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큰 맘 먹고 읽기 시작한 것은 중3 때였다. 그때부터 몇 년 동안 수많은 소설을 읽었다. 딱히 뭔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없었고,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해서도 거의 생각한 게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동네 책방에서 문고판으로 <독 짓는 늙은이>를 읽은 이후로 정말 많은 소설들을 읽었는데, 막연하게 읽어두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공부는 수학과 영어만 했다. 고등학교 때 매년 학교 대표로 수학경시 대회에 나가기는 했는데, 경시대회 수학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정말 고생했던 기억만 난다. 아주 나중에 들은 건 예전 동경대 입시 문제 같은 게 나온 거라고 하는데, 정말 아무 준비 없이 대회 나가서 난감해하던 것만 기억이 난다. 그때 수학 공부를 좀 한 덕에 경제학과 박사 과정 때까지, 수학은 크게 어려워하지 않고 꽤 많은 시험들을 무난하게 통과했다. 가장 고민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의 수리통계학이었다. 이걸 수학과에 가서 듣고 와야 나중에 편하다고 하는데, 나는 쫄아서 그냥 응용통계학과에 개설된 과목으로 들었다. 어렵기는 했는데, 덕분에 통계가 무엇인지 좀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때 선생님이 윤기중 교수였는데, 보수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위하는 학생들에 대한 이해를 해주셨던 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의 아들이 대통령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영어도 공부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중학교 때 무식하게 노트를 놓고 영어 한 줄 쓰고, 해석하는 것을 아랫줄에 쓰는 방법을 썼다. <바보 이반>이 처음에 한 거였는데, 너무 어려워서 책 한 권을 다 끝내지는 못했다. 나중에 특허청 청장이 된 고정식 과장과 공부하던 얘기하다가, 그 양반은 독일어 공부한다고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그렇게 번역하고 외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책만 읽어서는 좀 곤란할 것 같아서 찾아낸 게 MBC FM에서 새벽 5시에 해주던 영어회화 방송과 스크린 영어였다. 매달 교제도 팔았다. 5시 40분부터는 토플 수업도 해줬는데, 그건 너무 어려워서 나에게는 무리였다. 그렇게 영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새벽 5시에 정위치에 있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타이머를 구해다가 방에 있는 전축에 연결해서 4시 반에 MBC FM 라디오가 켜지게 했다. 그러면 음향조절 시간이 나왔다. 

루틴처럼 오랫동안 했던 게 4시 반쯤 일어나서 당시 막 나왔던 컵라면을 하나 먹고 정신을 차리고, 5시부터 영어회화와 스크린 영어를 40분 동안 듣던 일이었다. 물론 녹음을 해놓고 나중에 듣듣는 걸 시도할 수도 있었지만, 직접 일어나지 않으면 제대로 안 할 것 같았다. 육개장 사발면이 그 때 먹었던 건데, 물리고 물려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몇 번 먹지 않았다. 지금도 그걸 먹으면 코에서 밀가루 냄새가 터져나올 것 같다. 

그때 MBC FM 음향 조정 시간에 나왔던 음악이 바로 척 맨지온의 “Children of Sanchez”, 산체스의 아이들 영화 음악이었다. 그게 트롬펫보다 약간 작은 후루겔혼이라는 것도 몰랐지만, 신나게 울려대는 드럼 소리에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한동안 선물할 일이 있으면 두 장짜리 “산체스의 아이들” 앨범을 많이 썼다. 이게 점점 구하기가 어려워져서 그 뒤에는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앨범으로 선물을 했다. 

인류학 공부를 하면서 “Children of Sanchez”가 유명한 인류학 보고서이고, 출간도 된 책 가족 인터뷰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로도 나왔는데, 영화는 거의 실패한 것 같다. 프랑스에서 해준 적이 있는데, 중간에 일부만을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복권에 당첨된 에피소드 부분을 잠시 봤었다. 중남미 빈곤 문제에 대한 기념비적인 작업인데, <산체스네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기도 했다. 영화는 사라졌고, 음악만 남았다. 이 두 장짜리 앨범을 만드는데, 영화 제작 일정상 시간이 없어서 2주만인가, 하여간 아주 짧은 시간에 만들었다고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출처를 다시 찾아봤는데, 내 실력으로는 다시 찾지는 못했다.)

척 매지온의 노래로는 가장 잘 알려진 것이 “Feels so good”과 “Give it all you got”일 것이다. ‘황인용의 영팝스’ 시그널 뮤직이었다. “Feel so good”은 제목 그대로 들으면 정말 기분 좋아지는 음악이다. 원곡은 9분 42초 정도 되는 긴 곡인데, 느리게 시작하는 전조가 1분 30초 정도 이어지다가 기타 반주가 들어오고, 이어 베이스가 들어온다. 그리고 2분 10초 정도, 드디어 척 맨지온의 후루겔혼 연주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주먹 쥔 두 팔을 흔들고 싶어진다. 곡이 뒤로 갈수록 경쾌해지고, 베이스와 엇박으로 들어가는 기타 연주가 정말 날아갈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을 만들어준다. 

“Feels so good” 싱글 버전에서는 앞의 전주 부분을 없애고 바로 속주부터 시작을 해서 3분 30초 정도로 줄어들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들은 “Feel so good”은 바로 이 버전일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9분짜리 노래를 틀어주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또 다른 버전이 하나 있는데, 이게 척 맨지온이 자신의 아버지 생일을 기념해서 만들었다는 “70 miles young’ 앨범에 실린 돈 포터 버전이다. 

돈 포터는 우리에게 그렇게 익숙한 음악가는 아닌데, 원래 음악가는 아니고 “산체스의 아이들” 녹음할 때 프로듀서였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물론 그 자료를 다시 찾지는 못했다.) 워낙 시간이 없어서 프로듀서가 직접 노래를 부른 게 “산체스의 아이들”의 바로 그 보컬이다, 그런 게 내가 읽었던 내용이었다. 그 목소리로 “Feels so good”을 부른 게 바로 “7 miles young” 버전이다. 4분 13초짜리인데, 싱글 버전이 뒤의 속주 부분만을 축약한 거라면, 이 보컬 버전은 전주 부문만을 가지고 축약한 버전이다. 

돈 포터의 첫 가사 Thers’s no place for me to hide”가 나오는 순간, 글쎄, 아련해진다고 할까, 황홀해진다고 할까, 나는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노래 가사는 어느 날 떠나버렸던 연인이 다시 돌아온다는 얘기이다. 가사는 슬펐다, 네가 다시 돌아와서 “쭉 다시 사랑하자”, 그래서 나는 기분이 진짜 좋아졌다, 이런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범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또한 비현실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떠난 사람과 다시 만나서 결혼한 사람은 딱 한 번 봤다. 술 마시고 헤어진 게 너무 싫다고 하다가 정말로 성산대교 위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그 인간을 깜짝 놀라서 등을 잡고 다시 다리 위로 끌어올렸던 기억이 있다. 거짓말 같이 나중에 그 여인을 다시 만났고, 결혼도 했다. 노래 “Feels so good” 같은 얘기이기는 한데, 그가 나머지 인생에 그렇게 행복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떠난 사람이 “And one day you just appear”, 갑자기 다시 돌아와서 다시 사랑하자고 말해야 기분이 그렇게 좋아진다면, 아마 내 평생에 한 번도 기분이 그렇게도 좋은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조건이 너무 어렵다. 누군가 떠나야 하고, 그 사람이 다시 돌아와야 기분이 좋을 수 있다는.. 돈 포터 버전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는 “Your name is music to my heart”, “당신 이름은 내 가슴의 음작이예요”, 이 부분이다. 매우 느릿느릿하면서도 굵직한 돈 포터의 목소리가 이 가사에는 정말 잘 어울린다. 누군가 떠나지 않고, 누군가 다시 찾아오지도 않지만, 그래도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만났다. 

<산체스의 아이들>에 나왔던 바로 그 보컬의 목소리로 듣는 “Feels so good”, 그걸 들으면 중학교 때부터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컵라면 먹으면서 영어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던 그 시절이 다시 떠오른다. 그때는 전두환 이후로 과외가 없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오랫동안 4시 반이면 일어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알아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내가 살아가게 된 리듬은 4시쯤 잠 드는 삶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다시는 4시 반에 일어나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 새벽마다 들었던 “Children of Sanchez”와 “Feels so good”이 내 인생의 음악으로 남았다. 

https://youtu.be/SmrUlWiKZZA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