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위기는 가끔씩 온다. 코로나가 세계를 휩쓰는 지금이 그런 위기 중의 하나다. 그리고 이럴 때, 하필이면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다. 그리고 하필이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바이든이다. CNN에서 바이든 나오는 거 20분 넘게 봤는데, 정말로 긴장감 안 느껴진다.
뉴욕 거버너가 누군지, 평소에는 알 일도 없다. 그렇지만 요즘 트럼프 최고의 적은 바이러스도 아니고 김정은도 아니고, 이란도 아니고 아마도 뉴욕 주지사인 쿠오모일 것 같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한 시쯤 되면 매일 쿠오마가 데일리 브리핑을 한다. 며칠째 그 시간이면 나도 그걸 본다. 진짜 재밌기도 하지만, 아 말을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내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서 반성을 하게 된다. 어저께는 드디어 쿠오모에게 위기간 온 것 같다. 0.9와 1.2 사이의 통계치, 우리 식으로는 재생산 지수라고 부르는 감염율을 설명하는데.. 갑자기 아무 신호 없이 방송이 꺼지더니 영국의 긴급 브리핑으로 화면이 넘어가버렸다. 프로레서 쿠오모, 이건 아니지, CNN 데스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왜 뉴욕이 지금 reopn을 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뉴욕이 5월 15일까지 셧다운 기간을 거의 한 달 정도 연기하기로 결정한 날이었다. 트럼프는 당장 열라고 난리치고 있었다.
바로 열고 싶고, 해결의 실마리를 놓치면 안 된다고 결정한 뉴욕 주지사 사이의 전쟁 아닌 전쟁, 어쩌면 이게 지금 세계의 운명을 쥐고 있는 가장 큰 전쟁인지도 모른다. 아마 지금부터 미국 대선이 시작되면 주지사 쿠오모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좀 있겠지만, 불행히도 바이든이 민주당 대선 후보다.
지금보다 세계가 더 위기였던 적은 아마도 1962년 10월의 쿠바 위기였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 전인데, 인류가 정말로 멸망할 뻔했던 것은 소련이 수소폭탄을 개발하기 직전 그리고 쿠바 사태, 이 두 번이 진짜 핵전쟁이 나기 직전까지 갔던 것 같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가 수소폭탄 직전의 핵전쟁 위기를 다룬 것이고, 쿠바 위기는 에서 다루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 때의 미국 작전 이름이 '쿼런틴'이었다. 그걸 명명한 사람이 케네디 대통령이고, 역시 또 우연히도 그때 미국 국방부 장관이 맥나마라다. (맥나마라가 직접 나온 다큐는 '포그 오브 워', 불행한 삶을 살다간 경제학자..)
만약 쿠바위기 때 대통령이 케네디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소련의 서기장은 당시 후루시초프였다. 그야말로 게임 이론 같은 상황인데, 상대가 치기 전에 먼저 쳐야 한다, 그런 논리가 팽배하던 시기였다. 소련 쪽에서는 협상할 생각이 있다는 전신이 왔는데, '쿠'라고 부르는 군사 쿠테타 상황이 벌어져서 후루시초프가 실각한 것인지, 아직 소련의 지도자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세계는 일촉즉발의 위기로 흘러갔다.
마침 이 때 미국의 UN 대사는 대선후보급이며 비들기파인 애들레이 스티븐슨이었다. 그는 UN 총회에서 소련 대사를 효과적으로 압박했고, 나름 UN 차원에서의 위기 해법을 도출하게 되었다.
영화는 이 13일 동안에 벌어진 일들을 백악관 내부의 깊숙한 얘기들로 안내해준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케빈 코스트너가 케네디 보좌관으로, 역사상 가장 멋진 '가방모찌'를 보여준다. 대학교 때 쿼터백 출신이자, 군인출신인 이 가방모찌가 핵전쟁을 피하기 위한 공무원의 '바른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의 케네디는 여기에서의 열연 이후에 영화 <스타트렉>에서 쿼크 선장을 픽업하는 우주 역사적 대업을 맞게 된다.
나에게 영향을 준 영화는 많은데, 개인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를 꼽으라면 아마도 이걸 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인류에게 궁극의 위기는 무엇인가, 단기적으로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 전쟁을 회피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었다. 전쟁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걸 영화 을 보면서 많이 생각했었다.
총리실에서 일을 했던 게 30대 초반이고, UN에서 일을 하던 것도 그 시절이다. 개인적으로 돌아보면 좀 더 나이를 먹고 그런 총괄업무를 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너무 이른 나이게 그런 일을 했던 것 같다.
뉴델리에서 있었던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는 개판으로 끝났다. 그 시절에 나는 Policy and Measures라고 이름의 정책분과 의장이었다. 사람들은 그 회의에서 뭔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회의는 엎자고 하는 결정이 마지막 순간의 직전에 의장과 주요국 대표들, 그리고 각 분과 의장이 모인 아주 좁은 방에서 벌어졌다. 그 나이에 내가 뭘 알겠다고, 그 심야에 열린 일종의 비밀 회의에 들어가 앉았다. 내가 한 얘기는 길지 않았는데, 내가 맡은 회의도 개판 났고, 개판 난 이유에 대해서 짧게 배경 설명을 했다. 미국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공식적으로 회의에서 한 얘기와 그 자리에서 밝힌 자기들의 입장이 좀 달랐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는데, 그걸 막후 협상자리에서 직접 보는 것은 좀 색다른 기억이었다. 트라우마까지는 아니지만, 실제 눈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보는 건 충격적이기는 했다.
그 후에도 살면서 그런 막후 협상 같은 자리에 몇 번 더 앉게 되었다. DJ 시절, 그래봐야 나는 서른 갖 넘은, 초짜 박사 시절이었는데.. 너무 많은 것을 미리 보게 된 것 같다.
그래서인가? 힘을 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거 해봐야 별 거 없어.. 그렇더라도 뭐가 중요하고,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그런 것은 좀 곰곰하게 따져보고 미리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영화에서 케빈 코스트너는 '로열티'를 입에 달고 사는, 전형적인 엘리트 마초다. 그렇지만 그는 공군 장군들 사이에서 '민간인'으로서 균형을 잡는 역할에 최선을 다 한다. 그래서 경제학자 출신인 맥나마라와 함께 '무조건 폭격'을 외치는 군인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게 된다. 그러면서도 케네디에 대한 군인들의 쿠테타 시도에 대해서도 견제를 한다.
지나간 일이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에 매나마라 모델이 한참 논의되었던 걸로 안다. 국방부 장관이 누가 되어야 하느냐, 그런 논의에서 민간인의 군인 통제, 그런 얘기가 공식 의제로도 올랐었다. 포드 2세로 넘어가면 포드가 망할 것 같아서 포드사는 맥나마라를 영입해서 드디어 사장으로 올렸다. 그런데 마침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서 포드사 사장을 국방부 장관으로 영입했다. 뭐, 결국 베트남전이 벌어졌지만 말이다. 그런 국방 개혁 논의도, 정말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리고는 다시 민간인의 군 통제 같은 얘기는 우리나라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 논의를 한참 끌어가던 정치인들도 이제는 사라진 사람들이 되어버렸고.
시대는 흐른다. '젊은 엘리트 남성들'에 대한 노스탈지아는 사라졌고, 이제는 유능하고 잘난 남자들의 리더십이 아니라 여성 지도자에 대한 고민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또 넘어갔다. 짧은 순간의 위기 관리 능력은 역시 남자들이 잘 해, 그건 60년대의 얘기다. 여성 리더십이 잘 작동한 나라들이 의외로 코로나에 대해서 잘 버틴다는 분석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