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극장에 갔다가 그냥 허탕치고 돌아왔다. 벌써 세 번째 허탕이다. 여름에 <코코 샤넬> 본 이후로 극장에서 영화를 제대로 못봤는데, 팀 버튼의 <디스트릭트> 아직도 하나 하고 나선 길인데, 여지없이 내려졌다.

 

너무 오랫동안 극장에 안 간 것 같아서, <청담보살>이라도 볼려고 했다. 정말 이걸 보다가는 손발이 오그라들면서 5톤 트럭 떠는 것처럼 떨다가 급살을 맞을 것 같았지만, 볼 게 그거 밖에는 없었다만.

 

9시 40분에 두 시간을 기다려서 11시 40분 걸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멀어서, 이것도 운명이다. 그냥 돌아왔다.

 

나는 주로 저녁 때 아니면 밤에 극장에 가는데, 어쩔 수 없이 멀티플렉스로 가는데, 걸려 있는 영화가 너무 없고, 또 종류도 너무 다 똑같다.

 

집에 와서, 결국은 쿡 티비에 돈 내고, <해리포터 혼혈왕자>를 보았다. 기다리다 기다려 내가 죽을. DVD는 12월 중순에나 출시된단다. 도대체 <레지던트 이블> 4편은 왜 안 나오는 거야?

 

요즘 1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는 영화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황산벌>이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아내와 봤는데, 처음 봤을 때에는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었다. 딱 꼬집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야말로 뭔가 좀 아쉬운.

 

이것도 옛날 얘기이다. 요즘은 <황산벌>만한 영화도 지나가던 극장에서 가볍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잘 없다.

 

아마 지난 몇 달 동안 <황산벌>을 내가 다시 본 횟수로는 이제 얼추 30번 정도 되는 것 같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재밌다 싶으면 100번 채운다. 이렇게 100번 채우는 영화는 그렇게 많지는 않는데, 한국 영화 중에서는 <짝패>, <무사>, <엽기적인 그녀> 같은 것들이 100번 채워서 본 영화들이다.

 

100번 채우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면, 열 번쯤 지나고 나면 정말로 영화가 재밌어지기 시작하고, 30번쯤 되면 대사 하나하나의 디테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머리가 좋고, 예술성이 좋은 사람들은 나같은 삽질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별로 그렇게 예술적이지 않으니까, 그냥 때려보는 시간 투입으로 그 감성들을 잡아내는 편이다.

 

이렇게 100번을 보면...

 

냉정하게 감독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뭘 얘기하고 싶었는지 같은 것에서부터, 감독이나 촬영감독 같은 사람들이 생각해보지 못한 소소한 디테일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게다가 어지간해서는 잠깐 스쳐지나가는 행인들의 대사 하나하나까지도 어지간해서는 외우게 된다.

 

그래도 재밌는 것들은 재밌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봤을 때 재미없는 부분은, 재미없는 부분이다.

 

영화를 볼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보고 싶은 부분만 찾아넘기는 것이다.

 

일단은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더러, 그렇게 보고 싶은 것만 넘겨가면서 보면, 100번을 봐도 디테일을 보는 눈을 생겨나지 않는 것 같다.

 

어쨌든 이준기 감독의 <황산벌>을 30번쯤 보고 나니, 주옥 같은 명대사들이 남는다.

 

"우린 한끼 밥을 먹어도 반찬이 40가지야"라는 벌교 병사의 외침은 극장에서도 좋았고, 그게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대사였지만.

 

각본을 찾아보니, 최석환, 조철현, 그렇다. 조철현, 음, 내가 만났던 그 분이 이 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도대체 누가 이 맛갈나는 대사들을 만들어낸 것인지 찾아보고는 싶지만, 그건 팬심에 어긋난다. 주어진 자료로, 최대한 찾아보면서 이해를 해야지, 대뜸 찾아가서 물어보는 것은, 영 팬심 아니다.

 

(그러나 인터뷰나 취재 작업을 할 때는, 나도 불쑥, 이런 걸 질문하기는 한다.)

 

김유신이 관창을 비롯한 화백들을 황산벌로 보내면서 마지막에 하는 대사가 있다.

 

"전쟁은 미친기라, 미친 넘들이 하는 짓인기라"라는 대사 조금 뒤에 나온다.

 

"꽃은 화려할 때 지는기야!"

 

난설헌의 시를 읽다가 아주 유명한 시인데, <강남 노래>라는 시를 다시 읽었다.

 

2.

남들은 강남이 좋다지만

나는야 강남이 서럽기만 해요

해마다 모래밭 포구에 나가

돌아오는 배가 있나 애태게 바라만 보니

 

4.

강남 마을에서 낳고 자랐기에

어렸을 적엔 이별이 없었지요

어찌 알았겠어요, 열다섯 나이에

뱃사람에게 시집갈 줄이야...

 

5.

붉은 연꽃으로 치마 만들고

새하얀 마름꽃으로 노리개를 만들었죠

배를 세우고 물가로 내려가

둘이서 물 빠지기를 기다렸었죠

 

 

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 속에 드는 생각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영, 나도 창피한 일이지만.

 

정지영의 "꽃은 화려할 때 지는기야!"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마흔 하나, 여전히 이 말이 가슴을 찌른다.

 

꽃은 화려할 때 지는기야!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