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논문 막 제출했던 시절..)

 

꿈에 다섯 살 때 살았던 외할머니 댁에 있는 다리 위를 운전하면서 지났다. 개봉동. 어린 시절, 나는 외할머니가 키워주셨다. 마포구청에서 받은 장한 어머니상 표창장이 방 한 귀퉁이에 걸려 있었다. 가끔 꿈을 꾸면 개봉동 살던 시절로 돌아가기도 한다. 나는 외할머니 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큰 애는 오늘 어린이집 신발장 앞에서 오늘은 그냥 집에 있으면 안되냐고 울었다. 이럴 때는 난감하다. 그냥 뭐라고 막 하면서 혼내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데리고 집에 올 수도 없고. 이따 일찍 데리러 간다고 했다. 그러면 교실 앞까지라도 데려다 달라고 한다. 그렇게 했다.

나는 학교 가는 걸 그렇게 싫어했다. 큰 애가 어린이집 안 가고 싶어하는 건 나 닮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학교 들어가면 더 할 것 같다. 나는 학교 가기 싫었던 게 대학교 가서 없어졌다. 운동권에 술군 스타일로 학교 다니니까, 학교가 너무 재밌었다. 그 시절에 많은 운동권들이 그런 것처럼, 수업도 잘 안 들어갔다. 꼭 뭐가 있어서 안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 대신 도서관에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유학가니까, 진짜 천국이었다. 대학원 첫 학기 때 헤맸던 걸 제외하면, 수업도 들어가다 말다 했다. 어차피 수업 듣는다고 시험 잘 보는 것도 아니고, 논문 잘 써지는 것도 아니고. 내 맘대로 공부했는데, 점수는 무쟈게 잘 나왔다. 대학원 1년, 코스웍 1년, 그래도 억지로 수업도 좀 들어가고 그러던 시간도 끝나고, 망빵 자유의 시간이 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통털어, 나는 박사과정 3년이 최고로 즐거웠다. 수업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물론 한국에서 대학원 나왔으면.. 좃됐다, 이런 소리 입에 달고 살았을 것 같다. 학과에 설치던 연구소는, 진짜로 공부하다 뭐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러 가고, 자료 찾아주고. 도움 많이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사과정 그냥 뺑뺑 돌리는.

수업 제안이 오기는 왔는데, 그냥 나는 학위 논문 일찍 쓴다고, 안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용돈이라도 번다고, 아무 수업이나 걸리는 대로 막 해야 한다. 그나마도 요즘은 자른다고 난리다.

박사과정 때 너무 행복하게 지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암으로 먼저 죽은 친구들과 달리, 이 나이에도 아직 버티는 것은 짧지만 너무 행복한 시간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학위가 끝나고, 마침 출범한지 얼마 안되는 WTO에 추천받아 갈 일이 생겼다. 프랑스는 아니지만 다른 나라에서 교수 제안도 왔다. 일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에서도 연구원 정도는 갈 수 있었는데, 당시 정권이 좀 거지 같아서 국적을 바꿔야 했다. 그건 좀 아니다 싶었다.

결국 그냥 한국에 왔고, 가을부터 강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는 그래도 나름 잘 해줬다. 암 것도 아닌 그냥 초보 시간강사인데, 방도 줬다. 나중에 건교부 장관한 서승환 선생이 불쌍하다고, 자기네 방에 있던 책장도 하나 빼주었다. 학부 시절부터 나를 정말로 싫어하던 선생이 몇 명 있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선생들은, 이상하게 강사하던 나한테 잘 해주었다.

그 해에 한국에서 경제학 사전이나 프랑스에 관한 종합적인 책 중 프랑스 관련된 것, 경제학 관련된 것은 거의 내가 썼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죽어라고 썼다.

그 몇 달 사이에, 이렇게 살다가는 내 정신이 너무 피폐해져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데나 제일 먼저 오는데 간다고, 간단한 원칙을 정했다. 그 때 나를 뽑아준 사람이 이계안이다. 좀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하여간 그렇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다 반대했다. 기업에 뭐하러 가냐.. 제일 반대한 사람이 있다. 그 반대가 애정이라는 것은 안다. 고맙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이회창 환경특보가 되었다. 어색했다. 그래도 그 양반 덕분에 현대 있던 시절에도 계속 강의를 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봐주고, 학교에서도 봐주고, 강의를 두 개나 했다. 연대 하나, 동국대 하나.

풍요의 시대, 그 시절에 나는 회사에 있었다. 진짜로 풍요로왔다. 아무리 써도 통장에 돈이 넘쳐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돈이 너무 많아서, 집을 샀다. 그 집이 커지고 커져서, 지금 사는 집이 되었다. IMF 이후에 나와 같은 길을 간 후배들은 나보다 몇 배는 열심히 사는데, 나처럼 풍요롭고 편안한 기간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하는 것 같다.

IMF 이후, 회사가 어려운 순간이 왔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회사에서는 현대건설 기획실, 현대자동차 그리고 대북사업단이라는 세 가지 카드를 제시했다. 그 때 사장으로 간 이계안 따라서 현대자동차 갔으면? 내 인생은 좀 다른 식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현대건설 기획실로 가라고 했다. 좋은 기회라고. 좋은 기회는 개뿔, 인생 패대기치면서 살았을 거다. 내가 만약 토건을 반대하는 쪽이 아니라, 토건을 기획하는 쪽으로 최선을 다 했다면? 어쩌면 한국은 지금보다 더 개판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냥 있기도 싫고.. 이런 와중에 에너지관리공단에서 팀장 제안과 청와대 근무 제안이 거의 동시에 왔다. DJ 정부였다. 사람들은 다 청와대 가라고 했는데, 나는 "머리에 총 맞았어, 새벽부터 출근하게", 그냥 에너지관리공단 부장으로 갔다. 가서 첫 달에, 월급봉투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월급이야, 보너스야? 그래도 나중에는 꽤 올려주기는 했다.

그 후에 청와대 갈 일이 몇 번 더 있었는데, 다 안 갔다. 갈려면 옛날에 벌써 갔어, DJ 시절에. 몇 년 후에 총리실과 청와대 그리고 외교부에서 거의 동시에 제안이 왔었다. 그 때도 총리실로 갔다. 청와대, 아침 근무 싫어.. 나라를 위해서 일하다가 암 걸려 죽을 일은 없다.

그렇게 사는 게 좋으면 지금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요 몇 달 사이에도 연구원장 제안이 왔었다. 못 이기는 척하고 약간 빼면서 여지를 남기는 게 일반적인 해법인데, "머리에 총 맞았어요, 싫어요", 여지가 없이 야박하게 단칼에.

아침에 아이들 어린이집 데려다주면서 차분 - 아니 번잡스럽게 - 하루를 시작하는 지금의 삶이 나는 좋다. 그리고 회사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등원 보고를 문자로 넣는다. 수 백명 아니 수 천 명이 나를 보고 있는 순간보다, 식구 몇 명, 동료 몇 명 사이에서 다른 사람 도와주고 있는 내 삶이 더 진실하다.

국가를 위해서 뭘 해야하는 거 아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너보다 내가 국가를 위해서 더 많은 걸 해.. 의미 있는 책 쓰고, 가치 있는 얘기 만드는 게 우리 사회를 위해서 더 많은 기여라고 생각한다.

어린이집 현관에서 그냥 오늘은 집에 있으면 안되느냐고 울고 있는 큰 애를 보면서, 내가 살아온 삶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이 아이도 거칠고 허당스러운 한국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거다. 고집스러운 엄마와 아빠 때문에 남들이 다 권하는 로얄스러운 그딴 거는 이 아이의 인생에 없다.

오늘 하루, 그냥 애들 둘 데리고 집에서 놀아줄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아니야.. 나는 비정한 판단을 했다. 그냥 어린이집 교실까지 데려다주고 돌아나왔다.

어제 이런 생각을 잠시 했다. 세상에 목숨을 걸고 자기 인생을 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 하나하나의 사연이 모두 우주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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