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물질

책에 대한 단상 2018. 4. 10. 11:04

 

(내가 얘기하는 이물질과 사진의 이물질은 아무 상관은 없다...)

 

이물질

 

요즘 나는 부쩍 이물질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단어이기는 한데, 정서적으로 아름답지는 못한 표현이다. 처음에 책을 쓸 때에는 특별히 생각하지 않다가 고치는 과정에서 많이 쓰게 되는 표현이다. 특정한 개념을 설명하거나 감정을 만들기 위해서 본 라인에서 약간 빠져나와서 다른 얘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래는 이렇게 우회해서 많이 돌아갈수록 후반부에 더 풍부한 사례와 함께 감정을 만들기가 좋다. 그게 책과 논문이 다른 점이다. 논문은 가능하면 직선으로 가지만, 책은 그렇게 가면 너무 매말라서 읽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결론이라는 게, 사실은 읽는 사람 마음 속에서 무슨 효과가 나야 의미가 있는 거라서, 이것 저것 다 자르고 결론만, 그러면 정말 장작개비처럼 매마른 애기가 된다.

 

초고를 쓰고 나면, 이제 다시 얘기가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얘기를 풍부하게 할 것 같아서 집어넣었는데, 감정만 소모하고 본 가지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런 걸 이물질이라고 부른다. 이런 게 이물질인지 핵심요소인지 사실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무의미한 것을 처음부터 그 자리에 배치하고 쓰는 사람은 없다. 돌았냐? 쓸 데 없는 얘기를 쓰게. 책이 대충 300페이지라고 보면, 생각보다 짧다. 죽 달려가도 꼭 필요한 얘기들을 결국에는 분량 조절하기 위해서 빼야 하는데, 꼭 필요하지 않은 얘기를 누가 쓰겠나? 그래도 애초에 생각했던 것 같은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 서브라인들이 생겨난다. 이 순간이 고통스럽다. 너는 이물질이야 하고 날려버릴지, 아니면 좀 더 손을 봐서 본문의 내용과 좀 더 호응을 하게 다듬을지,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판단이 어렵다. 어쨌든 이물질이라고 판단되면, 어느 저자가 상관없이 가차 없이 날린다. 이물질 같은 데에도 느낌이 있어서 남겨둔 것들이 있다. 나중에 독자들이 그 부분이 좋았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생긴다.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물질을 처리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냥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가면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좀 다른 방식으로 읽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남겨진 이물질이 보너스 같은 요소일 수도 있다.

 

요즘 방식으로 책을 편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학계에서 최고의 책으로 치는 다윈의 <비글호 여행기>가 있다. 여행기랑 상관 없는 개인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요즘 책 편집 같이 하면 비글호 여행기는 온갖 이물질 투성이이고, 이것도 자르자, 저것도 자르자. 그 두꺼운 책이 남는 게 없을 것이다. 과학계에 남을 명저 중의 명저다. 마찬가지 관점으로,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저선을 보면 온통 이물질 투성이다. 어디 그런 책만 그러겠느냐? 심지어 <자본론>도 논리의 전개에 방해가 되는 이물질 덩어리이다. 게다가 결론도 불투명하다. 아마 요즘 책 편집하는 방식으로 하면 <자본론>에는 필요 없는 서문들, 길게 늘어진 수다들, 별 효과적이지 않는 인용들, 다 날라가고 100페이지 미만이 될 것이다. 그랬다면 <자본론>을 읽고 혁명을 꿈꿨던 청춘이 지금과 같이 많았을까? 좋은 책, 고전이 된 책, 어떻게 보면 이물질 덩어리다. 그런 이물질이 거의 없는 것은, 최근에 읽은 시나리오인 사무엘 바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진짜 중요한 대목인데도 아주 짧게 처리하고 넘어간다. 정보가 너무 중요한 것인데, 설레발 없다. 진짜 기능적으로 딱 필요한 얘기들만 들어가게 설계되어 있다. 영어와 불어, 모국어와 외국어를 바꿔가며 글을 쓰는 사무엘 바케트가 이 대목에서 특별히 한 얘기가 있다. 외국어로 글을 쓰면 복잡한 수식 같은 것을 줄여서 간결해지는 장점이 있다고 (그래, 잘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익스피어도 참 이물질 없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기능적으로 필요한 요소들만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세익스피어가 사람이 아니라고 하나보다.

 

글과 책은 다르다. 원고지 10매짜리 글에는 이물질이 들어갈 요소가 없다. 밥 먹고 잠깐 커피 한 잔 마시러 나갔다 오는 산책과 같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34일 혹은 일주일 이상 걸릴 긴 여행이다. 목표만 보고 달리면, 중간에 왜 달리는지 이유를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책을 던져 버린다. 중간에 잡념도 하고, 일상 생활을 하고, 그러다 다시 책을 집는다. 쉬어갈 공간도 필요하고, 책과는 상관 없지만 자신의 소양에 도움이 되는 얘기들이 더 의미 있을 수도 있다. 에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건 에코 아내 얘기다. 위스키라고 사과 주스나 포도 주스를 주고, 일절 술을 못마시게 하는 아내에 대한 불평. 그리고 책을 쓰는 데 방해를 하는, 어수선하고 번잡스러운 자식의 친구들. 그래서 우리는 에코는 따로 작업실이나 집무실을 두지 않고 그냥 집에서 글을 쓴다는 것을 알았다. 이게 무슨 중요한 지식이야?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에코를 이해하고, 에코의 글들이 좀 달라 보이는 효과를 갖게 한다.

 

그래서 책은 어떻게 보면 이물질과의 전쟁일 수도 있다. 다 걷어내면 못 읽는다. 그대로 두면, 그래도 번잡스러워서 못 읽는다.

 

(원래 이렇게 마무리할 생각은 아니었고, 일상 생활에서의 이물질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점심 약속이 생겨서 이만 나가봐야 한다. 나 자신의 이물질처럼 느껴지는 일상의 쓸쓸함을 쓰려고 했는데, 본문 자체가 이물질이 되어버렸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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