주 한 잔이나 하시는 분이다. 나머지 한 양반은, 참 이것저것 그 후에도 많은 인연을 가지고 살았는데, 지금은 아마 김문수 쪽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누님 한 분이, 바로 김영현이었다. 그 날이 내가 공식적으로 운동권의 삶을 살게 된 첫 날의 경험이었다. 그 후에는 물론 그 전에도 밤새워 술 마신 적이 여러 번 있지만, 정말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날이었다.

 

어린 시절에 알았고 나중에 글로 유명해진 사람들이 공교롭게도 내 주변에는 좀 있다. 그렇지만 영향으로는 그 양반 영향을 내가 제일 많이 받은 것 같다. 우선은 내가 좋아했고. 누님들 중에서도 특히 편하게 생각하고, 마음에 오래 남았던 분이다.

 

대장금에서 선덕여왕 그리고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드라마의 작가가 김영현이기도 했다. 요즘도 그런 책 읽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경제학과에서는 성경책처럼 다 읽던 한국 경제의 전개과정같은 책들을 그 양반과 같이 읽었다. 사람한테 찐한 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니, 어쩌면 평생 잊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많은 기억들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 살아가지만, 그렇게 묻히지 않는 것들 것 있다.

 

경제학자로서의 삶을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은 다음에, 더 이상 숫자들이나 정부 보고서를 읽지는 않게 되었다. 원래 재미없는데 억지로 참고 읽은 것이다. 그 대신에 얘기 만들기를 다시 해보는 중이다. 물론 나는 원래 얘기 만들기를 좋아한다. 갖다 붙이는 걸 좋아하고, 음모론 만들기는 원래 딱 내가 좋아하던 일이다.

 

경제학자로서의 삶을 그만두고 제일 처음 잡은 것은 <>이었다. 이제는 <>의 세계에서 좀 나오지 않았나 싶었는데, 역시 나는 <>에 속한 사람이다. <>을 처음 읽은 것은 박사 과정 초입이었던 것 같은데, 하여간 정말 재밌게 읽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반가운지. <>의 세계에서 나오는 법은 없다더니, 정말로 그렇다.

 

영화는 두 번이 나왔는데, 좀 많이 아쉽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는 아주 좋아하는데, 별로였다.

 

얘기를 하는 건,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이나 영화나, 기본적으로는 다 마찬가지이다. 공식으로만 차 있는 듯한 논문도 사실은 얘기이다. 얘기를 재밌게 하는 사람이 있고 재미없게 하는 사람이 있지만, 어쨌든 다 얘기는 얘기이다.

 

그러나 얘기 만들기는 좀 다르다. 듣기 싫어하는 얘기를 편하게 하는 것과 없는 얘기를 그럴 듯하게 하는 것, 이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좀 있다. 사실이나 진실과는 또 좀 다른, 얘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속성이 있다. <> 같은 게 대표적이다. 보는 눈에 따라서는 아주 재미없을 수도 있고, 그 지독한 서양 중심적 사고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얘기 자체가 워낙 재밌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준다. 그래서 듄에서 나온 것들이 참 많다.

 

많은 사람들이 알만한 <>의 한 장면이라면, 열폭탄이 터져서 장님이 된 폴이 비전을 통해서 앞을 보는 장면. 이 장면은 <매트릭스> 3편의 마지막에서, 네오가 눈을 다쳐도 앞을 보는 장면으로 다시 사용된 적이 있다.

 

<>을 보고 나서, 나는 듄 같은 얘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 그렇다고 정말로 강렬해서 모든 걸 그만두고 꼭 그걸 해야겠다는 건 아니었고,

 

요즘 놀면서 <>을 다시 챙겨보다 보니, 그 시절 생각이 다시 났다. 불어로는 멜랑쥬라고 되어있는데, 영어로는 스파이스라고 부른다. 그런 물질의 세계, 멘타트, 프레멘, 어보미네이션, 그런 한동안 잊고 있던 듄의 용어들이 다시.

 

물론 지금 당장 듄 같은 얘기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고. 어쨌든 그런 얘기 만들기의 재미로 살던 어린 시절이 다시 생각났다.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동화책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음울하고 음침하지 않은, 그러나 약간은 깊은 속내를 가진 아이들을 위한 얘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몇 년 전부터 들었다. 세상이 좋아질 수 있다는 꿈을 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결국은 아이들과 얘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던 것 같다.

 

물론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가 조금씩 커가면서 볼 수 있는 책을 써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잠시 쉬면서, 앞에 써놓은 얘기들을 영현 누님에게 보내고 나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잠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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