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당인리 - 노주희

정교한 정치물, 이게 아니면 달리 이 소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계통’(그리드)이라는 하나의 그릇에 담겨진 대한민국의 전기, 그 그릇이 엎어져 ‘전 계통 정전’(대정전)이 일어났을 때의 이야기... 이 소설을 이렇게 소개하면, 나 같은 뼛속까지 ‘문돌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한국의 에너지 현실과 갈등 구조, 법과 제도, 정치와 행정을 씨줄로, 권력에서 당연 소외된 여성 히어로들과 그 주변인들의 삶을 날줄로 오밀조밀 엮어가며, ‘문돌이’를 단숨에 ‘전기 정치’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그래서 재난물, 히어로물, 페미니즘 소설 등 이 소설에 가져다 붙일 수 있을 법한 수많은 딱지 중에 나는 ‘정치물’을 선택했다. 그것도 엄청 재미있는 정치물이다.

재밌기만 하면 좋을 텐데, 이 소설은 한국의 에너지 현실과 너무 가깝다. 인사이더 또는 그 측근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컨피덴셜’(confidential)한 정보와 에피소드가 빼곡하게 차 있고, -그러므로 충분히 예상 가능하듯-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빡치는’ 순간이 계속 찾아온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엄청 재미있는, 그러나 현실을 자각하고 대안을 고민하게 만드는, 정치물이다.

책장을 처음 넘기면서는, 왜 대한한국의 전기 이야기를 사회과학서적이 아닌 소설의 형식으로 담았는지 의아했다. 같은 내용이라면 드라이하게 효율적으로 정리된 사회과학서적을 읽는 것이 내 취향이다. 그러나 책장을 덮으면서 절로 알게 된다. 왜 이 책이 소설이었어야 했는지, 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했어야 했는지.

이 소설의 작가는 나와 오랜 인연이 있는 경제학자 우석훈 선배다(친하지는 않습니다). 외모가 출중한 연기자가 연기 측면에서는 평가절하를 받듯, 널리 알려진 경제학자의 소설이라는 점은 이 소설의 마케팅에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진심으로, 소설 자체로 평가받길 바란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길 바란다. (특히, 여성 동지들이여, 이 책을 함께 읽읍시다!)

그리고 나 또한 ‘소설가’의 바람처럼 ‘에너지부’가 생기길 바란다. 초대 장관이 여성이면 더 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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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인리'에 20대 여성이 한 명 나온다. 첫 설계 때에는 없었던 인물인데, 막상 얘기를 전개하려고 하니까, 뭔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실무진이 한 명 더 필요했다. 여러 명의 성격들을 조합을 해서 캐릭터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원형이 노주희였다. 전형적인 너드 스타일이 원형이고, 여기에 노주희식의 유능함과 굽히지 않는 저돌성 같은 것들을 채워넣은.

이 인물의 비중이 점점 커져서, 처음에 있던 세 명의 여성 캐릭터의 운명도 변화하게 되었다. 한 명이 들어가니까 결국 한 명은 튀어나와야 했던.. 밸런스를 잡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엔딩이 바뀌게 되었다. 여성 주인공들 중에서 맨 마지막 대사를 20대에게 주었다.

아마 노주희를 처음 만났을 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시절 노주희, 어마무시했다. 고위직 공무원들이 가장 기피했던.. 그래도 꾸역꾸역, 식사 자리에서 빅엿을 날려대던. 장관이나 차관급 공무원들이 나에게 "노주희가 대체 누구냐?", 이렇게 물어봤던.

책이 나가고 책 들고 제일 먼저 만난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노주희였다. 책 한 권으로 때우면 안 되고, 나중에 근사하게 맛있는 거라도.. 일단 그건 나중에.

하여간 본인 얘기의 일부인데, 재밌게 보셨다니, 다행이다. (나를 왜 이렇게 해놨어, 지금부터 뒷수습을 해야하는 처지.. 당장 지방에 있는 분이 올라갈테니 금요일에 만나자고 하신다. 수습이 어렵다 ㅠㅠ)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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