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에세이와 젠더 경제학 사이에서 작업 순서를 놓고 한참 고민을 하다가, 결국 좌파 에세이를 먼저 가기로 했다. 마음이 가는 순서대로.. 내 일생을 놓고 하는 일종의 커밍 아웃인 셈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입장이라는 얘기를 전해 왔다. 자기는 진보가 아니라 좌파로 살고 싶다는.. 예전에는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서 radical이라는 수사어를 좀 무리하게 끌어오기도 했었다. 조희연이 교육감 되기 전에 하던 연구가 '래디컬 데모크라시'였다. 마음은 알겠는데, 용어 겁나게 어렵고, 아무도 읽기 어려운 얘기들을 했었다. 

정당으로 보면 한국의 좌파들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다. 민주당 노선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우파들 보면, 역시 아니다 싶어서 민주당을 찍는다. 정의당은 이름 자체가 애매모호하다. 정의라는 이름에 열정을 태우기에는, 너무 이미지가 멀다. 

나는 녹색당 당원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기꺼이 가입해서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대충대충, 진보라고 얼버무리고 살았다. 그렇다고 더 좌파 정당을 지지하기 위해서 이민을 가는 건 더 이상한 얘기고. 외국에 있다고 해서 우리나라에 공산당을 만들고자 하는 건 정말로 택도 아닌 것 같고. 

꼭 어디 정당 활동을 하거나, 시민단체 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좌파들이 적지 않다. 그냥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의 자유에 속하는 영역이다. 이런 걸 '생활 좌파'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살아간다. 나는 정말이지 진보가 뭔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진보는 명확한 정의가 없다. 한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좌파에 대한 정의는 그런대로 여기저기 있는데, 진보는 거의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근현대사의 비극이 만든 단어다. 

나도 슬슬 은퇴를 눈 앞에 기다리는 상황이다. '진보 경제학자'로 남고 싶지는 않고, 한 건 별로 없어도 '좌파 경제학자'로 남고 싶다. 나는 나이를 처먹을 대로 처먹어서, 이제 공직에 나서거나 감히 좌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공적인 위치에 나갈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이제는 "나는 좌파다", 그렇게 말 해도 별 문제는 없다. 그렇지만 한참 활동하는 30대~40대 사람들이 이러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말 그대로 그렇게 해서는 민간 영역 외에는 아무 일도 하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좌파는 소수자 분류에 들어간다. 단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매우 심한 박해를 받는다. 그리고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빨갱이'라는 단어부터, 온갖 모역을 당하게 된다. 내가 받은 모욕은, 책으로 쓰면 전서 정도 될 거다. 그래도 나는 명랑한 편이라서, "아, 네 제가 바로 그 빨갱이입니다", 그렇게 웃으면서 넘어갔다. 30대까지는 그런 게 가슴에 좀 남기도 했었는데, 마흔 넘어가면서, 맨날 욕해라, 욕하는 니 입만 아프지.. 

나는 그렇게 맷집으로 버텼는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게 여전히 어렵지 않겠나 싶다. 누군가는 "나는 좌파다", 이런 꼴통 짓을 해주어야, 그래도 좌파들이 움직일 공간이 생길 것 같다. 유럽 같으면 잡지도 만들고, 저널도 만들고, 심지어는 재단도 만들면서 뒷 사람들이 움직일 공간을 만들었던 것 같은데.. 내 능력으로는 택도 없고.

진보라고 말하는 것이 상당히 불안정한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퇴행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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