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적 경제는 좌우를 넘는다>, 최종 제목이 이렇게 잡힌 것은 출판을 몇 주 남긴 때의 일이다. 그 직전까지는 '경제는 좌우를 넘는다, 사회적으로'였다. 나는 이 제목이 더 좋았지만, 도저히 입으로 읽을 수 없는 제목이었다. 입말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파자형 제목을 포기하고, '사회적 경제'를 그냥 이마에 달기로 했다.

이 책은 계약서부터 시작하면, 5년도 넘는다. 진짜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주제가 청년에서 사회적 경제로 바뀐 것은 3년 정도 된다. 그 뒤로도 역시 우여곡절이 많았다. '사회적 경제'라고 제목에 다는 것은 나도 부담스러웠고, 출판사도 부담스러워했다.

사회적 경제라고 제목에 쓰는 건, 책 팔기 싫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랑의 노동'을 비롯해서, 원래 초반 작업 때 사용하던 제목들은 따로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내 심경이 바뀌었다. 책은 덜 팔리더라도, 그냥 정직하고 정확한 제목을 다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은? 책 제목 그대로이다. 어떻게 좌우를 넘는가, 내가 보고 들은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정리하였다.


2.
지금 내용을 마무리하려고 준비하는 또 다른 책이 있다 <국가의 사기>, 시기상으로 그리고 정서상으로, <사회적 경제는 좌우를 넘는다>는 아무래도 쌍둥이 책이 될 것 같다. 한참 중반 작업쯤 들어가 있을 때, 최순실 사태가 벌어졌다. 나에게도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인가? 온다면 그 시대가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사회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좌우 이념의 대결로 인해서 어려웠던 문제가 사회적 경제 책에 주로 나간다. 그리고 제도 개선에 관한 얘기 그래서 미래 경제의 비전에 관한 얘기가 <국가의 사기>로 정리된다. <국가의 사기>는 벌써 원고가 마무리되었어야 하는데, 아이 둘 키우는 아빠 입장에서, 그렇게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나도 이 격동의 시대, 마음을 정리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생각들을 한 번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대체적인 입장 정리는 끝났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3.
사회적 경제를 한국 사회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좀 안다. 그렇지만 변화의 여지가 아직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책을 쓸 이유는 없다.

책을 쓰는 방법이 과연 효과적일까? 생각을 좀 많이 했다. 단기적으로는, 비효율적이고, 효과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길게 시간을 두고 진짜 변화를 생각하면, 여전히 책이 가장 효과적인 것 같다.

내가 엄청난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금은 더 길게, 다른 말로 하면 한가롭게, 뭐가 더 나은 길인지 그렇게 생각을 해본 적은 좀 있다. 하루하루의 호흡으로 살아가면, 책은 쓰기 어렵다.

어떤 책을 써야겠다, 생각하고 나면 책이 실제로 나오는데 3년 정도 걸린다. 물론 FTA나 세월호 때처럼 급하게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호흡은, 3년 정도인 것 같다.

3년이 지나도 여전히 의미가 있거나, 여전히 시대의 최전선일 때, 그 때 출간을 한다. 언론과도 많이 다르고, 방송과는 더더욱 다르다. 2~3년 지났을 때 무의미해지는 얘기, 그런 건 책으로 다루기가 어렵다.

최근에 그런 생각을 좀 많이 했다.

누군가는 길게 보고, 넓게 살펴보고, 꼭 정답은 아닐지라도 계속 살펴보는 작업을 하는 게 의미는 있을 것 같다. 그런 일을 조금은 더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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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불황 10년』 등 경제와 계층에 대한 통찰을 꾸준히 전해온 우석훈 박사가 자신의 땀이 녹아있는 육아 이야기 『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가고』로 돌아왔다. ‘두 아이의 아빠가 내 정체성’이라고 적을 만큼 우석훈 박사의 삶은 이제 오롯이 아빠의 역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주말은 완전히 아이들과 함께 보낸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일을 줄여야 했다. 물론 그 역시 일을 줄이는 선택을 내리고 육아에 전념하면서는 조바심이 났다. 좋은 제안을 받으면 “마음이 하루에 세 번 바뀌”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수밖에.


“들어오는 일들이 있는데 ‘내년에 하면 안 되나?’ 생각해보거든요. 꼭 그때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에요.”라는 우석훈 박사의 말은 자신을 ‘보조양육자’라고 칭하면서도 ‘양육자’에 방점을 찍어둔, 자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빠’라는 사실을 단단하게 의식한 사람의 말이었다. “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소득을 줄이고, 연봉을 포기하고, 아픈 둘째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갖는 길을 택했다. 다른 부모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들이 있을 것이다.(중략) 이건 내가 가진 문화적 취향이고 정서적 선택이다. 나는 매순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것을 선택하면서 살아왔다. 먼 훗날의 더 큰 행복을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방식으로 살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먼 미래에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행복은 믿지 않는다.(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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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지불하는 몫이 너무 과하다


요즘 하루 일과가 어떤가요?

 

아침 8시 반에서 9시 정도에 일어나요. 세수만 하고 아이들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요. 그러면 10시가 조금 넘어요. 그때부터는 두세 시간 책도 보고, 글도 써요. 그렇게 오후까지 계속 있을 수 있으면 집에 있고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나와서 사람도 만나죠. 주말은 완전히 죽음이고요.(웃음)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아침까지는 완전히 몸으로 때우는 시간이에요. 그나마 요즘은 두 아이가 둘이서 놀기도 하니까 조금 편해졌죠. 이전에는 둘을 다 신경 썼어야 했는데요. 지금은 조금 먼 거리에 있어도 돼요. 둘이 친해졌거든요. 잘 놀아요. 점점 더 편해지겠죠. 

 

『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가고』는 육아에 관한 아주 꼼꼼한 기록입니다. ‘기록’의 의미가 많이 엿보이기도 하거든요.


이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영어 조기교육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선행학습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하는 이야기를 꼭 한 번 써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파서 경황이 없었어요. 이 책은 틈나는 대로 겨우 메모해둔 것들이에요. 육아일기는 쓸 수가 없는 거더라고요.(웃음) 앉아 있을 시간 자체가 없으니까요. 둘째 백일 지나서야 조금씩 쓰기 시작했죠. 지나보니 메모해둔 것들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런데 책을 쓰면서 정말 재미있었어요. 끝나고 나니까 이제 뭐하고 노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책이 두꺼워졌어요. 이대로 쓰면 두 권은 쓰겠더라고요. 많이 덜어냈어요.

 

앉아 있을 시간도 없다, 육아의 현실이겠죠.


게다가 두 아이가 같은 남자 아이라도 성격이 완전히 달라요. 그러다보니 선호하는 것도 다르고, 기저귀 떼는 방식도 다르고요. 보통 일이 아니죠. 똑같이 하는데도 다르더라고요.

 

거듭 사회가 담당할 수 있는 영역을 개인과 가정이 담당하고 있다고 문제제기 합니다. 특히 출산 장면에서 그랬어요. 이는 경험에서 온 것이기도 한데요.


둘째가 태어나자마자 숨을 못 쉬어서 집중치료실로 갔어요. 열흘 정도 입원을 했거든요. 첫째 때는 안 시킨 검사도 다 하고요. 검사 결과가 괜찮아야 퇴원을 할 수 있었어요. 보니까 병원비가 200만 원이 넘게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출산하다가 생긴 일은 그냥 보험수가만 조정하면 되는 건데, 하고요. 어떤 경우에는 병원을 가야 하는데 돈이 무서워서 못 가는 일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병원비 부분은 그렇게 개선이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요. 생각만 조금 하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병원비를 내면서도 이런 비용은 괜히 지불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플 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건 그야말로 기본이잖아요.

 

몇 살 이전, 처럼 기준만 정하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이죠. 개인이 지불하는 몫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산후조리원도 그래요. 곳곳에 방치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조금씩 개선한다고는 하는데 경험하는 입장에서는 부족하다고 느껴요.

 

국가의 출산 장려 정책이라는 게 탁상공론에 머무는 경우가 너무 많죠. 앞부분에서 첫 아이 지원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부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라고 적기도 했어요.


지역별로 지원정책이 다 있어요. 그것도 넷째, 셋째, 둘째, 첫째 순이거든요. 그런데 첫째 아이 지원 수준을 올리는 게 사실은 맞아요. 넷째는 아무도 안 낳거든요.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말이죠. 셋째도 낳으면 엄청 준다고는 하는데 그걸 위해서 셋을 낳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분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럴 바에야 첫째 아이에게 지원금을 많이 주는 게 출산율 상승의 효과는 있겠죠. 하지만 돈이 많이 들잖아요. 절대 안 하죠.

 

지금 한국 수준에서 출산/육아 정책 분야에 가장 해결이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병원비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요. 약도 마찬가지인데요. 많이 쓰는 약은 보험에서 빼는 것 같더라고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좋아지는 것 같진 않아요. 이야기는 많은데 실제 육아하면서 느끼는 건 전혀 다르거든요. 어린이집 옮기는 것조차도 너무 힘들고요.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대학도 옮기잖아요. 초, 중, 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어린이집만 안 돼요. 진짜 힘들어요. 일단 어린이집이 되면 아무 데도 이사 못 가요. 옮기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요. 10% 정도 추가 정원만 허용을 해줘도 한결 나을 텐데 말이에요. 제도만 조금 손보면 될 일인데 답답하죠.

 

그렇게 안 하는 이유는 뭘까요?


현장과 동떨어진 곳에서 결정을 하니까 그렇죠. 이건 고도의 행정력을 발휘할 일도 아닌데(웃음) 말이에요. 반드시 예산이 필요한 일이 아니더라도 이런 것처럼 있는 것 안에서 조정을 하면 편해지는 것이 많아요. 야간 베이비시터 제도(공공 아이돌봄 서비스)가 있거든요. 하지만 대기 줄이 수천 킬로미터예요. 엄두도 못 내죠. 한두 번 알아보다가 포기했어요. 많은 것들이 명목상으로만 있는 거예요. 뭐가 되게 많긴 한데 보통의 경우 거의 해당이 안 되죠. 차라리 써놓지를 말든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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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많다


제목에 우선 공감하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특히 육아에 있어 ‘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간다’는 말이 참 절묘해요.


한 다큐에서 본 거예요. 평생 해녀로 사신 할머니가 나왔는데요.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 끝에 나온 말이에요. 생활하는 입장이 다 똑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들 엄청나게 돈을 쌓아놓고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부분 그럴 것 같아요. 돈이 있으면 있는 규모 안에서 먹고, 없으면 또 없는 규모 안에서 먹죠. 딱 두 배 나가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지낼 만하면 유모차가 망가지고요.

 

유모차부터 도시 문화까지 아우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경제학자 관점으로 본 육아, 생각할 부분이 많았어요.


한두 살짜리 아이에게 명품 브랜드 옷 입히는 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기억도 못할 때인데 말이에요. 그 아이가 커서 그 얘기해주면 좋아하겠어요? 그 돈 그냥 주지(웃음), 할 거예요. 그러느라고 지금 돈이 없다면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영어 유치원도 그렇더라고요. 우선 의미도 없고요. 아이도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요. 나중에 영어 하는 데 엄청난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대만은 우리 식으로 치면 초등학교 입학 전에 영어 과외 시키는 것을 금지시켰더라고요. 정말 영어를 가르치고 싶으면 영어 유치원 보낼 돈을 모아서 하와이로 몇 달 여행을 다녀오면 돼요. 그게 낫잖아요.

 

육아 산업은 절대 안 망한다고 하는데 ‘이것만큼은 꼭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자유로운 양육자가 얼마나 되겠어요.


육아 산업도 망해요. 연구하시는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들은 90년대 말에 알았다는 거예요. 출산율이 줄고 산업이 위축될 거라고요. 고심하다가 럭셔리 전략을 택했다는 거죠. 아이들이 줄어도 단가를 높이고, 브랜드를 차별화시키는 방식으로요. 90년대 말에 그렇게 이미 했다는 건데요. 그러니 럭셔리 전략에는 한계가 없는 거예요. 가격으로 차별화시키는 건 최근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걸 모두가 따를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많아요. 돈은 벌기가 힘들지 쓰기는 쉽거든요. 저는 자녀에게 돈을 쓰는 것에 대해 지적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의미 있게 쓰는 게, 돈을 가지고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인 거죠. 돈을 부수면 다시 안 모이거든요.

 

갈등 장면이 많이 나오거든요. 가령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도 고민을 하죠. 양육자가 가지고 있던 가치와 배치되는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많잖아요. 육아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마주한 갈등의 순간은 언제였어요?


진짜 아이스크림은 안 먹게 하고 싶었어요. 지금도 초콜릿 안 사줘요. 그러면 뭐 해요, 할아버지가 사주는데요.(웃음) 이번 생일에는 초코 케이크도 사줬다니까요. 하는 수가 없어요. 되도록 안 먹이고 싶지만 너무 원하면 어쩔 수 없더라고요.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조금 덜 먹게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잘 안 돼요.

 

그럴 때 어떻게 하세요? 계속 타협을 해나가는 건가요?


요즘은 자꾸 스마트폰을 보고 싶어 해요. 재미있는 것들이 워낙 많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스마트폰과 TV를 연결 시켰어요. 안 보여줄 방법은 없고, 작은 화면을 보면 눈에 안 좋으니까요. 며칠에 한 번 30분 정도 정해놓고 보여주는 거죠. 타협을 한 거예요.

 

생애 주기에 따라, 자녀의 성장 과정에 따라 고민 주제가 달라질 텐데요. 이것만은 절대 안 하도록 하고 싶다, 하는 것이 있으세요?


게임기를 사달라고 하는 날이 오겠죠. 지금도 게임기를 보면 너무 황홀하게 쳐다봐요. 진짜 고민이에요.(웃음) 모르겠어요.

 

강하게 기억에 남은 대목이 있어요. 식사를 하면서 ‘세상에 굶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부분이었는데요. 그 부분에서 양육자의 철학이나 가치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상의 진실이기도 하고요. 시민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하는 부분이에요. 밥투정을 할 때 세상의 절반이 굶는다고 말하면 처음엔 잘 이해를 못해요. 왜 밥을 못 먹느냐고 되물어요. 설명을 해도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듣죠. 그래도 알아야 할 것들이 있죠. 모두가 우리 같은 것은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도 있다, 투정하면 안 된다, 가르치는 거죠.

 

그런 영역이 많이 있잖아요. 식사 이외에 잘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가르치는 내용이 더 있나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야기는 하죠. 첫째는 최순실이 누군지도 벌써 알고 있어요. 계속 뉴스에 나오니까 묻더라고요. 거짓말을 많이 해서 사람들이 화가 났다, 맛있는 걸 자기 혼자만 먹었다, 사람들이 밥 먹으려고 줄 서 있는데 혼자 새치기했다, 얘기했더니 진짜 나쁜 사람이네(웃음) 하더라고요. 또 시장 놀이는 일찍부터, 세 살 쯤부터 했어요. 놀이처럼 하면서 교육도 되고요. 반드시 경제 교육이 아니더라도 가게가 무엇이고, 돈이 무엇인지는 일찍 가르친 것 같아요. 돈은 진짜 빨리 알았어요.

 

“고래 팔아요.”
“몇 마리 있어요?”
(중략)
우리는 그때부터 미끄럼틀을 ‘소중이네 고래 가게’라고 불렀다. 그 가게에는 고래가 세 마리 있고, 상어도 판다. 흥정이 끝나면 둘째는 주먹 쥔 손을 내민다. 고래를 팔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걸 받아줘야 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손을 펴서 다시 내민다. 돈 달라는 얘기다. 그 손에 돈을 주는 시늉을 하면 거래가 끝난다.(227-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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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지금은 버틸 수밖에


한 구절, ‘조바심은 인내와 기다림으로 바뀌었다’고 했어요. 여기서 질문이 떠오르더라고요. 육아로 많은 걸 희생한 듯한 느낌을 이야기했는데 실제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의 경우 대부분이 주양육자이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많이 할 테니까요. 박사님은 이런 느낌 앞에서 어떻게 마음 정리를 하셨어요?


버티는 수밖에 없겠죠. 답이 없거든요. 사회 분위기도 호의적이지가 않고요. 계속해서 개선을 하자고 하니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텐데요. 당장 지금은 버틸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는 조바심이라는 게 못 먹는 떡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경우도 좋은 제안이 많이 왔었어요.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요. 마음이 하루에 세 번 바뀌더라고요. 안 간다고 해놓고는 다시는 이런 제안이 안 올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요. 그렇지만 결국은 기다리는 마음인 거예요. 다음에 또 오겠지, 하고요. 어쨌든 당분간은 육아에 전념할 생각이거든요. 아이가 아프면 우선순위가 다 바뀌어요. 하는 수 없죠. 아이들은 금방 크니까요. 또 아이들 보는 게 재미있어요.

 

참 새삼스럽게 느껴져요. 육아에 이렇게 참여하는 남성이 점점 늘어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보조양육자에 머물러 있는데 말이에요. 주양육자, 보조양육자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반증이기도 하겠고요.


보니까 아기 기저귀 갈 줄 아는 할아버지가 거의 없더라고요. 갈아봤어야 말이죠. 평생 기저귀를 한 번도 안 갈아본 거예요.

 

그런가 하면 박사님은 ‘두 아이의 아빠가 내 정체성’이라고 하기도 했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은 아빠들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희 집도 주양육자는 아내예요. 다만 아내가 일을 하려다보니 제가 더 시간을 내야 하는 상황인 거죠. 아내도 많이 힘들어했고요. 제가 프랑스에서 지낼 때 본 건데요. 프랑스 엄마들은 출산 후 열 달이 지나도록 예전 몸매를 회복하지 못하면 좀 놀리는 게 있더라고요. 자기보다 아이를 더 돌보는 건 집착이라는 거죠.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에선 상상하기 어렵잖아요. 저는 그런 걸 보고 살았으니 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선진국은 이미 다 그렇게 지내고 있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되겠죠. 그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고요.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아내보다는 제가 더 상황이 되니까요. 들어오는 일들이 있는데 ‘내년에 하면 안 되나?’ 생각해보거든요. 꼭 그때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에요.

 

각자의 상황에 맞는 삶의 방식이 있는데 워낙 한국 사회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면이 있어요.


제 차를 없앴는데요. 그러면서도 따져보니까 차 유지비를 생각하면 딱 절반만 가지고 택시 타거나 하면서 지낼 수 있겠더라고요. 차 없다는 핑계로 모임에 덜 나가도 되고요.(웃음) 이제는 아이들이 어린이집도 가고 하니까 낮에는 시간이 있거든요. 그때 글도 쓰고 해요. 많이 나아졌죠. 둘째까지 기저귀를 떼고 나면 이제 아이인 거지 아기는 아닌 거거든요. 좀 서운한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몇 년 간 집에 아기가 있었는데 이제 없는 거니까요. 더 이상 아기는 없고, 악동들만 남겠죠. 그게 아쉽더라고요. 그동안 충분히 놀고 좋은 마음, 편안한 생각으로 아이들이 자랄 수 있어야 뭘 배우더라도 되지 미리 스트레스 줄 이유가 없어요.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흔들리며 사는 거고, 또 그런 게 생활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돈을 많이 들인다고 좋은 것도 아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면 아빠들이 육아에 시간을 더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두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워낙 집에서 아빠들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서요. 조금만 더 해도 만족도가 확 올라가요.(웃음)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책 읽어주는 게 체력적으로 죽도록 힘든 일일까? 아니거든요.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요즘은 어린이집 가서 봐도 아빠들이 많이 보여요. 종종 있어요. 그런 아빠들이 결혼을 했겠지(웃음) 싶기도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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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이 사위에게 권하면 어떨까


어떤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책을 쓰셨어요? 이 책을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으세요?


책을 쓸 때는 그런 생각이 아니었는데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장인이 사위에게 권해주면 좋겠더라고요. 참고하면 좋겠어, 유럽 스타일이래, 하면서요. 결혼할 때 예단을 보내잖아요. 거기에 끼워 넣어도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아요. 장모가 권하기엔 좀 그렇고, 장인이 사위에게 나는 이렇게 생각해, 라면서 권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이 얘기를 했더니 장인이 사위에게 전쟁하자는 거냐(웃음) 하시더라고요.  
 
『88만원 세대』, 『솔로계급의 경제학』, 『불황 10년』 등 경제와 계층에 대한 통찰이 담긴 책도 써오셨고, 『모피아』처럼 소설도, 『1인분 인생』처럼 삶에 관한 이야기도 책으로 꾸준히 써오셨는데요. 아직 쓰지 못한, 꼭 써보고 싶은 책이 남았다면 뭘까요?


에너지 분야 이야기를 거의 안 썼어요. 이쪽으로 더 써볼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한동안 안 봐서 공부해야 할 게 많긴 하지만요. 자료도 업데이트 해야 하고, 현장도 봐야 해요. 몇 년 동안 약속 해놓고 못 쓴 책들이 많아서요. 일정대로 계속 책을 낼 계획이에요.

 

계획이 잡힌 다음 책은 뭐예요?


에세이예요. 50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거든요. 지금 생각하는 제목은 ‘남의 말을 50번 좋게 합시다’인데요. 50세가 넘으면 남의 말만 좋게 해도 밥은 먹고 살겠더라고요. 50대가 되면 욕하고 싶은 사람이 인생에 걸쳐 생기거든요. 성질대로라면 하루에 50번은 욕을 할 수 있어요.(웃음) 그런데 남의 말을 50번 좋게 하면 돈 벌 거예요. 어렵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최순실 씨처럼 되겠죠. 돈이 없어서 그 사람처럼 못 되는 거지 본능과 느낌대로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람과 많이 다르지 않을 거예요. 비싼 음식점에서 욕했다는데 막상 비싼 음식점에 갈 일이 없어서 못하는 거거든요.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 보면 욕을 달고 살잖아요. 제 또래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서요. 다음 책은 그 이야기가 될 거예요.

 


 

 

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가고우석훈 저 | 다산4.0
곳곳에서 인구절벽과 보육대란을 논하는 시대, 저자는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아이는 낳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 또 대표적인 복지 전문가답게 정책의 구체적인 수정 방향과 보완책 또한 제시한다. 프랑스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검증한 방식을 토대로 국내 상황에 특화한, ‘부모와 아이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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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정세균 국회의장하고 차 한 잔 마시고 왔다. 몇 년간, 거의 매일 보면서 지냈었다.

내가 살아가는 원칙이 그렇다. 누군가 굉장히 힘들 때 같이 지내고, 고생이 끝나면 떠난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한다.

그가 오세훈을 큰 표 차이로 이기는 것을 보고, 나는 폐렴으로 입원해있는 둘째 아이에게 돌아왔다.

누군가를 돕고, 그걸로 뭔가 얻어걸리는,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는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하여간 간만에 만나서, 나중에 국회의장 그만두면 내가 평전하나 쓰고 싶다고 말했다. 당근빠따, 그렇게 하자고 한다. 어차피 별로 할 일도 없을테니...

정세균과 평생을 같이 지낸 것은 아니지만, 평전만큼은 진짜로 재밌게 쓸 자신이 있다. 그의 삶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아직 보지는 못한 것 같다.

나도 좀 재밌고, 즐거운 거 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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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도 분석을 위해서는 시대 구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대통령별로 구분을 하는 게 좀 쉽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정부별로 확연하게 갈리지는 않지만, 주요 정책들은 실제 대통령별로 특징을 갖는다.

지금까지 내가 잠정적으로 사용하던 분석틀을 다음과 같다.

YS 시대 - 군사 정권에서 민간 정권으로의 전환기. 서로 공존하기 어려운 정책들이 혼재 되어 있다. 잘 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고.

DJ 시대 - 완화된 신자유주의.

노무현 시대 - 강화된 신자유주의.

여기까지가 '괴물의 탄생'에서 썼던 분류 기준이다.

명박 시대 - '사기꾼의 시대'

'살아있는 것의 경제학'에서 이렇게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내년 봄에 나올 책에서 이걸 좀 더 강화시켜서 '국가의 사기'라는 개념으로 정면으로 다루어볼 생각이다.

근혜 시대 - 순실의 시대

이건 아직 사용한 적이 없는 가설적 내용이다. 지금 하는 사회적 경제 책 분석에서, 어쨌든 근혜가 뭘 했는지, 아니면 뭘 안했는지, 이 분석이 필요해서 가설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근혜 시대가 사기꾼의 시대가 아닌 점은 명확하다. 사기꾼은 자기가 뭘 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근혜는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니까, 사기꾼도 못된다. 조희팔은 자기가 사기 치는지 명확히 알았다. 명박도 알았다. 근혜는 그 급도 못된다.

순실의 시대, 근혜는 뭔가 한 게 없고, 순실은 뭔가 한 게 있다.

순실이 한 것을 결국 역사가 알게 될까?

언론으로 드러나지 않은, 최소한 두 가지 분야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일부는 진행 중에 사건이 터져서 중간에 정지, 일부는 미수에 그친 사건.

순실의 시대는, 결국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깊고 넓은 것 같다.

100년 후의 역사에, 근혜 정부에서 '근혜'라는 이름은 결국 사라지고, '순실'만이 남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박근혜 정부'라고 스스로 부르려고 했던 이 시대는, 아마도 '순실의 시대'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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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여성, 새로운 책을 준비하며

 

1.

늘 내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많은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 혹은 뭔가 창작적인 것을 하기 위해서, 나는 일부러라도 정서적 안정성을 스스로 무너뜨렸던 것 같다.

 

하여간 죽어라고 살아온 삶, 그게 아주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다 보니, 내 삶을 누구에게 권해줄 처지는 아니다.

 

스무 살을 넘어서면서 난 늘 불면이었고, 언제나 수면부족이었다. 감정은 과잉이었고, 날 극한까지 밀어 부쳤던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조금은 더 편하게 생각하면서 살아도 되는데, 별로 그러지를 못했다. 만약에 지난 대선, 결과가 좀 달랐다면 나는 훨씬 더 편안하게 내 삶을 즐기는 쪽으로 살았을 것 같다.

 

그런데 별로 그럴 수가 없었다.

 

2.

내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나랑 같이 일하지 않으면 금방 힘들어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나는 계속 움직인다. 이제 좀 내려놓고 싶기는 한데, 내 주변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편해졌다고 생각할 때까지는, 하여간 당분간 움직이게는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아기 둘의 아빠가 되면서, 나도 이제 좀 이기적이 되었다.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그리고 자빠지는 일도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뭘 더 어쩌겠어, 그런 생각도 종종 한다.

 

30대 때의 나는, 무조건 될 때까지, 그런 생각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될 일은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될 것이고, 안될 일은 어차피 아무리 죽어라고 해도 안될 일이었다. 그 때는 그런 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건강을 많이 상했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쉴 때 쉬고, 잘 때 잔다.

 

요 며칠, 어쩔 수 없이 잠을 제대로 못잤다.

 

두 손이 부르르 떨리고, 손가락 관절 위로 혈관도 잔뜩 부풀어올라,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핑계 대고 좀 쉬었다.

 

손 떨리는 것은 좀 가라앉았다. 그냥 이렇게 살살 살려고 한다. 조금 더 무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살 살려고 한다.

 

3.

책은 어떻게 할까?

 

이제 그만 쓴다고 맨날 생각하면서도 이래저래, 조금 더 쓰게 된다. 내가 몇 권을 썼지?

 

책 권수를 세던 때도 분명 나에게 있었는데, 어느 순간인가 까먹었다. 모르겠다

 

책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대충 살아서 그렇다.

 

하여간 권수 같은 것은 어느새 기억 뒤편으로 넘어간지도 꽤 된다.

 

책 작업을 할 때, 꼭 필요하고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만 한다. 이 세 가지가 다 맞아서 한 경우 아니면, 꼭 후회하게 된다.

 

, 물론 어느 책이든 그런 조건이 맞는다고 생각을 해서 시작을 하지만, 그게 진심이 아니라면, 결국에는 후회하게 된다.

 

3.

내 책 중에 후회를 가장 많이 준 책은 <솔로계급의 경제학>이었다. 이것은 책과는 상관없는, 애초의 기획과정에서 생겨난 문제점을 마지막까지 극복하지 못한 경우였다.

 

그래도 마칠 수 있었던 게 기적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이 배우고,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게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후회까지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책 작업을 하면서 재밌던 경험은, <솔로 계급의 경제학>을 제외한 나머지 최근 책들은 정말로 책 준비하고 쓰면서 그 과정을 즐겼던 책이다.

 

<솔로 계급의 경제학> 이후로, 크게 결심한 게 한 가지 있다. 적어도 책과 관련해서, 앞으로는 싫은 일은 하지 않겠다고

 

내가 괴로워서 이제는 못하겠다.

 

4.

하여간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요즘은 좀 편안하다. 마음만 편하고 몸이 편치 못하다는 게 단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몇 달 전부터 생각했던 게 ‘40대 여성에 관한 책이다.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왜 이런 걸 고민하게 되었는가,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 분량이 될 듯 싶다.

 

여러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다.

 

40대 후반 여성, 내 친구들이다. 평생을 좋은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슬픈 일이든, 같이 상의하면서 살아왔던 내 친구들이 바로 40대 여성이다.

 

나에게 에세이를 써보게 하면서, 사회과학이 아닌 에세이 책을 준비하게 한 사람이, 바로 가장 오래된 나의 친구이다. 그렇게 오래된 친구가 아니라면 내가 말을 듣겠는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그렇게 말하고 나는 고분고분 듣는 여자 동기들이 있다.

 

40대 중반 여성, 긴박하게 나에게 연락하고 뭔가의 도움을 청하는 40대 여성들은 나의 후배들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본 적이 없는 나에게까지 연락을 하는 경우, 대부분 이혼을 앞두고 있거나 막 이혼을 했을 때였다. 아기는 키워야 하고, 막상 세상을 혼자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 그 절박한 삶의 무게감 앞에서 커피 한 잔을 놓고 마주하게 된다.

 

일자리를 찾아주거나 아니면 일감이라도 찾아주어야 한다. 그 삶의 무게감, 어마어마하다.

 

얘기를 같이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혼자 살아가야 하는 엄마의 무게를 같이 져야 한다. 그게 정말로 내가 고민을 같이 한 40대 중반 여성들이다.

 

40대 초반, 나의 아내와 그들의 친구들이다. 아내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그들의 경험이 곧 나의 경험이기도 하다.

 

5.

오랫동안, 내 주변에는 남성보다 여성들이 많았다. 비율로 따지면 나와 같이 작업하고 일하는 사람들 중에 여성이 월등하게 많았다. 내 책의 에디터들이 대부분 여성이었다. 처음에 같이 작업할 때에는 처녀였지만, 내가 나이를 먹은 것만큼 그들도 나이를 먹어서 아기 엄마들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도 아줌마가 되어갔다.

 

요즘 나는 아주 거친 남자들과 일상을 보내고 있다. 여의도가 그렇다. 여성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조적이거나 상징적이거나대부분은 남자들, 그것도 정치를 매개체로 하는 아주 거친 남자들이다.

 

그렇게 나는 거친 남자들의 세계로 돌아와있다. 협상하고, 거래하고, 나눌 거 나누고, 그러면서도 서로의 자웅을 겨루고, 우리 편이냐 아니냐, 그런 걸 본능적으로 따져야 마음이 편해지는 그 남자들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편과 서열, 그 간단하면서도 미묘한 남자들의 세계, 그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현대에 있던 시절, 대기업의 세계가 그랬다. 정부에서 일하던 시절, 여성들은 아주 드물었다. 그냥 남자들이 학교 따지고, 학벌 따지고, 그런 세계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리고 다시 그 세계로 돌아와있다.

 

6.

그 안에서 정말로 내가 분석해보고 싶은 얘기가 무엇일까, 지난 겨울 내내 고민을 해봤다.

 

40대 여성의 얘기, 그 삶을 분석을 해보려고 한다. 나의 친구, 나의 후배, 나의 아내, 그런 좋든 싫든, 한 평생을 이미 같이 살아버린 그 사람들, 그리고 또 그들의 친구와 그들의 언니와 그들의 동생들, 그런 얘기들을 해보고 싶어졌다.

 

궁핍이 풍요를 느끼게 해준다고….

 

지금처럼 남성들 가득한 세상에서 일상을 보내다 보니, 그와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생각이 더욱 애뜻해진다.

 

그리고 뭐가 다른지, 정말로 피부 세포가 감각적으로 느낀지, 약간은 좀 알 것 같다.

 

7.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청년들에 대한 첫 분석을 시작해보던 시절이 다시 생각이 난다. 그 시절, 주변이든 출판사든, 다들 반대했다. 청년, 그거 한국에서는 인기 없는 주제 아니냐

 

난 그 시절의 청년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말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걸 알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리고 뻔한 거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런데 실제 나는 잘 모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뭘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시절 생각이 얼마 전, 여의도에 눈이 펑펑 내리던 날, 그 눈을 보면서 생각이 났다.

 

모른다는 것은, 분석의 출발점이다.

 

지금 한국의 40대 여성, 사실 잘 모르겠다.

 

8.

분석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감정도 필요하다. 분석 대상자에 대해서 애정이 없다면 제대로 분석이 되겠는가? 그 애정은, 차이에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남자들에 둘러 쌓여서 오랜만에 나도 순전히 남자들의 전투적 용어를 사용하다 보니, 그렇지 않은 존재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애정이 생겼다.

 

막상 분석을 해보면, 무슨 결과가 나올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분석 대상에 대한 애정이 더욱 생긴다.

 

뻔한 거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이건 연구자들의 기본 욕구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9.

2015년 대한민국 40대 여성, 내가 던진 새로운 질문이다. 감각적으로 생각나는 것은, 이런 경우 남도 모르고 자신도 잘 모른다.

 

연령과 성별 그리고 시대와 같은 조건을 집어넣고 하는 분석이, 내가 아주 좋아하는 분석이기도 하지만이렇게 구체적 조건을 주고 나면, 전혀 생소한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경험적으로는 그렇다.

 

이렇게 생소한 질문 앞에 다시 한 번 서보려고 한다.

 

그냥 내 양심이 흐르는 대로, 그렇게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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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책 한 권, 내년에

 

원래 경제 대장정 시리즈의 8권이 원자력을 비롯한 에너지 얘기에 할당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태경제학 시리즈로 5권에서 8권까지를 잡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생태경제학 시리즈가 워낙 매 권 힘만 엄청나게 들어가고, 성과는 없는지라

 

나도 강철이 아니라, 7권에서 일단 포기하고 9권을 먼저 냈다. 문화경제학 9권까지 내고, 에라 모르겠다, 그리고 쉬는 중이다.

 

8권을 살려보려고 노력을 좀 했는데, 아주 감성적으로, 포토 에세이로 바꿔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워낙 딱딱한 기술적인 얘기들이 많을 거라서, 좀 부드럽게 바꿔보면 어떨까 싶어서

 

테스트 삼아서 포토 에세이도 한 권 내봤는데, 역시나 실패.

 

경제 대장정 시리즈는 이래저래 헤매는 중이다. 10권은 농업 경제학, 그야말로 거의 안 팔릴 걸 감안하고 나의 양심이라는 이유만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고.

 

11권은 과학과 기술의 경제학, 박근혜가 창조경제 얘기하면서 완전 김빠져서 에라 모르겠다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 분야이기는 한데, 된장과학자들이 박근혜한테 그렇게 열심히 줄 댈 줄은 몰랐다. 빈정 팍 상해서, 안 해!

 

12권은 언론과 정당의 경제학, 그야말로 니미종편 출범하고 언론 환경은 이래저래 개판이 되어서, 그야말로 며느리도 몰라. 게다가 방송은, 내가 방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뼈저리기 경험한 이후방송 얘기는 다루기도 싫고, 보기도 싫다.

 

내가 싫다는 밖에.

 

하여간 이러다 보니, 경제 대장정 시리즈는 어디 처박혔는지 나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다이 상태로 올해를 맞았다.

 

사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마당에 무슨 희망이 있다고 죽어라고 머리 박고 고민하겠냐, 게다가 사전 연구비로 내 돈 엄청 써가면서

 

그래도 가을이 되면서, 내년 계획을 새로 절절하게 짜다보니, 일단 시작한 거는 어떻게든 마감을 지어야 좋지 않을까 싶어.

 

시리즈의 10권이 농업경제학이다. 어떻게 보면 나의 양심이다. 사람들이 이름 좀 알만한 경제학자 중에서 농업 얘기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내 출발점이 농업은 아니다. 그러나 내 양심이 향하는 마지막 종착지는 농업이다. 여전히 그러하다.

 

그리하여 은퇴하기 전에, 농업 얘기는 어떻게든 좀 정리를 해보자, 이렇게 해서 생각을 시작했드랬다.

 

최근에 농업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 이 구상을 시작했을 때보다도 더 안 좋아졌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다. 그래도 비교적 모범이라고 할만한 프랑스도 독일도 농업 정책은 요즘은 개판 5분 전이다.

 

이렇게 하면 된다, 뭐 그런 게 없다.

 

그래도 나의 양심이니까, 내기는 할 것인데이걸 후년 작업으로 잡았다. 뭔가 새로운 흐름이 내년 상하반기에 나오지 않을까, 그런 가냘픈 희망으로.

 

개별 국가 정책은 개판이지만, EU 통합 정책이 아마 내년에는 좀 더 모습을 보일 듯 싶다.

 

그리고 미국의 변화도, 지켜볼 만하다. 미셀 오바마가 백악관에 텃밭을 시작했다. 푸드 스탬프의 후속 프로그램도 좀 지켜볼 만하고, 일본에서의 청년농업직불금 관련 조치들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어차피 내 평생에 농업경제학 책은 딱 한 번 낼 것인데, 상황이 안 좋은 상황에서 그냥 내가 아는 것만 정리해서,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다.

 

좀 더 기다렸다가 10권 내면서 그냥 시리즈 쫑 탁 내는 것에 대해서 요즘 고민하는 중이다.

 

그렇게 8권은 건너뛰고 10권에서 시리즈를 끝낼까 고민하던 차에

 

며칠 전 저녁 밥 먹다가 밀양 얘기를 보면서, 그냥 사람 죽어도 그만이라고 하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에너지 책은, 간단히 말하면 1쇄 털기가 아주 고욕인 책이다. 거기다 원자력에 반대하는 책, 힘은 힘대로 들고 성과는 없는.

 

몇 년 전에 기든스가 기후변화 관련된 책을 낸 적이 있다. 기든스, 그래 바로 그 제3의 길의 앤서니 기든스이다. 번역자는 홍욱희 선배, 이름 들으면 몰라도 그 때 그 사람, 그렇게 들으면 어지간히는 알만한 사람이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광화문 뒷골목의 중국집에서 탕수육에 빼갈을 정말로 맛있게 같이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옆에 같이 있었던 공무원 양반은 나중에 특허청장이 되었다. 숱한 논쟁과 치고박던 스토리 속에서도 그 양반과 그날 빼갈 마시면서 했던 얘기는 정말 좋았다.

 

이 양반이 한전 출신이다한전 그만두고 나와서 시민운동한 사람, 하여간 이름 하나만큼은 쟁쟁한 사람이다.

 

기든스의 책을 홍욱희가 번역했는데, 그래도 얄짤 없다이게 에너지 책의 한계치라고 보면 된다.

 

천하의 기든스가 써도 어렵다. 아마 움베르토 에코가 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자력에 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얘기들을 다 모아서 한 번은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매는 처음부터 포기하고

 

내가 에너지맨이었고, 에너지로 오랫동안 밥 먹고 살았고, 그걸로 살아왔던.

 

간단하게 책 구성을 생각해봤는데, 일단 책 한 권은 충분히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왜 원자력에 반대하는지, 그리고 그 대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최근 민간 전문가 위원회가 하나 열렸고, 위원장을 김창섭 박사가 했다.

 

오래 된 동료이고, 한 때 내 몸처럼 아꼈던, 정말 내 친형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양반이다.

 

2004년도, 민주노동당 처음 원내 진출하는 그 총선 때, 탈핵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썼고, 그 때 탈핵 프로그램을 디자인한 적이 있다.

 

10년 전 일인데, 김창섭 박사가 위원장으로 내린 기술적 결론이 그 시절에 내가 내린 결론과 같았다. 대가리 정상이면, 그 결론 외에는 없을 듯 싶다.

 

그 얘기를 10년만에 다시 꺼내볼까 싶다.

 

그 뒤에도 새로운 경험과 지식이 좀 얹힌 것들이 있다. 하다 보니 발전사 사외이사를 3년이나 했다. 발전소에서 무슨 고민을 하고, 뭘 하고 싶은지, 정말로 그 현장에서 몇 년을 보냈다.

 

그리그리하여

 

내년 상반기에는 간만에 에너지 관련 작업을 좀 해볼까 한다.

 

어떻게 보면 내 깊숙한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공직을 그만둔다고 생각할 때, 원자력에 대한 내 입장이 일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원자력을 반대하거나 아니면 반대한다고 입장을 표출하면, 에너지 분야에서는 고위직에 갈 수가 없다. 현실이 그렇다. 생각을 바꾸거나,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 지혜를 갖추거나.

 

당시 나는 3급 부장 말년차였고, 현장 팀장이었다. 슬슬 2급 부장 승진과 함께 초고속 처장 승진이 기다리던 때였다.

 

물론, 그 중간에 내가 원자력 찬성자로 입장을 바꾼다는 전제하에

 

몇 가지 그런 정황과 개인적인 학자로서의 판단을 종합해서, 나는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몇 년간 나의 아내는 빈처가 되었다.

 

그 시절의 얘기들과 그 후에 내가 더 알게 된 것들을 모아서 한 번 구상해볼까, 그런 고민 중이다.

 

왜 우리에게 원자력이 대안이 아닌가, 그 어쩌면 너무 뻔한 얘기들을 한 번 정리해볼까 싶다.

 

, 돈도 안되고, 힘은 힘대로 들고무엇보다도 여태껏 살면서 나와 계속해서 동료로 지내고 있던 사람들과 등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도 선택을 쉽지 않게 만든다.

 

그렇지만 마음과 양심이 가는 대로

 

밀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도 잘 모르겠다.

 

박근혜 하는 걸로 봐서는, 몇 명 죽더라도 공권력이, 질서가, 이렇게 갈 거다.

 

나도 그냥, 양심이 가는 대로 하려고 한다.

 

한 때, 한국의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공로로 장관 표창도 받았던 내가

 

이제는 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내년도 상반기에 책 한 권 작업할 시간을 배정하고 있다.

 

제목까지는 정해놓았다. 쎈 제목이다.

 

양심을 버리면, 결국 나이 먹어서 행복을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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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솔로 계급의 경제학'이라는 주제로 책을 내볼까 생각하면서 써본 최초의 스케치가 있다.

 

그 후로 진도도 많이 나갔고, 몇 개의 필승 카드도 생겨났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떻게든 내 손에서 10월말까지 초고를 떨어뜨려 보려고 한참 작업 중이다.

 

지금의 원고는 이 때와는 톤도 다르고, 접근도 전혀 다르게 되었지만...

 

하여간 이렇게 떠듬떠듬, 시작을 한 작업이다.

 

책 작업이 쉽지는 않지만, 돌아보면 그래도 나에게 가장 맞는 작업이 이 작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40대 중반, 이제 더 이상 나 스스로를 청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때 내가 가졌던 열정 이상을 이번에 쏟아부으려고 한다.

 

스케치 작업만 몇 번을 했고, 이번만큼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많이 한 적도 없다.

 

내가 어디에서 이 작업을 시작했는가,

 

나도 까먹을지 모를 것 같아서...

 

책 쓰기 시작하면서 언제나 내 방에서 그냥 쭈그리고 앉아서, 택도 없이 느린 컴 가지고 썼었는데,

 

이번에는 작업실 대신 여관방 잡아놓고 하는 것도 좀 하려고 한다.

 

전화기 꺼놓고.

 

하여간 중요한 주제이기는 한데, 아직도 결정적으로, 나는 답을 잘 모르겠다.

 

나올 때까지, 작파하고 고민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솔로 계급의 경제학 : 세습 자본주의와 무자식자들                                     

 

우석훈

 

< 들어가는 말 >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의 테제 11)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심각하게 만들려고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웃기는 것이다.

 

(우석훈, 솔로 테제 11)

 

1. 자식자, ‘불알 두 쪽’, 프롤레스

 

로마 시절의 일이다. 노예가 아닌 시민 중에 돈이 없는 사람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군대에 가기 위해서는 로마병의 중장갑 전투 장비를 자신이 직접 사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지킬 것이 없으므로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도 있었던 것 같다.

 

5년에 한 번 로마에서 진행된 시민들의 현황 조사에서 돈이 없는 사람들의 재산란에는 자식들의 이름만이 기록되었다. 그야말로 자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 ‘자식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라틴어 proli 즉 자식이라는 말에서 proles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야말로 자식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서 군대에도 갈 수 없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로마 시민층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조선 식으로 얘기한다면, 그야말로 불알 두 쪽밖에 없는 양인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차이점은 우리는 상민이 아닌 모든 양인들은 군역의 의무를 지었다. 최소한 군대 앞에서 만큼은 경제적 차별이 없던 나라였다.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에는 군대와 시민권에 대한 흥미로운 설정이 나온다. 외계의 괴물, 벅스들과 전쟁 중인 미래의 공화국은 군대에 갔다 온 국민들에게만 시민권을 주고, 이들만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다. 경제와 정치, 그리고 군대라는 이 복합적인 권력 중에서 군사 권력이 경제를 누르고 시민권을 통제하는 미래 사회가 설정되어 있다. 아마도 경제 권력이 너무 막강해져 문제를 일으켰는지, 결국 군인들이 기업인들을 통제했던 전사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군대에 가서 정상적으로 복무를 마치지 않으면 투표권을 가진 시민권을 받을 수 없다는 영화에서의 설정은 군대와 경제 사이의 관계의 한 단면을 생각해보게 한다.

 

재산이 없으면 군대에 갈 수 없고, 그래서 더더욱 가난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자신의 이름 뒤에 재산 항목으로 달려있는 것은 자식들 밖에 없는 프롤레스’, 그야말로 자식자, 자식 밖에는 없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2. 프롤레타리아, 팔 것은 몸 밖에 없는 사람들, 무산자

 

로마의 가난한 시민들인 프롤레스들을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끄집어 낸 사람이 바로 칼 마르크스이고, <자본론>에서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고, 팔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자, 농민이라는 말로 쉽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말로는 자본가(capitalist)는 유산자, 즉 재산이 있는 사람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 재산이 없는 사람으로 번역된다. ‘생산 수단이라는 좀 복잡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 단어를 염두에 둔다면, 무산자라는 번역이 정확하게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는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의미는 재산이 없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생산수단, 즉 생산을 하기 위한 수단인 공장이나 회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에 더 가깝다. 자본가의 반대말이니까, 무산자라기 보다는 사장님이 아닌’, 그런 의미에 가깝다.

 

좀 잔인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좀 특수한 경제활동에서 누군가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고용되어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받을 수 있는 돈은 기본적으로는 임금 외에는 없다.

 

<자본론>에 정의된 착취의 개념은 좀 복잡하다. 롱 스토리 숏트, 긴 얘기를 짧게 정의하면 하여간 일한 만큼의 돈을 사장에게 지불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덜 지급된 임금이 바로 잉여가치, 즉 이윤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그 반면, 주류 경제학에서는 노동의 생산성이 바로 임금이기 때문에, 일한 사람이 자신이 생산에 기여한 만큼은 주고 있다고 이해된다. 착취가 있든 없든, 19세기 중후반에 자신이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 외에는 소득이 생겨날 수 없는 이 새로운 사람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를 새로 정립하면서 마음 속에 가졌던 생각일 것이다.

 

아주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은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 즉 사장님들과 노동자만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자본론>의 기본 논리이다. 그럼, 그 사장을 없애고 노동자들끼리만 생산을 하면 어떨까? 왕을 없애고 시민들이 참정권을 가지고 정치적 결정의 최고 위치에 가도록 만든 것이 프랑스 혁명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왕조를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 그런 혁명의 순간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 혁명이 한 번 더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이 19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최초의 자본주의 형성을 마친 국가에서 생겨난 사회 사상이다. 논리적으로 어려운 말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엄청나게 많은 희생과 고통을 담보로 한 생각이다. 러시아 혁명을 시작으로,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현실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생겨났다. 우리와 같은 민족인 북한 역시 38선 이북에 있던 러시아의 영향권 내에서 사회주의로 근대 국가를 만든 나라 중의 하나이다.

 

3. 룸펜과 중산층

 

룸펜 정확히는 룸펜 프로레타리아라는 단어는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미 등장한 단어이다. 사장과 노동자만으로 사회가 구성되는 것은 아니고, 이건 지금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형성 초기에도 그랬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노동자만 해도 그래도 양반인 것이고, 그 상황에도 가지 못하는 부랑자, 소매치기, 좀도둑, 방랑자, 이런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그들을 룸펜이라고 불렀다. 간단히 말하면 생산 시스템을 기반으로 기본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룸펜인 것이다. 그럼 그들은 뭘 먹고 사나? 혹은 그들은 일하지 않는가? 영화 <도둑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일을 하는 것이기는 한데, 그 일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들도 노동하는 것인가? 혹은 그들에게도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아주 오래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의 칭송을 바쳐야 하나?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에 나오는 기막힌 사기꾼을 가치와 생산이라는 틀에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업영화의 제작 및 유통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고, 그것도 아주 자기만족적인 의미로 영화를 제작하거나 다큐를 만드는 인디 영화나 인디 다큐의 종사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런 룸펜들과 함께 또 다른 고민의 대상이 요즘은 그냥 '중산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중간계급(middle-class)'라고 할 수 있는데, 어원적으로는 그냥 소득이 중간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 더 복잡한 얘기들이 있다. 사장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은 룸펜이야"라고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 직업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공무원들이 그렇다. 요즘은 공무원들도 직급에 따라서 노동조합을 만들지만, 그렇다고 공무원이 노동자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한 때 전세계를 풍미했던 루이 알뛰세의 국가 이데올로기 기구라는 테제에 의해서, 국가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유지하는 장치라고 하면 설명은 쉽다. “너희는 자본의 개들이야”, 이렇게 한 쪽 편으로 밀어버리면 말은 간단하지만, 어딘가 좀 찝찝하지 않은가? 종교인들도 분류가 어렵다. “종교는 아편이다”, 이렇게 자본가편이라고 밀어붙이면 이해는 쉽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종교를 처리하기도 어렵다. 자본주의보다 더 오래된 기관인 대학교, 여기의 교수들, 이 사람들은 또 뭘까? 어차피 일을 해서 월급을 받으니까 노동자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장관 자리에 오르는 웨이팅으로는 또 가장 좋은 직업인 만큼, 통치자 쪽으로 이해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매일매일 드라마에서 보는 스타급 연기자들 그리고 그 자신이 회사인 것도 아니면서 회사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A급 영화감독들, 이 사람들도 자본과 노동자라는 간편하고도 단순한 분류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해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군인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군인은 도대체 어떠한 경제적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연금과 재산을 가지고 있는 퇴역한 장성들, 이들은 또 무엇인가?

 

하여간 중간계급 혹은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쉬운 개념은 아니다. 한국의 도시가계 연평균 소득이 4,500만원 정도 된다. 도시에 살면서 연소득 4,500만원을 버는 가장이 자신이나 그 식구들이 자신들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듯싶다.

 

4. 블루 칼러와 화이트칼러 그리고 슈퍼을들의 창조계급

 

20세기를 거치면서 노동자 사이에도 분화가 이루어졌다. 공장과 사무실 사이의 분화, 그래서 한 쪽은 작업복을 상징하는 블루칼러, 또 다른 한 쪽은 흰색 와이셔츠를 상징하는 화이트 칼러, 그렇게 나누어서 이해하게 되었다. 어렵게 따지자면 한없이 복잡하겠지만, 이 내용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사무직과 공장직,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고, 대졸과 고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서울 본사에 근무하는 문과와 지방 공장에 근무하는 이공계의 차이로 드러나기로 하였다.

 

좀 큰 눈으로 생각해보면,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블루컬러에 해당하는 노동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그 대신 판매 등 경영과 관련된 역할이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임금으로 볼 때 꼭 화이트 칼러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두 종류의 노동 사이에 사회적 위계와 선호 관계가 설정되는 경향이 있다.

 

직업이 귀천이 없다’, 우린 늘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별로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연봉에 따라, 일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근무지에 따라, 직업에 대한 선호는 극명하게 갈린다. 이런 노동 방식의 차이에 따라 노동자 사이에서도 처지와 이해가 갈리게 된다. 여기에 자본주의 초기부터 존재했던 중소기업의 문제가 한국에서는 해소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남아있다. 대기업에 갈 것인고, 공기업에 갈 것인가 혹은 중소기업에 갈 것인가, 이 자본의 성격에 따른 구분이 화이트/블루의 구분만큼 개인의 삶을 극명하게 가르게 된다.

 

굵고 짧게’, 이는 대기업을 일컫는 말이다. 연봉은 많지만 오래 일하기 어렵다. ‘가늘고 길게’, 이는 공기업을 의미한다. 연봉이 민간 기업만큼 높지 않지만, 여전히 정년을 보장받고 있으며, 정규직 체계 내로 들어가면 그냥 그렇게 특별히 모나거나 특별히 구질구질하게 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가늘고 짧게’, 이건 중소기업을 상징하는 말이다. 연봉이 적은데, 또 언제 망할지 모르니, 가늘고도 짧은

 

'미스매칭'이라는 용어에는,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구직을 하라고 정부의 애잔함이 담겨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주어진 현실이 이러니, 선택지가 별로 없다. 마르크스가 얘기한 프롤레타리아, 팔 것은 몸 밖에 없는데, 그나마 잘 안 팔리고, 이래저래 잠시만 다른 데 돌아보고 있으면 삽시간에 룸펜이 되어버리는 삶, 그게 현재 스코어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누군들 가늘고 짧게살고 싶겠나. 할 수만 있다면 굵고 길게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아닌가? 화이트컬러든 블루컬러든, 결국 회사에 고용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초기 선택의 작은 차이가 개인의 삶의 인생경로를 엄청나게 바꾸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자신의 미래로써 중소기업은 영 아니고, 공기업은 힘들고, 대기업도 만만찮은 것은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사람들이 삶의 주판알을 튀기는 동안, 미국에서 환상적인 계급이 새로 출연하였다. 격론의 대상이 되었던 리처드 플로리다가 얘기한 창조계급(creative class)이 그것이다. 과학과 문화를 막론한 고소득 직종이 창조성을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그의 얘기는 창조성과 함께 도시의 관용성(tolerance)에 대한 또 다른 논란을 불러왔다. 가히 게이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함의를 가진 이 논의를 쉽게 정리하면, 게이가 많이 사는 도시에 창조계급이 많이 산다는 것이다. 물론 창조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게이라는 말은 아니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루이 뷔통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마크 제이콥스는 물론 창조계급이며 동시에 게이다. 간단히 말하면, 마크 제이콥스가 살기에 불편하지 않은 곳에 다른 창조적인 인간들도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과학자나 작가 혹은 영화인들은 많은 경우 독창적이며 동시에 괴팍한 사람들이라서, 전통적인 규범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익명성을 존중하지 않는 곳은 불편해서 살기가 어렵다. 플로리다의 이런 얘기들은 너무 간단한 것이라서 그게 맞을까 싶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유교적인 전통성이 강해서 가장 보수적인 도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구의 경우, ‘밀라노 프로젝트는 충분한 정부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창조적으로 경제 구조가 바뀐 흔적을 보기가 어렵다. 이 밀라노 프로젝트 실종 사건에 대해서 경제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기는 한데, 그 중 가장 창의적인 해석이 <도시와 창조계급>이라는 플로리다의 테제를 따르는 방법이다. 분명 대구에는 돈이 갔는데, 사람들이 따라가지는 않았다. 유교적 전통에 따른 가부장적 권위주의는 여성들과 게이들에게는 분명히 살기 어려운 도시 여건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래서 창조적 인간들이 대구에 거주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검증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될 것이다.

 

사회적 선호도는 블루칼라<화이트칼라<창조계급, 이 순서대로 나갈 것이다. 푸른 작업복을 입는 것보다는 넥타이를 선호할 것이지만, 그 위에는 다시 넥타이를 맬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창조계급의 영웅, 스티브 잡스도 넥타이를 매지 않고, 또 다른 한 편에 서 있는 마크 제이콥스도 마찬가지이다. 한 때 방송인 중에서 가장 많은 소득을 올렸던 강호동 역시 넥타이를 매지는 않는다. 이 넥타이를 매지 않는 새로운 계급에서 상층부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 줄을 서서 모셔가는 '슈퍼을'을 형성한다. 창조성, 상징적 자본, 매력자본, 이런 슈퍼을 현상을 설명하는 몇 가지 개념들이 있기는 하다. 어쨌든 모두의 노동 조건이 동일한 것은 아니며 임금 조건 역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5. 자동화와 프레카리아트

 

블루칼러에서 창조계급에 이르는 일련의 직업 분화와 추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가설이 있기는 하다. 로봇 등 자동화를 중심으로 이해하면 좀 더 간편하다. 지난 100년 동안 노동자들이 했던 많은 일들은 이제 로봇 등 자동화 기기로 대체되었다. 자동차 조립공정에서 이제 사람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설치된 자동화 로봇의 보조 역할에 가깝다. 물론 아직도 수작업으로 자동차 조립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걸 만드는 사람들은 블루칼라라고 부르지 않고, 장인이라고 부른다. 일부 슈퍼카들을 만들 때 수작업 조립을 한다.

 

블루칼라에서 화이트칼라로 노동의 주축이 옮겨간 것은 공장 자동화 과정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개인용 PC의 보급과 함께 전산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화이트칼러의 자리도 상당 부분 위협당하게 되었다. 지금 화이트칼러의 일자리 중에서도 상당 부분은 결국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성 내근직의 대표적이었던 전화 교환수가 결국에는 사라지게 된 것이 이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공기업이었던 KT가 민영화되고, 그 정리해고 과정에서 이런 전환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기계가 대체하기 어려운 직종들이 몇 가지가 있다. 창조계급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직업들이 대체적으로 로봇화 혹은 자동화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로봇 디자이너, 로봇 영화감독, 로봇 연구자, 이론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여전히 사람들이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로봇이 디자인한 웨딩 드레스, 전위적이기는 하지만 지금과 고가에 팔릴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청년이 자신의 미래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로봇과 경쟁하게 될 것인가 아닌가, 그 기준이 아닐까 싶다. 공무원! 탁월한 선택이다. 대통령이 로봇으로 대체되는 일이 없는 한, 공무원과 국회의원은 적어도 지금의 대학생들이 경제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여전히 사람이 할 것이다.

 

블루칼라에서 창조계급까지, 노동활동이 중심축이 움직이는 동안, 기계화가 불가능하거나 기계화가 필요 없는 새로운 노동양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유자식자라는 의미의 프롤레타리아와 위험하다는 의미를 가진 precarious라는 형용사의 결합어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그것이다. 불안하고 가난한 노동자 정도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불완전 고용, 불완전 노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불리는데, 요즘 우리 말는 비정규직이라고 포괄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 중에도 슈퍼을들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파견노동자와 알바까지 포함하는 일련의 노동 양상, 그들을 의미한다.

 

프레카리아트 현상이 지금 막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초기부터 존재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한국 경제의 경우에도 자본주의 방식의 안정적인 일자리가 사회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이후의 일 아닌가? 그렇다면 그 이전의 사람들은 무얼 하고 살았단 말인가?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그 도시 빈민들이 지금의 프레카리아트보다 부유하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프레카리아트 현상에 대해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 경제도 마찬가지이지만 세계경제 특히 선진국 경제가 더 이상 '발전' 패러다임에 따른 고성장을 하기가 어렵다는 전망을 갖기가 어려워서 그렇다. 덩치가 커져나가고 있을 때에는 내부의 문제가 뻔히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갖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러나 그런 식의 고성장이 어렵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지하고 나면, 지금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나중이라고 풀릴 리가 없다는 것을 좀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말을 했다. 이제,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단결하라", 이런 선언이 필요하게 된 시기가 도래하는 것일까? 한 쪽에서는 기계로 대처될 수 없는 고급노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창조계급'으로 분류되는 동안, 이제는 사람값이 너무 싸서 굳이 비싼 로봇으로 대처할 필요가 없는 노동을 중심으로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을 눈 앞에 보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런 분화 현상이 한국에서는 너무 빠른 시간 동안에 벌어지기 때문에 특정 세대 혹은 특정 연령에게서 동시에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청년은 창조적이며, 동시에 프레카리아트적이다. 이제 막 패션 디자이너나 연예 기획사 막내로 데뷔한 20, 그 어느 쪽이든 아직은 가능하다. 창조계급 쪽의 눈으로 본다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면 최소한 밥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화 노동자로 본다면, 실업보험 등 4대 보험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알바 혹은 그 이하의 경제적 삶이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확률로만 본다면, 후자 쪽의 가능성이 훨씬 높다. , 그래서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상관 없어요, 어차피 잘 안될 꺼니까요."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한동안 유행했던 말이다. 그러나 자동화의 끊임없는 진전과 한계 노동의 계속적인 등장이 끝이 아니다. 창조계급과 '불안한 노동'과 같은 새로운 트렌드에 얹혀서 또 다른 장파동의 변화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 있다.

 

"애인 있으세요?"

 

이런 질문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가? 어쩌면 멀지 않은 장래, 결혼정보 회사 아니면 이런 질문을 아예 하지 않을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전쟁이나 페스트와 같은 아주 특수한 상황 아니면 전 세대가 다음 세대보다 부유했던 적은 없었는데, 한국은 부의 상대적 안정성 측면에서 다음 세대가 전 세대 보다 가난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다. 기어야 지금 와서 새삼 놀라울 일은 아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빈곤 현상과 함께 섹스도 줄어들게 될 것인가? 로마 시절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안정적으로 작동하던 가부장 중심의 가족 패턴은 이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뀌어가는 중이다. 섹스와 부의 연관관계,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은 아닐까? 돈과 섹스 혹은 경제적 부와 섹스, 이 문제에 대해서 경제학이 질문을 던져본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엘빈 토플러 이후의 미래학자들은 세상을 지나치게 기술중심적으로 예측하였고, 그러다 보니 경제적으로는 지독할 정도의 낙관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동화와 전산화 그리고 코뮤니케이션의 발전은 이미 상당 기간 전에 예측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 아래에서 살고 있고, 그러한 기술적 발전이 만들어내게 될 또 다른 이면에 대해서 미래학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자동화가 만들어놓은 기술적 전환은 노동자들의 권력을 현저히 약화시켰고, 동시에 그들의 경제적 삶도 열악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결혼은? 결혼은 모계제 사회가 종료하고, 수컷들이 농업을 전담하게 되면서 생겨난 장치이다. 이제 이 열악해진 노동자, 아니 노동하기도 쉽지 않아진 상황에서 인간이라는 종의 재생산(reproduction)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그리고 섹스는?

 

6. 신빈곤 현상과 메이팅의 위기 : 솔로계급의 탄생

 

연애와 결혼, 섹스에도 좌우가 있느냐 싶겠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 보수층이 강력한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여기에 따라서 종교적 입장과 정치적 입장이 일정하게 궤를 같이 한다. 한국의 보수는 여전히 유교적 전통이 강한 영남 지역의 정서와 강남 대형교회의 지배력이 적당히 결합된 것이라서, 가부장적 권위에 익숙한 집단이다. 혼전 순결에 대해서 입장이 나뉘고, 게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처리에서 입장이 나뉘고, 성폭행 방지법에 대해서 확실히 입장이 나뉜다.

 

자식자 혹은 유자식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로마 시대의 가난한 시민은 자본주의 출발 초기에 노동계급을 지칭하는 은유로 사용되었다. '클래스(classs)'라고 이름 붙여진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898년 톨스타인 베블렌의 <유한계급론(Theory of Leisure Class) >가 아닐 수 없다. 충분히 레저를 즐길 수 있는 부유층에 관한 얘기이며, 과시적 소비에 관한 베블렌 재화는 여전히 패션, 알콜, 승용차 등 소비 현상에서 중요한 분석 기준이 된다. 창조 계급의 경우도 기본적으로는 클래스에 관한 은유를 전제로 하고 있다. 2012년 대선이 끝난 직후 크리스마스 이브에 진행된 '솔로대첩'으로 크게 유행하게 된 '솔로계급', 아마도 가장 슬픈 계급론이 아닐까 싶다. 추세적으로 결혼은 줄어들고 있으며, 지금과 같은 흐름이 이어진다면 아마도 지금의 대학생 중에서 1/3 내외가 전통적으로 '가정' 정확히는 핵가족(nuclear family)의 형태를 이루며 출산을 하고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그랬듯이 특히 가난한 여성에게 "결혼하라"는 정부와 교회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협박처럼 갈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데살로니가 후서 3 10.)

 

마치 성경에서 노동을 권면하였듯이 보수적 교단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카톨릭이든 기독교든, 기본적으로는 현 상태를 지키자고 하는 보수적인 종교들인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결혼과 출산에 관해서는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칼빈 시대의 신구교 대립 이후 결혼하는 목사들과 결혼하지 않는 신부들 사이의 예민한 종교 갈등을 다시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1인 가구, 즉 솔로들의 증가는 세계적 추세이다. 그렇지만 연애하지 않는 혹은 연애하지 못하는 '솔로 계급(solo class)'의 사회적 등장은 이보다는 좀 더 복잡한 문제이다. 호모 사피엔스로 인류가 등장한 이래로 모든 남녀가 연애에 성공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엇갈려 가는 삼각관계의 슬픔과 긴장감 아니었다면 문학이 지금과 같이 융성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로맨스 코메디 같은 영화 장르는 성립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솔로의 증가가 솔로계급의 증가와 연관을 보일 것인가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굳이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생각보다 어렵다. 가난과 출산 사이에 기계적인 연관관계를 설정하기도 어렵고, 또 결혼과 연애 사이에도 유기적 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연애하지 않아도 결혼할 수 있는 것처럼,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연애를 안 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90년대 중후반 이후로, 많은 경제적 혹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이게 모두 신자유주의 때문이다"라는 간편한 - 그렇다고 진실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 해법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 <식코> 이후, 의료 문제에 대한 설명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이렇게 간편하게 답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전 세계적 부동산 버블, 이것도 신자유주의라는 편안한 설명법이 있다. 유전자 조작식품의 증가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로 인한 핵발전 문제에 대해서도 민영화와 에너지 산업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면 간단하지만 그리 틀리지 않는 설명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여기에 한국적 특징을 가미하기 위해서는 "이게 다 명박 때문이다", 이러면 되었다. 조금 더 구조적인 설명을 추가하기를 원한다면 "이게 다 삼성 때문이다"라는 것 하나를 추가하면 안성마춤이다. 좀 더 과학적 설명을 추가한다면 "김용철 변호사에 의하면"이라는 수식구 하나를 더 하면 완벽하다. 문재인 후보의 의료비 상한제 공약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이런 얘기들을 종합해서 "결국 삼성화재가 돈 벌어야하기 때문에"라고 말하면 근사도 95% 이상의 설명틀이 된다. 그리고 보수 쪽 학자들의 침묵에 대해서는 삼성에서 돈을 받았거나 삼성의 눈치를 보기 때문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된다.

 

이런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동원한 간편한 설명이 솔로 현상에서는 잘 맞지는 않는다. 1인당 국민소득이 6만불이 넘어가는 스웨덴의 경우, 전통적인 가족이라는 형태로 살아가는 성인들이 1/3이 채 되지 않는다. 1인 가구 비중은 60%를 넘어설 기세이고, 그러다 보니 혼외 출생 국민의 비중이 절반이 넘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스웨덴 사람들이 덜 사교적이거나 공동체의 해체가 급격히 이루어지느냐, 그런 것도 아니다. 억지로 논리를 만들자면, 혼자 살 수 있으니까 혼자 사는 나라와 혼자 살 수밖에 없으니까 혼자 사는 나라, 그 정도의 차이라고 할까?

 

좀 더 중립적이기 위해서 '메이팅(mating)'이라는 용어를 써본다면, 지금 한국이 당면하는 위기는 경제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메이팅의 위기이기도 하다. 출산과 육아, 심지어는 가정의 평화를 꾸리는 것까지 전부 여성에게 전가하고 있던 사회가 좀 더 현명해지고 자유롭고, 자신의 권리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여성들의 등장과 함께 메이팅의 위기를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다른 아무런 조건이 없어도 메이팅의 위기는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청년을 중심으로 신빈곤 현상이 확대되는 가운데 메이팅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 원래도 기대 소득이 남성보다 낮은 여성들은 더더욱 결혼과 출산의 비용을 높게 느낄 것이고, 메이팅 비용을 전가받을 수 없는 남성들 역시 출산 비용은 물론이고 연애 비용에 대해서 불만이 없을 수 없다. 이래저래 메이팅은 위기가 되었다. 그러면 소득 보전을 해주든, 보조금을 주든 아니면 청년을 위한 분배를 늘리든, 어쨌든 청년들 손에 더 많은 돈이 가게 하면 이 문제가 끝날 것인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건 '문제-해법'의 전통적인 접근법보다는 '변화-적응(adaptation)'이라는 좀 더 생태학적인 접근 방법에 가까워 보인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결혼해라"라는 단순 명쾌한 답변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은? 한국의 50대 이상 남성들, 결혼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해서 얼마나 적대적으로 대할 것인가, 눈에 선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직까지는 그렇게 다른 반응이 나온 것 같지는 않다. 지금 한국 경제가 가지고 잇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는 유효한 수단 중의 하나로 복지 좀 더 정확히는 보편적 복지를 늘려나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복지를 늘려서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진보주의자들 역시 출산율을 자신들의 정책 성과로 이해하게 된다. 지금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가 그렇다. 변죽만 울리다 별 성과 없이 끝났던 오세훈의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를 표방한 '여행 프로젝트'나 출산율 중심으로 복지를 사고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을까? 스웨덴의 사례를 보면, 복지를 높여서, 여성이 행복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출산율을 높이자는 일련의 공식이 그렇게 진보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좌파의 시각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청년들의 솔로 현상 혹은 솔로 계급화 현상에 대해서 좌우 모두 '꼰대' 소리 듣기 딱 좋은 입장 정도이다. 그야말로 '요즘 젊은 것들, 끌끌!'의 솔로 버전인 셈이다. 이데올로기는 시대와 함께 변해나가는데, 솔로 현상에 대해서는 기존의 이데올로기들이 아직 채 정비를 하지 못한 상태이다.

7. 세습 자본주의와 솔로계급,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

 

한국에서 3대 세습은 어느덧 일반화되었다.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어쩐지 찜찜한 것은 '3대 세습'은 북한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습이라고 얘기하면 아버지에서 자식으로 넘어가는 것인데, 어느덧 안정화로 넘어간 한국 자본주의에서 3대 세습은 이제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 삼성, 현대 등 대표적인 재벌 기업들이 지금 3대 세습을 준비하고 있고, 언론은 물론 교회 심지어는 대학 등 학교법인도 3대 세습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이 경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고정 관념들이 여지없이 관철되면서, 누군가는 좀 더 쉽게 삶을 살고,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빈곤 상황에서 나올 수 없는 일들이 보다 더 일반화되고 있다.

 

세습이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인 것은 아니다. 포디즘을 만든 바로 그 헨리 포드는 엄청 구두쇠였고, 그 아들인 포드 2세는 씀씀이가 컸다고 한다.

 

"내 아들은 아버지가 포드이지만, 저는 아버지가 포드가 아니잖아요."

 

구두쇠인 그 포드가 어떤 기자에게 했다는 답변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렇지만 포드사도 여러 번의 경영위기를 거치면서 전문 경영인 체계가 되었고, 더 이상 포드 가문이 몇 대씩 승계하는 그런 구조에서는 벗어났다. 무엇보다도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당대에 대기업을 일으킨 사람들이 상징적으로 등장하였고, 그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회사를 승계하지 않는 일을 보면서, 한국에서 3대 세습에 대해서 질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 아니겠는가?

 

그렇다. IMF 경제 위기 이후 한국의 주류 경제학의 이데올로기대로 경제 운용을 했는데, 한 쪽에서는 사회적∙문화적 이유가 아닌 경제적 이유로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도 어려운 솔로 계급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습이 기본으로 진행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습형 사회는 왕에 해당하는 대통령의 세습으로, 정치적으로는 이미 완성된 셈이다. 정치와 경제, 이 필연적으로 연결되면서도 선후를 따지기 어려운 두 요소 중에, 최소한 한국에서 세습이라는 관점에서는 정치가 먼저 진행되는 듯싶다. 그렇다면 1945년 해방 이후, 아니면 1961 5.16 이후로 도대체 한국 자본주의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달려온 것일까? 그냥 편하게 얘기하면, 양반과 양반 아닌 사람으로 구성된 한국의 중세에서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서구식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한 쪽에서는 보통은 3대 아니면 2대로 구성된 세습 자본주의로 향하고 있는 한 계급과, 결혼은 물론이고 스웨덴식 혼외출산의 가능성도 없는 또 다른 계급으로 분화되는 이상한 시대로 향하고 있다. 결혼은 하지 않았어도 출산이든 입양이든, 아이를 키우는 여성 그리고 비록 자신이 양육권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아이가 어디서든 자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성, 이것과 한국의 솔로계급은 좀 양상이 다르다.

 

이 정도면, 도대체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실제로는 중세 사회로 한국 사회가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질문을 던지기에, 근본적인 딜레마가 한 가지 존재한다. 솔로들에게 왜 솔로인가, 이 질문은 너무 잔인하고, 솔로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필요 없는 질문이 된다. 확률적으로, 언제 깨어질지 모르지만 일단은 외형적으로는 평온한 중산층으로 보이는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게 솔로 현상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끌끌끌’,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질문은 좀 다른 식으로 전개된다.

 

솔로 시대에는 어떤 산업이 뜨고, 어떤 상품이 인기가 있겠는가?”

 

영민하고도 정확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자본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사람의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동기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서 장사꾼들이 굳이 알 필요가 있겠는가, 그냥 물건만 팔면 되지! 한국의 자본주의는, 어쨌든 세계 유일이며 세계 최초로 과외를 사교육으로 산업화시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주식회사 단계로까지 승화시킨 시스템 아닌가?

 

뭔가 세상에 대해서 엄청나게 복잡한 질문을 던지거나, 아니면 세상을 구원할 방법에 대해서 논의하자고 독자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거나 혹은 나도 잘 모르는 답에 대해서 논의하자고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 책 한 권을 읽으면 엄청난 깨달음이 생길 것이라고 강변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삶에 피곤하게 갇혀 살면서 극단적인 비관론이나 염쇄주의 혹은 가벼운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을 호소하는 동안, 또 다른 한편에서는 쇄습 자본주의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은 좀 억울하지 않은가?

 

솔로가 늘든 말든, 솔로계급이 늘든 말든, 한국 자본주의는 별 특별한 전환점이 없다면 더욱 더 세습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갈 것이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우리의 대통령 – ‘그들만의대통령이 아니라 이 스스로 솔로라는 사실 정도? 그리하여 박씨 성을 가진 소황제가 노인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면서 권좌에 등극할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

 

좀 심각하게 사태를 말하자면, 지금까지 오랫동안 경제학자는 물론이고 생물학자들도 그럴 것이라고 간주한 '이기적 유전자'의 가설이 사회 한 쪽에서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생명체의 존재 이유는 딱 한 가지, 자신의 유전자를 더 넓게 퍼뜨리고자 함이라! 그리하여 자기 자식을 더 많이 낳고, 무엇인가 물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 힘들고도 고달픈 삶을 버티고 있음이라!

 

사회 상층부는 어쨌든 세습을 통해서 '영광과 번영!(Glory and Prosper!)'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동안, 다른 한 쪽은 청년 시기부터 솔로계급으로 편입되어, 자신의 한 몸을 먹여 살리고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게 보이기 위해서 혼심의 힘을 쏟아야 하는 구조, 이러한 대한민국으로 가고 있는 게 과연 한국 경제의 목표이고 종착역인가? 오랫동안 군부 독재 아래에서 한국 경제가 이어져왔다. 그리고 10년에 걸친 민주당 정부, 다시 10년에 걸친 보수 정부, 그 시간 동안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무엇을 한 것이고, 우리가 가려고 했던 세상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8. 나를 위해 살 것인가, 우리를 위해 살 것인가? : 경제학의 진정한 의미

 

고전철학의 종결자이자 현대를 디자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학의 시원'이라고 하는 난해하기로 소문난


 

 

 

 

 

1. 남아당자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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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계급의 질문, 간단 정리

 

1. 메이팅의 위기

나쁜 남자, 젊은 오빠, 연하남, 프렌디

 

2. 경제적 동기

 

3. 적대감

 

4. 젠더 전쟁

 

5. 세대 전쟁

 

6. 공간의 재구성

 

7. 금융과 싱글

 

8. 최저임금과 기본 소득

 

9. 방송, 출간, 영화 등 문화 부문

 

10. 교육과 솔로

 

11. 가족과 가족 아닌 사람, 그 두 그룹의 관계

 

12. 관계의 경제학

 

13. 사랑의 노동

 

14. 흑인 여성이 편의점에 온다면?

 

15. 솔로를 위한 정책 아니면 엄마를 위한 정책?

 

16. 창조경제와 중공업 그리고 경공업

 

17. 교육과 솔로

 

18. 가난한 솔로

 

19. 부등가 교환 임금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20. 착취, 성적 착취, 솔로 착취

 

21. 가난한 solo vs 부자 solo

 

22. 솔로들의 정치

 

23. 여성들의 미래

 

24. 솔로와 스포츠

 

25. 솔로와 농업

 

26. 솔로와 군대

 

27. 엄마 사회냐, 언니 사회냐?

 

28. 사회주의와 솔로 현상

 

29. 출산률이 다가 아니다

 

30. 비자발적 솔로, 어쩌라구?

 

31. 고립과 연대

 

32. 솔로와 쇼비니즘 그리고 국가주의

 

33. solo와 자원 그리고 생태

 

34. solo와 에너지 효율성, 통합 그리드

 

35. 메이팅 산업과 거래로서의 결혼 그리고 이혼

 

36. 혼자 늙어가는 남성

 

37. 혼자 늙어가는 여성

 

38. solo와 관광

 

39. 솔로문학, 솔로예술?

 

40. 기계로 대체되지 않는 노동

 

41. 혐오와 증오

 

42. 클라스로서의 솔로

 

43. 군인들의 조직, 솔로들의 조직 그리고 기업론

 

44. 솔로와 반려동물

 

45. 솔로 시대의 국민경제와 거시경제

 

46. 연금문제 등 경제 제도 - 제도를 사람에 맞출 것인가, 사람을 제도에 맞출 것인가?

 

47. 가부장제 그 이후의 삶

 

48. 풍요 그 이후의 고독

 

49. 헤겔이냐 프로이드냐?

 

50. 솔로의 합리성, 합리적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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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계급의 경제학, 헤매는 중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올해, 나는 되는 일이 없다. 뭘 해도 잘 안되고, 어떤 시도를 해도 별 볼 일 없다.

 

보통 나는 계산을 많이 해보고 움직이는 편이다. 계산 같은 건 전혀 안하고 안 따지는 듯하기는 하지만, 사실 생각보다 많이 따진다. 그리고는손해 볼 것 알아도 의리나 명분에 의한 결정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의리, 뭐 아닌 듯싶게 살아왔지만, 의리에 의한 결정도 많이 내렸다. 그렇지만 손해 본다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다.

 

하여간, 딴 건 몰라도 하루 세 끼 밥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렇지만 올해는 내 계산은 거의 맞지 않고, 나도 내 계산을 믿지 않는다. 올해는 무조건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최악으로 안될 것이다, 그런 예상들은 잘 맞는다. 그걸 꼭 계산해봐야 알고, 예상해봐야 아나

 

그러면 아무 일도 안 해야 하고, 가만히 있는 게 맞는데, 8월이 막 시작되는 지금까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했고, 예상보다 많은 시도를 했다.

 

그래서 결과가

 

연전연패.

 

아놔,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맞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다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막 던진 건, 박근혜와 살게 된 첫 해, 아주 어려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머리 박고 있었다

 

그렇게 박근혜 시대에 나는 조용히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어려울 줄 알았다, 그렇게 내 삶에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잠시는 현명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너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것 같았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올해, 나는 연전연패 중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정답이긴 한데, 그럴 수는 없어서 움직이기는 하는데, 내 실력에.

 

이렇게 헤매는 와중에 새롭게 붙잡고 있는 연구 주제가 솔로 계급의 경제학이라는 거다.

 

보통 같으면 도서관에 몇 년씩 틀어박히고, 볼 수 있는 책은 싹 다 뒤지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다 만나고

 

지금은 그러기가 어렵고. 아기 보는 와중에 며칠에 한 번 잠깐 인터뷰하고.

 

컴 작업은 낮에는 상상도 못하고, 노트북 아니라 노트도 아기 앞에서 꺼내놓기가 어렵다.

 

이러다가 진짜 애기 업고 방송 촬영하러 나가게 생겼다. 당장 이번 주는 수요일 오전부터 촬영인데, 아기 맡길 데가 없다. 에라, 정 안되면 그냥 아기 들처 엎고 나가야겠다. 그러는 중이다.

 

하여간 연구자로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그냥 그냥 버티는 중이다.

 

이 와중에 솔로로 지내는 사람들 인터뷰하고, 의견들 묻고, 그런 걸 모아낼 수 있는 데이터 뒤져보니와 죽겠네.

 

민간기업에서 연구할 때에도 이 정도로 최악은 아니었고, 국제협상 나가는 틈틈이 데이터 뒤져볼 때에도 이 정도로 열악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 한데

 

워낙 주제가 재밌는 주제다. 그리고 야구로 비유하면, 뭔가 배트 끝에 딱 걸렸다는 느낌?

 

연구 여건으로는 최악의 상황이기는 한데, 나름대로는 주어진 조건 내에서는 최선을 다 하는 중이다.

 

처음에는 솔로로 시작했다가, 청년에 관한 얘기 그리고 젠더 이코노미라고 잠정적으로 이름 붙였던 책 세 개 분량의 얘기들을 지금 한 권에 따 내려놓는 중이다.

 

솔로라는 게, 꼭 청년에 대한 얘기인 것만도 아니고, 꼭 여성 혹은 젠더에 대한 얘기인 것만도 아니다. 구분을 하면 별도의 얘기이기는 한데, 결국에는 그 얘기가 그 얘기이다. 억지로 나눌까, 아니면 합칠까, 나는 합치는 것을 선택했다.

 

그 와중에 최근의 변화에 대해서 좀 극적으로 느낀 게 있다.

 

남성들의 여성에 대하 적대감이 생각보다 훨씬 높다는 것, 그리고 연령이 낮아질수록 이게 더욱 더 높아진다는 사실.

 

이건 예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흐름과는 좀 다르다.

 

90년대 이후, 나이가 점점 더 어려지고 다음 세대가 될수록 마초 지수는 낮아지고, 좀 더 젠더 평등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우리는 생각했다. 어쨌든 추세상, 그 때의 예상은 틀리게 된 것 같다. 90년대 중후반을 정점으로, 남성들은 점점 더 여성들을 혐오하고 적대적으로 느끼는 듯 싶다.

 

그리고 지금 고등학생은?

 

이게 전수조사를 해보지 못해서 뭐라고 하기는 그런데, 최소한 여성에 대한 적개심은 일베 수준으로 현재의 고등학생들이 높지 않을까

 

이런 게 일단 작업 가설이고.

 

대안 학교 남학생들은 전혀 다를 듯싶지만, 아직까지 살펴본 바로는, 뭐 그닥.

 

시간만 좀 더 있고, 자금만 여유가 있으면 이건 좀 더 현황 조사를 해보고 싶은데, 현재 상태로서는 곤란하고.

 

90년대 초중반의 유럽과는 지금 한국의 10~20대 의식의 흐름은 좀 다른 듯 싶다는 작업 가설 하나 정도로.

 

청년 경제에 관한 건, 워낙 오래 작업하던 거라서 어느 정도 기초 작업이 되어있는데, 젠더 이코노미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흐름으로 예상했던 거와 다른 추세가 꽤 튀어나온다.

 

어쨌든 책 작업 시작하고 처음으로 목차도 잡지 못하는 상황이 지금 벌어졌다.

 

목차 안 잡고 작업했던 책들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중간에 다음 목차 잡아가면서 썼던 책들이 좀 많이 팔린 책들이었다.

 

그렇지만 일부러 목차를 안 잡지는 않는다. 잡으려고 했는데, 못 잡았던 것일 뿐이고.

 

솔로 얘기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던 책을 세워놓고, 다시 디자인한 경우라서 목차는 걱정도 안했는데

 

하여간 지금 목차도 못 잡고 있다. 결론은, , 당연히 못 잡고 있고.

 

아마도 당분간 더 헤맬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만에 딱 걸린 느낌인데, 대충해서 그냥 밀어내기, 그런 식으로 작업할 생각은 없고.

 

동화책도 재밌는 얘기 하나가 구상 중이었고, 모피아 2부인 교육 마피아 얘기도 한참 구상 중이었는데, 솔로 얘기에 다 밀렸다.

 

그러나 그럴만한 얘기다.

 

서승환 선생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다. 나는 그 양반한테 첫 경제원론을 배웠다. 그 때 편미분이니 전미분이니, 그런 것만 배운 게 아니라 경제학에 임하는 경제학자의 자세 같은 것도 같이 배웠다.

 

강사 시절에도, 작지 않은 격려를 받았다. 별 거 아니더라도, 그 시절에는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평생 잊지 못할 격려가 된다.

 

하여간 지금 그 양반이 국토부 장관인데, 좀 미안한 얘기지만, 이 양반이 너무 편안하게 살았던 거라자기 손으로 부동산 거래라도 한 번 해봤을까 싶은. 현실과 이념의 차이, 그런 걸 너무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여간 그 건으로 나도 좀 느낀 바가 있어서, 현실성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고민을 해보려고 하는.

 

(생각은 그런데, 대부분의 시간은 아직 돌 지나지 않은 아기랑 놀아주고 이유식 먹이고, 똥 기저귀 갈아주는…)

 

이러 고민 하다가 가끔 TV 틀어서 NLL 얘기하는 거 보면, 나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짜증 팍 난다.

 

올해는 되는 일 없다. 그리고 몇 년간 역시 되는 일 없을 듯 싶다.

 

우리들의 영웅은 쓰러지거나 배신당하거나 혹은 배신하거나

 

하여간 나는 헤매는 중이다. 그리고 연전연패 중이다. 그렇지만 눈도 뜨지 않고 무작정 맞고 있는 건 아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무쟈게 맞는 중이다.

 

그렇게 눈이라도 뜨면서 맞아야, 맞아 죽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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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리그, 드디어 즐기기 시작하다

 

1.

요즘 딱 20년 된 대우 프린스 자동차를 주로 타고 다닌다. 문제가 많을 거라고는 생각을 했지만, 삼복더위에 에어컨이 이 정도로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내가 부딪힌 문제는 이게 구냉매라는 걸 사용하는 차라서, 요즘 사용하는 신냉매 위주의 정비소에서는 아예 처리를 할 수가 없다는 것. 진짜 고생고생해서, 구냉매라는 걸 처리할 수 있는, 정말로 서울의 끝에 있는 어떤 정비소를 찾아냈다.

 

기후변화협약 문제를 다루기 전, 몬트리올 의정서가 내가 주로 다루던 문제였다. 프레온 가스로 인한 오존층 파괴에 관한 문제였는데, 한동안 이 문제에서 내가 최전선이던 시기가 있었다. 그 때 죽어라고 프레온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단종시키고, 그 후에도 이 문제의 뒷처리가 미진하다고 총리한테 보고하던, 뭐 그 사안이다. 익숙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실생활에서 이 문제와 내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될 줄이야, 내가 알았나? 구냉매라는 게, 쓰면 안 된다. 그러니까 생산까지 어렵도록 한 것 아니냐? 캐나다 북쪽에서 처음 관찰된 오존층의 구멍, 그건 정말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면 지금은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절대 아니다. 그냥 뭔가 하는 척만 했지, 실제 해법은 아직도 좀 거리가 멀다. 하여간 프레온 가스에서 뭔가 전문성을 보이면서, 내가 밥을 먹고 살게 된 바로 그 문제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여름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냉매를 체워줄 수 있는 곳을 죽어라고 찾고 있던 거라이거 너무 미안한 문제라서, 자동차 문제에는 전문가라고 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도 못해보고.

 

그 후에도 20년 된 자동차는 연속해서 에어컨 문제를 일으켰다. 에바프레스라고 불리는, 에어컨 핵심 부품이 망가져서, 그야말로 전국의 부품상을 총 연결하다시피 해서 하여간 거의 마지막 남은 신품으로 교체를 했다. 당연, 이런 복잡한 얘기에는 이게 끝이 아니라서, 잠시 후 에어컨 벨트에 이어 몇 년 전에 교체했다는 콤프레서까지 문제를. 결국 힘들게 부품들을 구해서 다 교체했다.

 

그 사이에 서울 끝에 있는 카센터를 4번이나 갔고, 거의 폐차장 비슷한 분위기의 가계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간당간당한 핸펀 밧테리를 보면서 애묘인간이라는 카툰을 결국 끝까지 다 읽었다.

 

이 더운 여름, 왜 이렇게 쭈그리고 있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안 들면 내가 사람이겠는가? , 돈이 없어서 그렇다, 그렇게 쉽게 말하기에는 사정은 조금 더 복잡하고. 도대체 이 간단한 에어컨 장비조차 이 정도로 방치시켰던 전 주인에게 원망을 하면 내가 더 비참해 보인다. 선의로 그냥 준 사람을 조금이라도 원망하면, 그게 사람인가?

 

그렇게 결국 몇 주에 걸쳐서 하여간 형식적으로 20년 된 승용차의 에어컨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아직도 다 해결된 건 아니다. 1~2단은 부품 문제로 안 나오고 3단부터 나오는데, 부품 구하려면 폐차장에 가서 이제는 나오지 않는 저항을 구해야 한다는오매,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지는 못하겠다. 어쨌든 문제는 풀었다.

 

그러나오늘 오후,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유아들에게 장난감 빌려주는 시청 뒤의 장난감 도서관에 아내와 아직 돌이 안된 아기랑 같이 갔는데, 차가 덥다고 뒷자리에 앉은 아내와 아기는 결국 쭉 뻗었다. 어쩌란 말이냐!

 

에어컨 성능이 워낙 낮고, 차는 검은색, 복사열은 있는 대로 다 받아들인다, 뭐 그거 외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결론.

 

하여간 아기가 덥다고 뒷좌석에서 쭉 퍼져있는 걸 보면서도,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내가 진짜로 3부 리그에 있구나, 그런 생각이 머리를 띠옹.

 

돈이 없어서 20년된 구형 자동차를 타면서 에어컨 고치러 카센터를 들락날락하는 상황, 이 정도면 3부 리그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2.

처음 낸 책이 1쇄 터는데 3년인가 걸렸던 것 같다.

 

나도 잘 아는 게, 사람들이 내 책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보는, 그런 일은 절대 없고, 뭔가 잘 맞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아니다 싶으면 그냥 처 박는. 그래도 데뷔했던 책부터 지금까지 1쇄를 못 터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여간 그런 일이 벌어졌다.

 

거기에 덧붙여, 나와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하던 일을 접어야 하는.

 

곰곰이 생각했는데

 

, 내가 지금 3부 리그에 있구나그런 걸 느끼게 하는 계기가.

 

3부 리그면 3부 리그답게, 용돈도 줄이고, 생활비도 줄이고, 하던 일의 규모도 줄이고.

 

, 줄였다.

 

그리고 별 돈 들지 않는 허장성세 같은 일들도 줄이고.

 

20년 만인가? 드디어 앰프와 스피커 없는 삶을 꾸렸다. 턴테이블은 벽 한 구석으로 밀렸고, 지금 CD TV에 물려서 듣는다. 그리고 나는 아예 음악을 듣지 않는다.

 

하여간 박근혜를 지지한 사람들이 삶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이 시기, 최대한 줄이고, 아무런 소비도 하지 않는 것, 그게 그나마 정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것 아닌가?

 

3부 리그, 그 단어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3.

솔로 현상이라는 주제를 가진 책을 하나 준비하는 중이다. 일정이 잡히면 보통 일정대로 달리는 편인데, 처음으로 내가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내 이해도의 문제로, 속도를 줄였다.

 

‘88만원 세대를 비롯해서 지금까지 나온 책들은 대부분 2002~2003년도에 했던 생각이나, 그 때 알고 있던 것들을 중심으로 기획된 것들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아주 시간이 지나서 써낸 것, 그게 내 책이다.

 

솔로 현상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아직 결론도 잘 모르고, 중요한 내용들도 잘 모른다.

 

석사 시절이나 박사 시절,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렇게 논문을 썼었다. 책을 쓸 때는, 그렇게 못했다. 이미 아는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런 고민만 했다.

 

경제 대장정 시리즈가 다 그랬고, 그 중의 1편이었던 88만원 세대 때는 더 그랬다. 결론의 톤, 이런 것에 대해서만 죽어라고 고민을 했다. 그리고 제목에 대해서

 

솔로 현상은, 만약 이게 책으로 나오면, 내가 낸 책 중에서 처음으로 내가 몰랐던 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집필 과정에서 정말로 뭔가 새롭게 공부해야만 했던, 그런 책이 될 것이다.

 

그걸 뒤집으면역시 내가 3부 리그에 있는 것 맞다.

 

모르는 얘기를 왜 하고, 모르는 얘기를 왜 쓰려고 해… 3부 리그니까.

 

그렇지만 정말로 결론도 모르겠고, 솔로로 살아간다는 것, 이게 뭔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맬더스가 했던 얘기는, 그러다가 전쟁 난다, 그런 얘기다. 맑스는 그런 식이면 혁명 난다고 얘기했고, 아담 스미스나 케인즈는 알도 못했던 현상이다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생태학자가 한 분 계시다. 그 양반이 대충 한 얘기를 거칠게 내 식으로 정리해보면

 

여자들이 결혼해서 아기 날 생각은 안 하고, 대학원에만 자꾸 오려고 하니, 나라 망하겠다

 

, 원래 표현은 큰 일이야, 큰 일, 그런 감탄사 연발이지만, 모아보면 이 얘기다.

 

그게 한국 1부리그에 있는 남자들이 하는 얘기라고 보아도 좋을 성 싶다.

 

표현의 강도만 조금씩 다르지, 뉘앙스 차이도 없이 완전히 똑 같은, 같은 표현들이 대부분이다.

 

3부리그에서 계속해서 선수 생활을 할지 말지 갈팡질팡하는 내가 풀어볼 수 있는 질문이 애당초 아니다.

 

나도 결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책 작업을 해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로,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내가 3부 리그 아니겠나?

 

잡기 어려운 볼은 잡지 않고, 치기 어려운 볼은 치지 않고

 

형식적으로는 1부 리그이지만 영원히 우리 마음의 번외 리그에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나는 거기보다 한 두칸 더 낮추어야 하는 3부 리그 아닌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할 수 없더라도.

 

솔로 현상에 대한 분석이 나한테는 그런 것이다.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아는 지식으로 해석하기에는 너무 크고 어려운 현상이다.

 

잡을 수도 없고, 칠 수도 없지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그리하여 이제 나는 정말로 3부 리그를 즐기기 시작한 것 같다.

 

돈만 안 쓰면, 생각보다 오래 3부 리그에서 버틸 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분간은 더 게임을 뛰고는 싶어졌다. 뭘 해도 잘 안 되는 3부 리그, 잘 할려고 할수록 더 잘 안 되는 3부 리그, 이제 그냥 3부 리그 게임을 즐기려고 한다.

 

차 에어컨만 잘 나와도 좋겠건만, 그나마도 잘 안 되는 나는야 3부 리그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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