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모르지../새로운 생각은 찰나에 지나가지만'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17.02.02 세상이 좋아질 것인가? 4
  2. 2017.01.19 블로그와 반기문 현상 1
  3. 2017.01.19 토론회 발제문을 쓰고 나서...
  4. 2017.01.16 이재용 구속영장 청구에 관한 생각
  5. 2017.01.08 책과 1차 시장
  6. 2016.12.30 낼 모래면 50이다 1
  7. 2016.12.16 삶의 전환기 7
  8. 2016.10.09 새로운 생각은 찰나에 2
  9. 2015.08.24 블로그를 다시 하려고 한다…. 7

세상이 좋아질 것인가?

난 세상이 좋아지지 않을 걸 알아, 이미 알고 있었다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멋있어 보이기는 한다. 물론 진짜 그런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얘기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세상이 좋아질 것인가? 물론이다. 어렵긴 하지만, 세상은 결국 좋아질 것이다. 지금이라고 말하지는 않겠고, 정권만 바뀌면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결국 좋아질 것이다.

대선이 조기에 시작되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그깐 정권 바꿔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렇게 얘기한다. 그렇게 얘기하는 게, 자신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한다.

방어적 연애와 비슷하기도 하다.

어차피 잘 안 될 줄 알고 있었다니까. 속은 덜 상하다. 그러나 좋아지는 게 있을까? 단 한 번의 연애, 단 한 번의 사랑, 그리고 결국 결혼.

현대자동차 사장을 지냈던 이계안의 삶이 그렇다. 대학 시절 첫 번째 미팅에서 결혼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쭉.

뭐, 그렇다고 해서 그가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그래서 매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도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안되면? 시간이 더 흐르면 잘 될 것이라고, 다시 또 생각을 한다.

대선 국면이다. 누구를 지지하든, 누구를 지지하지 않든, 정책 때문이든, 팬덤 때문이든, 본격적인 경쟁 구도에 들어간다.

모든 후보를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에 임한다.

상황에 따라서, 물어보는 말의 강도와 맥락에 따라서, 별로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난 세상은 좋아질 것이라고 믿고 산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를 둘이나 낳고, 지금의 이 개고생을 안고 살 이유가 없다. 세상은 결국에는 좋아질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모두의 삶이 좋아지고, 모두가 만족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박근혜의 삶도 좋아질 지는 모르겠다. 순실이 언젠가는 행복을 찾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은 좋아질 것이다. 결국에는, 좋아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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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하다보니, 블로그 방문수가 백 만이 넘어갔다.

좀 열심히 쓰던 시절도 있었는데, 한동안 진짜로 정신이 없어서 그냥 방치해둔 시절도 있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어떻게 할 줄을 몰라서 가끔 글을 쓴다. 장기적 계획, 그딴 거 없다. 둘째가 언제 또 아파서 입원할지도 모르는 그런 살얼음판 같은 삶을 사는데, 블로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한 때는 여기도 어마무시하게 많은 사람들이 보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황폐하고, 망조 든 가문의 허물어져가는 대문을 보는 것과 같다.

뭐, 별 상관은 없다.

대다수의 청년들이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어를 외치고 있는데, 독야청청 잘났다고 사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폭망과 이생망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데, 내 인생은 그래도 값지고 보람있었다, 요러고 있는 게,

딱 반기문스럽다.

수많은 이생망들이 블로그에 와서, 똑바로 안하면 블로그 폭파시켜버린다고 할 때, 그 때가 내 삶에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산다.

아주 열심히 살아가는 반기문을 보면서 요즘 배우는 게 적지 않다.

아, 저렇게 하면 저따구로 보이고, 요렇게 하면 요따구로 보이는구나.

<자본론> 전 3권을 통으로 읽어내는 것보다, 반기문 하는 거 유심히 살펴보는 게 배우는 게 더 많을 것 같다.

반기문이 인천공항에서 에비앙을 턱하고 드는 걸 보면서, 탄자니아에서 에비앙을 턱하고 들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 내가 그렇게 보였었겠구나...

아디오스 에비앙, 포 에버...

생수를 마시더라도 동네 가면 동네 물을 마셔야한다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한 때의 영광에 이제는 별 내용도 없어 황폐해진 블로그를 보면서, 그래도 내가 반기문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잠시의 위로를 받는다.

'지나간 곳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영광을 구하지 말지어다, 블로그와 반기문을 교차로 생각하면서 잠시 교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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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 토론회에서 쓸 발제문 쓰고 나니까 2시가 넘었다. 30대 때에는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토론회 발제문을 썼었다. 40대 때에는, 초반에는 좀 쓰다가 나중에는 꾀가 나서, 아예 토론회 참석을 안했다. 바쁘다는 핑게를 댔지만, 핑게는 핑게일 뿐이다.


옛날 서울말로 나이가 50이 되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고 했다.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내가 본 많은 영감들이 나이를 먹으면 지갑은 점점 더 꽁꽁 닫고, 입을 엄청 열었다. 이것저것 사정 아는 처지에, 정말 꼴값이라는 생각 많이 했었다, 내 처지에, 여전히 지갑을 열 형편은 아니다. 미안하니까 입이라도 연다는 건데, 이게 참 꼴값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 나이 되면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살았는데, 딱 그렇게 생겨먹는 꼴이다. 진짜 간만에 토론회 발제문 쓰고 나니, 역시 나도 나이를 먹으니까 지갑 대신 입을 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근혜 말대로,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 들어...


50이 넘으면서 단호함 같은 게 생기기는 했다.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서 움직이고, 보람이 있는 일을 피하지는 않겠다... 내가 생각하는 경제가, 모두가 재미와 즐거움 그리고 보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런 세계이다. 돈 때문에, 의무감 때문에, 그게 좋은 건 아니다. 잠시 그렇게 움직일 수는 있지만, 평생 그렇게 움직이면 삶 자체에 자괴감 외에는 남는 게 없다. 돈이 모든 것을 보상해줄까? 돈은 잠시 행복하게 해주지만, 길게 기쁨을 주지는 않는다. 생물학에서 얘기하는 역치의 법칙 그대로이다. 없으면 티가 금방 나지만, 있으면 조금 더 있다고 해서 조금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돈 없으면 꽝이다, 사회 구성원들끼리 서로 이렇게 얘기하는 사회, 좋은 사회는 아니다. 정상적인 사회도 아니고. 성숙과는 거리가 먼, 그저 순실이 같은 얘들한테 놀림받기 딱 좋은 사회 아닌가 싶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정말로 대한민국이 순실이 놀이터였다. 신나게 놀고, 재밌게 놀고, 딱 털고 나가려는 순간, 그야말로 재수가 없어서 걸린 거 아닌가 싶다.


한국이 빠른 시간에 그렇게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자랐을 때, "돈 없으면 꽝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그런 것을 법칙처럼 모시지 않아도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 그 편이 서로에게 편하다. 돈과 권력이 마법의 열쇠가 되어서 뭐든지 열고 다닐 수 있는 사회, 그렇게 좋은 사회는 아니다. 한국의 상층부, 마법 열쇠 들고 다니는 순실에게는 그냥 훌렁훌렁 열렸다. 그들이 청년에게는, 약자에게는 또 얼마나 단호하게 잘 난 척을 하시고, 갑질들을 하셨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지갑을 열 수 없으면, 입이라도 다물어야지... 토론회 발제문 다시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떠벌떠벌 입을 여는 게 과연 잘 하고 있는 것인가, 다시 한 번 물어보게 된다. 그냥 머리 박고 살면서, 이래라 저래라, 그런 거 절대 안하고, 참견질, 상관질, 조언질, 이딴 거 없는 삶, 그렇게 살고 싶다.


입을 열면, 약속을 하게 되고, 약속을 하면 지키고 싶어지고, 그렇게 되면서 집착이 생긴다. 그리고는 욕심이 생긴다. 되고 싶은 것도 생기고, 이루고 싶은 것도 생기고. 그리고 이런 게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꼴불견이다. 순실이도 자신은 충신이 되려고 했다는 거 아니냐...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이 아예 입을 다물 수는 없고. 어떻게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앞으로 1년간 곰곰히 생각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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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에게 뇌물죄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당연한 일인데, 당연한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게 돌아가던 나라라서 신기할 정도이다.

작게 보면 삼성이라는 하나의 기업에 관한 문제이고, 크게 보면 세습 자본주의로 전락해가는 3세 경영의 문제이기도 하다. 2세든 3세든, 정상적으로 상속세 낼 거 내고 진행되었으면 좀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하면 또 다른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

이건희의 삼성, 그건 크게 보면 공포를 상징했다. 과장되었든, 제대로 보았든, 한국은 이건희를 두려워했다. 미화하든, 칭송하든 혹은 공포에 떨든, 이건희의 삼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삼성 국정원'이 국정원 정보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은연 중 받아들였다.

3세인 이재용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다. 부러워하는 사람은 있을 수도 있고, 시기하는 사람도 있기는 한데, 그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공포가 없으면 실력이 좋아야 하는데, 별로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삼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덩치가 그렇다. 순실이 뭐가 무섭다고, 그 앞에서 덜덜덜 떨면서 아기 취급을 받았을까?

이재용이 감옥가면 경제가 망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이미 한국이 덩치가 커져서, 부패와 조직 비효율로 인한 손해가 당장의 기계적 손실보다는 더 클 것 같다. 이재용이 감옥 간다고 해서, 당장 재벌에 엄청난 변화가 오지도 않고, 갑자기 오너들이 경영에서 손 떼고 전문 경영인 체계로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궁극의 모습은, 오너가 쥐고 흔들면서 불법과 합법의 기묘한 경계를 타는 지금의 모습은 완화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재용의 구속영장이 제대로 처리되면, 그만큼 한국 경제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성도 손을 못 쓰는데, 다른 곳은 어쩔까 싶은, 그런 전체적 교훈이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세 승계, 3세 승계, 세금 낼 거 내고 해라. 그렇게 할 지분이 없으면, 오너로서의 명예만 갖고, 적당치 않은 3세들 황제 경영 청산하고.

상속 자본주의로 한국은 너무 빨리 가고 있었다. 그것에 약간의 브레이크 역할을 이재용의 구속이 해줄 것 같다. 괜히 국민연금 건드리고, 정권과 한 배 타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비즈니스가 잘 되는 건 아니라는 우리의 제도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상속의 경제적 실익과 사업의 성과, 잘 계산해보지도 않고 식구 경영하는 것, 이제 차분히 생각해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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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1차 시장

 

1.

팔순이 다 되는 전병석 선생이 간만에 차 한 잔 하면 좋겠다고 하셔서, 2년 만인가, 다시 차 한 잔 했다. 그 또래의 영감들 중에서 주기적으로 뵙는 분들이 몇 분 있다. 그리고 많이 배운다. 뭘 배울려고 만나는 건 아닌데, 그렇게 오래 산 양반들을 만나면 느껴지는 바가 없지 않다.

 

<데미안>을 처음 읽은 것은 6학년 때의 일이다. 소설이 원래 얘기하려고 했던 거는 잘 이해하지 못했고, 사과 술을 만드는 과정, 그런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만든 칼바도스 같은 사과술이 있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 알았다. 그리고 소설 <개선문>에서 주인공이 칼바도스를 마실 때마다 나는 <데미안>을 처음 읽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독 짓는 늙은이>도 그 시절에 읽었다.

 

<갈매기 조나단>은 중학교 1학년 때 읽었다. 이 두 책을 읽는 순서가 바뀐 것 같지만, 어쨌든 그렇게 읽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조나단 얘기가 그렇게 우아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정말로 재밌었었다. 그리고 다음에 읽은 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건 도저히 이해도 못하고, 왜 보는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내 주변의 여학생들은 정말로 이걸 재밌게 읽었다. ", 베르트르여, 나의 베르트레여", 이렇게 시작하는 시로 독후감을 쓴 친구가, 그걸 다 읽지 못하고 울었던 것은 평생 잊기 어려운 기억이다. 끝까지 읽기도 힘든 저 소설에 감명 깊어하고, 슬퍼하고, 그리고 그걸 동감하는 내 또래 친구들이 그렇게 많다는 데에, 놀랐다. 정말로 놀랐다.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덮고 바로 펄벅의 <대지>를 읽었다. 진짜로 재밌었다.

 

데미안이나 조나단,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책들이다. 그걸 출간한 사람이 전병석 선생이다. 그 앞에 앉으면 세월의 기억이 묵중하게 다가온다. 책을 생명처럼 생각하고, 그 삶을 귀하게 여겼던 양반들의 시절이다.

 

전병석 선생도 경제학도였다. 그 시절에 공부하던 얘기를 하고 싶으시면, 이래저래 나에게 연락을 한다. 그 또래 할아버지들 중에는 직접 아는 분도 있고, 건너서만 전설처럼 아는 분도 있다. 하여간 이 양반이 살면서 지키고 살았던 것은 딱 두 가지라고 하신다. 땅을 사지 않는 것, 주식을 하지 않는 것한국 최초의 주식 전공책도 이 양반 출판사에서 냈는데, 초고를 보니까 자본주의에서 허가된 도박이 바로 주식이라는 생각이 드셨다고팔순이 다 된 지금까지, 그걸 지키고 사신다.

 

그런 삶을 마주 대하면, 배우는 것이 적지 않다.

 

2.

저자로 데뷔한지, 나도 이제 10년은 넘었다. 그 동안에 많이 변했다. 기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변했다. 10년 전에 책 쓰겠다고 하면, 걱정은 하면서도 "어려운 일 한다"고 사람들이 약간은 격려를 해주었다. 지금은 책 쓰겠다고 하면, 인생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약간의 안스러움, 약간의 경멸, 이런 시선으로 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회과학 책이 거의 안 팔린다는 사실 자체는 변한 게 없는데, 약간의 존경심 같은 것도 사회적으로는 사라진 것 같다. 그 영광은 요즘은 웹툰으로 많이 간 것 같다. 만화와 사회과학 사이에 웹튠의 등장과 함께 교차한 지점이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가장 크게 변한 것은 1차 시장에서 2차 시장으로 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차 시장과 2차 시장, 말 그대로 본원적 시장 혹은 선시장과 파생시장 혹은 후시장 사이의 차이이다.

 

예전에 텍스타일에서 파리와 밀라노 관계가 그런 선시장과 후시장 관계였다. 파리 프리미어 비전에서 그 시즌에 유행할 천이 먼저 선보인다. 그리고 1월달쯤, 미처 소화되지 않은 천 혹은 수요조절에 실패한 천이 시즌을 마감하기 전에 후시장으로 나오게 된다. 주로 밀라노에서 열렸다. 유명한 디자이너들은 선시장으로 가지만,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은 후시장으로 갔다. 안목만 뛰어나다면 아직 시즌에 유행하지 않은 천을 대량으로 아주 싼값에 살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이나 중국 같은 개도국을 노리고 저렴한 가격에 크게 한 번 유행을 시킬 수 있다. 별로 틔는 안 나지만 떼돈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내가 알바로 무역 에이전트 비슷한 거 할 때, 선시장에서 후시장으로 넘어가는 트렌드 분석 같은 것을 했었다. 패션 시장에서는 손 뗀지 워낙 오래라서, 요즘은 후시장 구조를 잘 모른다. 런던 등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 폼은 선시장이 나지만, 돈은 후시장이 더 벌기 좋다. 물론 기회 확률을 따지면, 결국에는 비슷해진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책은 1시장이었고, 선시장이었다. 좋은 책이나 읽기 편한 책을 쓴 사람들이 책 시장에서 알려지고, 신문이나 방송으로 진출하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저자 발굴 방식이었다. 유시민도 그랬고, 진중권도 그랬고, 조금은 결이 다르지만 강준만도 그랬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 시절의 맨 끝에 속했다고 할 수도 있다.

 

지금은 책 시장이 1시장도 아니고, 선시장도 아니다. 책으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이 책을 쓴다. 그리고 유명한 사람의 책이라야 그나마 좀 팔린다. 한국의 사회과학 책 시장, 좀 넓게 보면 인문교양을 포함한 '양서 시장', 이 자체가 일종의 파생 상품이 되었다.

 

3.

지난 10, 책 시장과 비슷하게 움직인 시장이 한국에는 또 하나 있다. 정치인 시장이 그렇다.

 

원래 정치는 정치로 유명해지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그 유명을 기준으로 다른 일을 하는 시장이다. 10년 전까지, 한국은 대체적으로 그랬다. 3김으로 대표되는 정치인들도 그랬고, 노무현도 그랬다. 그들이 무슨 방송을 하거나, 책을 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유명해지는 일을 해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민주화의 시절, 한국 정치는 1차 시장이고 선시장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3김 시대 청산'이라고 하지만, 지나와서 보니까 3김만 청산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정치 절차 자체도 청산된 듯하다.

 

지금은 정치를 해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명해진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다. MB가 그랬고, 안철수가 그랬고, 조금 먼저는 문국현도 그랬다. 근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너무 유명한 아버지를 등에 엎고 모든 일을 했다.

 

정치가 정상화된다는 것은, 기초의회나 광역의회, 이런 데에서 성공을 만들어서 유명해지고, 그걸 자산으로 국회의원이 되거나 단체장이 되는 게 일반적인 상황으로 받아지는 것이다. MB가 튀어나오고, 트럼프가 튀어나오고, 장기적으로 보면 좋은 일은 아니다. 지난 10, 한국의 정치도 이렇게 길게 보면 좋은 일이 아닐 것이 일반화되었다. 기초자치단체장인 이재명의 경우는 어떨까? 조금 특이한 경우이기는 한데, 엄밀히 생각하면 자치의 영역에서만 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샌더스 모델과 유사한 점과 상이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4.

책과 정치가 1차 시장이나 본원시장이 아니라 2차 시장, 파생 시장이 되었다는 기이한 공통점을 왜 가지고 있을까? 여러 가지로 설명을 시도해볼 수는 있는데, 딱 찍어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한국의 지식 사회 혹은 엘리트 집단의 재생산 구조에 문제점이 생겼다는 것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엘리트 집단 역시 노후화된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연성화된다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점점 더 딱딱한 지식이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스타가 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어령이 서울신문 논설위원으로, 당대의 주요 소설들에게 시비를 걸던 게 26세이다. 그 뒤에 이어령만큼 똑똑한 사람이 한국 사회에는 태어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만큼 늙어갔고, 그만큼 벽이 높아졌다. 나이와 상관없이, 저자로서 혹은 작가로서 기성 세대에게 당당하게 버틸 수 있는 장치로는 책 만한 것이 없다. 이런 길이 점점 더 막혀간다.

 

젊은 정치인이 지역에서 성공하면서 정치로 유명해지는 것이 어려운 것만큼, 책으로 유명해지기도 어려워졌다. 이게 지금 당장에는 문제가 아니지만, 5, 10년 혹은 20년 후, 이런 장치를 유지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은 분명하다.

 

5.

왜 책을 쓰느냐, 나도 10년 만에 다시 이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재미 있어서 쓴 건 아니다. 10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그럼 돈이 없어서? 10년 전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다.

 

10년 전에는, 내가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생태나 환경 혹은 문화와 같이, 당시에 내가 공부하던 영역은 한국에서 워낙 비주류이고, 좌파 내에서도 소수였다. '비주류의 비주류', 당시 내 위치였다.

 

지금은? 꽤 많은 책을 이미 썼고, 아직도 정리해야 할 것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 물론 해보고 싶은 것과 써보고 싶은 것들이 아직 좀 남아있기는 하지만, 죽을 고생을 하면서까지 그걸 꼭 정리해야겠다는 열정은 이미 남아있지 않다. 나도 그 사이, 이제 나이를 먹었다.

 

10년 전에도 팔릴 것이라는 생각을 안하고, 누군가 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책을 썼다. 그 사이 출판 환경은 더 안 좋아졌다. 안 팔리는 것은, 몇 곱절로 더 안 팔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책을 쓴다고 하면 '쯧쯧', 진짜 신세 망친 사람처럼 사람들이 지켜본다.

 

간단하게 10년 사이의 변화를 정리해 보면

 

안 팔리는 건 똑같은데, 격려라도 좀 받으면서 쓰는 것과, 만류를 무시하고 쓰는 것,

 

딱 그런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 나는 책을 쓰는가?

 

그래서 이 질문에 답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답을 하려고 해봤는데, 양심에 맞고, 논리에 맞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을 가름하기로 한다.

 

잠시만

 

공식적이고 논리적인 대답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속마음은, 한국의 책 시장이 1차 시장이 될 단초라도 생길 때까지, '조금만' 더 버틸 수밖에 없다고.

 

한국이 정상적이 된다는 말은, 책시장이 다시 1차 시장이 되고, 정치가 다시 1차 시장이 된다는 말과 같다. 유명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해서 유명해지는 것, 이게 일반적인 선진국의 정치이다. 우리가 순실이와 함께, 그리고 명박과 함께 겪은 이 이상한 나라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그 동안에, 우리의 정치는 아주 이상해졌다. 정치는 혐오재가 되었고, 정치를 한 사람은 '똥 묻는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미 다른 걸로 유명해진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 그래서 뿌리가 얕다.

 

이런 게 정상적인 된다는 말과, 책이 정상적으로 된다는 것은 같은 과정이다. 동어 반복이기도 하다. 인과의 복잡성이 발생한다. 그렇지만 현상적으로,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을 관찰하게 된다.

 

도매 서점 하나의 부도와 함께, 얕고도 얕은 뿌리를 가진 나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중이다. 정상적인 상황도 아니고, 바람직한 상황도 아니다.

 

책으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이 책을 쓰는 지금의 상황, 사실 악몽과 같은 상황이다. 이 상태를 빨리 극복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게는 '저자'라는 말은, 다른 유명한 나라의 저명한 저술가의 전설 같은 얘기일 뿐이다. 내가 본 태국이 그랬다. 자기 나라에 사회과학이라는 쟝르가 있고, 사회과학 저자가 있다는 얘기를, 내가 아는 태국 교수들이 정말로 부러워했다. 우리의 미래가 그래서는 안될 것 같다.

 

지금의 20~30대 젊은 학자나 저술가 중에서 책으로 유명해지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가 있다. 스위스, 스웨덴, 노르웨이, 인구 천 만도 될까 말까 한 작은 나라들이다. 문화와 학술, 강대국이다.

 

유명한 사람이 정치하는 나라가 정상적이 되기 어렵고, 이미 유명해진 사람들이나 책 쓰는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가 없다. 2017년 한국, 정치든 책이든, 악몽이다. 이 악몽은 빨리 깨어나야 한다. 순실이 패거리가 힘 쓰는 나라, 그 반대에 해당하는 의미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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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모래면 50이다

 

1.

2016 12 29, 진짜로 낼 모래면 50이 될 그런 날이다. 오후에 두 아이 어린이집 하원 시키느라 잠시 주차하고 있다가 문자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황준욱 박사가 오늘 10:50 별세했습니다."

 

그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은 지난 여름에 들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 오지 않았으면 했다고 했다. 나보다 한 학번 위의 선배이다. 같이 공부했고, 같이 축구도 했다. 그는 진짜 마라도나처럼 축구를 잘 했다. 그리고 요리도 잘 했다. 가끔 내가 아이들한테 양 갈비 같은 것을 양념에 재워서 구워주는 적이 있다. 아이들도, 아내도, 아주 잘 먹는다. 그걸 준욱이형한테 배웠다. 유학생 살림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은데, 그 양반은 조금 가격이 싼 양고기를 잘 썼다. 그 때 요리법을 배웠다.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지만, 총리실에도 같이 근무했었다. 거기 있는 줄 모르다가, 진짜로 우연히 만났다. DJ 시절, 전자정부 만든다고 한참 난리칠 때, 전자정부 담당 전문가로 파견 근무 나왔다. 경제 조직론을 그와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후에도 종종 만났다. 황준욱, 그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늘 나에게 뭔가 하자고 했었는데, 나는 늘 별 관심 없다고 했었다. 경제 전문대학원 같은 것을 만들어보고 싶어했고, 혁신형 교육기구 같은 것도 만들고 싶어했다. 나는 그냥, 내가 벌려놓은 일이나마 망가지지 않게 하느라고 늘 정신이 없었고, 새로운 일을 벌릴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전문 대학원은, 이미 만들어본 적이 있다. 한 번 해 본 일을 또 하는 데 그렇게 매력이 당기지는 않았다.

 

아내와 대학생 아들 하나를 두고, 친구처럼 평생을 살았던 선배가 그렇게 떠났다.

 

2.

친구의 초상에 친구들이 모이는 것은 처음 한 경험은 아니다. 내가 가장 친했던, 내 인생의 친구는 벌써 갔다. 명박 시대, 순실의 시대, 이 기간을 거치면서 좋은 녀석들이 참 많이도 죽었다. 그리고 다들 아깝다. 채 피워보지 못한 천재라고, 시간이 가면서 더 아쉬워지는 사람으로 수의사 박상표가 생각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가 아깝고, 그래서 더 많이 보고 싶어진다. 광우병 촛불집회 때, 수의사 한 명이 맹활약 한 적이 있다. 그가 박상표다. 그가 그렇게 유명해지기 전에, 대학로 근처에서 낮술을 종종 했다. 그는 아는 게 참 많았다. 삶을 지고 가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 자살했다.

 

마흔이 될 때에도 생각을 많이 했다. 진짜로 많이 했었다. 그 때는 뭘 해야겠다, 어떻게 살아야겠다, 욕망과 윤리 이런 것들 사이에서 삶을 돌아보는 게 그 시절에 많이 했던 생각이다. 이제 나도 낼 모래면 50, 쉰이 돤다. 막상 이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순간, 떠나버린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상징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50도 채우지 못하고 떠나간 친구들, 나는 뭔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나, 이런 생각도 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진짜로 낼 모래면 50이 되는 날, 친구들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너나 나처럼, 불규칙하게 대충 막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준욱이 형이 먼저 죽다니, ."

 

빈이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한 얘기다. 맞기는 맞는 말이다. 나는 대충 살았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빈도 대충 살았다. 우리와는 다르게, 황준욱, 그는 부지런했고, 규칙적으로 살았고, 진짜로 열심히 살았다. 말도 잘 하고, 잘 생기고, 사람들도 잘 챙겼다. 그리고 축구도 잘 하고공부도 괜찮게 했다.

 

3.

20대 중반 때, 같이 경제학 공부하던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흔한 성씨는 아니지만, 다른 두 친구들에 비하면 희성 축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한 명이 빈, 또 다른 한 명이 옥이었다. 그 시절에는 빈은 결혼을 했었다. 우리는 빈네 집에 가서 밥 먹고, 나오면서 옥이랑 한 잔씩 더 했다. "한국에서 가장 희귀한 성씨는 볍씨", 이런 아재 개그가 우리들에게 따라 다니던 농담이었다. 볍씨가 성으로 있을 리가 없다. 기구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한국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우씨, 빈씨, 옥씨가 파리까지 와서 그렇게 점심, 저녁 같이 먹으면서 어울려 다니는 게 남들 눈에는 기구해보였나 보다. 다들 가는 미국 유학을 안 가고 파리에서 모인 세 명의 희성 경제학도들옥은 변과 결혼을 했다. 희성 시리즈는 아직도 계속 된다.

 

옥은 지방에서 오느라고 늦었고, 빈과 옥의 아내 변, 그렇게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옥은 OECD에 근무하다가 지방대학 교수다 되었다. 빈은, 그냥 민간연구소에서 정년을 맞을까 하는데, 연구소에서 나이 많다고 자꾸 나가라고 해서 고민이 생겼다. 그의 아들은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된다. 우리 집 애들은, 이제 네 살, 여섯 살이 된다. 갈 길이 멀다. 옥은 조금 얌전하게 살았고, 빈과 나는, 대충 살았다. 정열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50을 바라보는 지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대충 산 거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재밌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심통 부리고세 친구는 오랫동안 같이 모이지 못하다가 2년 전부터는 좀 자주 모였고, 자주 봤다. 술도 종종 했다. 옥은 이제 주량이 줄었다. 물론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들 보다는 많이 마신다.

 

우리가 그렇게 몰려 다닐 때, 바로 위의 선배가 황준욱이었다. 아직 결정된 것이 거의 없던 20대 경제학도들의 세상이 그렇게 소박하지만 꿈만은 찬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어느덧 20년도 더 된 기억으로 돌리며, 상가집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 그런 게 50대의 삶이라는 것을 너무 상징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4.

상가집에서 나와서 빈과 감자탕 집에 들렀다. 소주 한 잔 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가기는 좀 그랬다. 50이 되면 걱정이 줄어들까? 빈은 걱정이 없거나, 걱정이 있어도 하지를 않으면서 살았다. 산업은행을 그만두고 유학길에 오를 때, 오죽 걱정이 많았겠나. 내 주변에 산업은행 출신들이 몇 명 있는데, 그 중에 삶이 가장 고달픈 것은 빈이었다. 그래도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지, 그러면서 살았다. 그가 나와 같이 50줄에 들어서면서, 이제는 걱정이 많아졌다.

 

은퇴를 몇 년 앞둔 중앙일보 기자와 만난 적이 있었다.

 

"이대로 정년을 맞는 게, 유일한 꿈이지요."

 

나는 그 얘기를 그냥 흘려 들었다. 중앙일보에서 대충 세상에 맞추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말 하는 정년이라, 그런 약간의 멍멍한 감정 같은 얘기로 들었다. 그는 실제로 정년을 맞았다. 그리고 다시 만났다. 마치 먹고 사느라고 평생 하고 싶은 얘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못했다는 듯이, 진짜로 자유롭게 말하고, 소신 있게 행동했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그래도 조금만 소신을 굽히면 정년을 맞기는 했던 것 같다. 내 주변의 친구들 중에서 안온하게 정년을 맞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빈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산업은행도 그냥 그만두었고, 공부 주제도 진짜 밥 먹고 살기 힘든 화폐론으로 골랐다. 한 때, 그와 나는 같이 화폐론을 전공했었는데, 나는 심장이 떨려서 박사 논문 주제 정하면서, 그래도 최소한 밥은 먹고 살 수 있는 걸로 바꾸었다. 실제로, 그렇게 바꾼 전공으로 밥은 먹고 살았다. 진짜로 자기 하고 싶은 길로 가겠다며 살았던 빈도, 구조조정 앞에서 떨고 있다. 소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심장으로 그냥 직행하는지 모를 정도로 서늘한 마음이 들었다.

 

5.

나에게는 걱정이 없을까? 물론 나도 걱정이 조금은 있다. 아이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어리고, 통장이 그렇게 두둑한 편도 아니다. 누가 돈 준다고 하면, 나는 그게 그렇게 싫었다. 내가 노동으로 벌은 돈 말고는 진짜로 돈 받기가 싫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공짜는 없다. 돈을 받으면, 결국은 몸을 움직이거나, 이름을 팔아야 한다.

 

50, 이제는 살아온 삶보다 남아있는 삶이 현저히 적은 나이이다. 그리고 사회적 삶으로 생각하면, 잘 해야 10, 억지를 쓰면서 길게 버텨야 20, 남아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뭔가 새로운 것을 할 수도 없는 나이이다. 50 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진짜로 위험하다. 하던 것을 반복하거나, 반복하는 게 싫으면 약간 개선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많은 용기를 낸다면, 이미 했던 것들이 전혀 새로운 조합을 만들 수 있다. 여기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처럼 겁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새로운 조합도 하기가 어렵다. 하던 일을 줄이고, 줄일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줄이고, 그렇게 야주 약간의 일에 집중하는 것, 그 정도가 내가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난 평생 대충 살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대충 살려고 한다. 갑자기 내가 열심히 살려고 하면, 말 그대로 '급살' 맞을 것 같다. 무섭다.

 

50년을 돌아보면, 정말로 나는 대충 살았다. 경제학과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연세대학교에 원서를 냈다. 다들 재수해서 무조건 서울대 가야 한다고 했는데, 귀찮았다. 전공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별로 안 했고, 대학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도 안 했다. 공직 초기, 내가 서울대 안 나왔다고 "그래서 너는 바보야"라고 틈만 나면 얘기하던 정부 과장이 있다. '케스케이드형 택스'를 아무리 설명해줘도 이해 못하던 공무원이었는데, 나보러 맨날 바보라고 엄청 구박했다. 그래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고, 좀 안스럽게 생각했다. 나중에 뇌물죄로 감옥 갔다. 지나와서 보면, 전공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고, 학벌은 더더욱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할까? 내가 알던 공무원 간부 중에서 정말로 열심히 살았던 몇 사람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한 명 빼고는 다 감옥 갔다. 내가 하던 일은, 눈 앞에서 현금이 막 움직이는데, 그 돈도 정말로 규모가 컸다. 내가 다루던 예산이 한참 컸을 때 1 5천억이었다. 그 시절, 나와 동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국가의 발전, 산업의 융성, 경제의 효율성, 그런 건 아니었다. 감옥 가지 않는 것, 그걸 1차 덕목으로 정했다. 우리는, 감옥 가지는 않았다. 내 앞에서 이 일을 했던 사람, 내 뒤에 그 을을 하던 사람, 대부분이 결국 감옥에 갔다. 한 명이 감옥에 안 갔는데, 암으로 정말 일찍 죽었다. 그 시절, 대충 사는 것을 몸에 익혔다. 더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더 승진할 수 있고, 더 가질 수 있는 것, 대충 살면서 그런 건 동료들과 수 십년 후의 안주거리로 남겨두는 게 좋다. 그런 게 대충 사는 것이다.

 

앞으로도 대충 살 것이다. 대충 살면 좋은 게, 마음 속에 맺히는 '', 그 딴 게 없다. 어차피 대충 했는데, 잘 되면 정말 운이 좋은 거고, 잘 안되면, 원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에 맺힐 게 없다. 그러면 재미 없지 않느냐? 감옥 가는 것보다는 재밌고, 되지 않은 일을 회상하면서 눈물 흘리고 궁상 떠는 것보다도 재밌다.

 

'가늘고 길게', 어느덧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비는 누에고치 속의 번데기 시절을 겪고 껍질을 뚫고 나오는 과정을 통해 날개가 힘을 얻어서 화려하게 날아오를 있다. 만약 나비가 나오기 쉽게 껍질을 뚫어주면 며칠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근혜가 이런 허망한 얘기를 해서 우리를 대박 웃긴 적이 있었다. 누에고치 속에 있는 건 나비가 아니라 누에나방이고, 누에나방은 못 난다. 사람에게 너무 길들여져서 날지도 못하다. 누에는 하다 못해 새가 덤빌 때 잎파리 뒤에 숨는 정도로 몸을 뒤척이는 것도 못한다. 도대체 뭔 나비 하는 얘기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소리 하는 건지도 모르는 얘기를 근혜는 종종 했다.

 

바로 이 누에가 만든 고치를 사람들이 실로 바꿀 때, '가늘고 길게'가 목표이다. 그리고 그 실로 짠 옷감이 비단이다. 비단실만 그런 게 아니다. 무명이든, 모든 실은 가늘고 길게,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게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천이 되고, 사람을 따뜻하게도 하고, 멋지게도 하고, 그렇게 되는 거다.

 

한 번도 큰 꿈이 없었고, 한 번도 되고 싶은 것도 없이 나이 50을 맞게 되었다. 여지껏 대충 살았는데, 앞으로는 열심히 살겠다, 이거 이상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대충 살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대충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일 모래면 50이 되는 날, 아무 마음도 새롭게 먹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한테는, 이것도 큰 결심이다. 중요한 결심은 물론이고, 소소한 결심도 거의 안 하면서 살았다. 그냥, 소소하게 살아갈 생각이다. 가늘면 길어지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가늘고 길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 원래 쉽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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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전환기


1.

올해 3, 둘째가 폐렴으로 병원에 거푸 입원하면서 내 삶도 많이 바뀌었다. 주변에 정신 없이 널려 있던 일들을 내려놓았다. 어떤 건 정리하고, 어떤 건, 말 그대로 그냥 내려놓았다. 내가 누굴까, 글쎄 그런 어려운 질문을 할 겨를이 없었다.

 

내년 3월이면 다시 봄이 된다. 그 때까지는 아이들과 있을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그리고 둘째가 아팠던 때부터 1년이 지나서도 아프지 않고 넘어가면, 그 때부터는 좀 움직여 보려고 한다. 아프면? 아프지 않을 때까지, 더 붙어 있는 수밖에 없다. 그 때가 되면, 나는 이제 쉰이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시간이다.

 

2.

마흔이 될 때에는 이것저것, 미리 생각을 좀 많이 했었다. 물론 생각한 대로 살지는 못했다. 그냥 정신 없이 시간이 흘렀다. 아이 둘이 거푸 태어나다 보니, 진짜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시간은 쏜살과 같이 지나갔다. 머리 속에 남은 것도, 특별하게 남은 기억도 없다.

 

요즘 1주일에 집밖으로 나가는 것은 한 두 번이다. 가끔은 한 번도 안 나갈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까, 나는 진짜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혼자 노는 걸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은 뻔하다. 젊은 경제학 박사 몇 명을 보고, 영화 기획하는 2~3명의 동료들을 매주 만난다. 회사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을 몇 사람을 만나고, 에너지 쪽의 오래된 동료들을 가끔 만난다. 이래저래, 열 손가락 안 쪽이다.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좀 더 만나려고 하는데, 이젠 다 지방으로 내려가서 서울에는 남아있는 동료들이 별로 없다. 내 차는 벌써 지난 여름 다른 사람에게 줘버려서, 버스 타고 잠깐 갈 수 있는 곳 아니면 이동하기도 쉽지 않다. 이래저래, 그냥 집에 있는다.

 

둘째는 가을이 되자마자 후두염에 약한 폐렴, 겨울이 되자마자 심한 후두염을 앓았다. 그래도 입원하지는 않고 넘어갔다. 큰 걱정 덜었다.

 

살다 보면, 중간중간에 섭섭한 일도 생기고, 서러운 일도 생긴다. 1년 가까이 그냥 집에 있으니까, 별로 잘 기억도 안 난다. 아주 오래된 동료들이 가끔 보고 싶어지기는 한다. 섭섭해서 헤어졌던 옛 동료들에 대한 생각도, 그냥 애틋함만 남는 것 같다. 그래도 억지로 연락해서 보지는 않는다.

 

'이러니까, 내가 이 양반이 싫었던 거야.'

 

보지 않다 보면 애틋해지는데, 억지로 다시 만나서 예의 악의적인 수다스러움을 참으면서 웃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냥 시간이 가면서, 가슴 속에 먼지처럼 내려앉는 것에 불과하다.

 

3.

1월에 책이 나간다. 이번에는 저자 소개를 바꾸려고 한다. 예전에 쓰던 저자 소개는 너무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바뀐 거라서, 지금 와서 보면 주접스럽다. 요즘 감성으로는, 아주 짧고 드라이한 게 더 좋다. 내가 누구냐,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공을 들이는 일이, 요즘은 귀찮다. 그리고 스스로 추접스러워 보인다. 내가 누군가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4.

1월이면 아내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둘째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못 쉬었다. 아내는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하고, 아이를 돌봤다. 아내 힘만으로도 벅차서, 나까지 달라 붙어 있었다. 지난 몇 달, 아이를 돌보면서, 아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나도 시간을 좀 많이 썼다.

 

아내의 연봉은 많이 줄었다. 예전에는 꽤 높은 직급이었는데, 그런 자리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아기가 많이 아팠고, 나도 아내도, 삶의 많은 부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훨씬 단촐해졌고, 조용해졌다. 이 조용해진 삶이, 나는 훨씬 편하다. 뭔가 꼭 해야 하는 일도 없고, 안 하면 큰 일 나는 일도 없다.

 

5.

봄이 되면 뭘 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몇 달 쉬면서 보니까 경제 다큐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지금 내가 벌릴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잘 준비된 경제 다큐 같은 게 있으면 사회적으로 좋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성공시킬 자신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일 자신도 없다.

 

그래서 아직은 뭐, 특별히 생각해놓은 것은 없다. 아기가 아플지, 안 아플지도 모르는 일인데,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건 좀 생각을 해보는 중이다.

 

30대와 40대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더 편안하게, 더 푸근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좀 한다. 내가 피곤해서, 그렇게 못 살겠다.

 

나를 위해서는 더 많이 웃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더 많이 눈물 흘리고, 그렇게 지내고 싶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시간에 맡겨두려고 한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결정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좋든 싫든, 이 겨울, 삶의 중요한 전환기를 보내는 중이라는 것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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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각은 찰나에

 

1.

나이가 50줄에 접어든다. 새로운 생각이 전혀 안 나는 것은 아니다. 아주 가끔, 전혀 새로운 생각을 하기는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생각, 이건 찰나에 지나간다. 혼자 있다 올 수도 있고, 밥 먹다 올 수도 있고, 자려고 누웠다가 올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지겨운 얘기를 들으면서 딴 생각하다가 불현듯, 새로운 생각이 올 수도 있다.

 

새로운 생각이 나기는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찰나이다. 문제는, 그게 언제인지 미리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비를 할 수도 없고, 준비를 할 수도 없다. 그냥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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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다시 하려고 한다….

 

1.

생각을 정리하는 게, 그렇게 한 번에 되는 일은 아니다. 시간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시도하다보면, 잠깐 생각이 정리된다. 물론, 그리고 뒤돌아서면 다시 생각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뭐가 맞는 것인지 뭐가 아닌지, 그런 것들이 늘 선명하지는 않다.

 

어쨌든 이 블로그에 '임시 연습장'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렇게 왔다갔다 하고 덜 정리된 상황에서라도 뭔가 써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서이다.

 

참 열심히 썼다. 이런저런 형식 시도도 많이 해보고, 스타일 시도도 해보고.

 

나름대로는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블로그를 쓰기가 어려워진 것은, 특별한 시대의 흐름이나 그런 변화 문제가 아니라, 아들이 태어난 다음의 일이다. 물리적으로, 진짜로 책상에 앉아 있을 시간 자체가 없었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뭔가 쓰기 위해서는 몇 십분이라도 생각을 정리를 해봐야 하는데

 

이런 된장, 생각을 정리하기는커녕, 기계적으로 자판을 쓸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나서는, 방송 한다고 정신 없었고.

 

다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야당 한 가운데로 들어가, 그야말로 2~3일이면 벌써 길다고 하는 여의도의 시간 흐름에 맞춰 가느라고 아무 생각도 없었다.

 

2.

큰 아이가 며칠 전에 세 돌이 지났다. 정확히 3년이 지난 건데, 도대체 그 동안에 뭘 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뭔가 새로운 얘기를 만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나게 중요한 분석을 한 것도 아니고.

 

커피 마시고 담배 피고, 그리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그것 말고 뭘 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이러다 몇 년 아무 생각 그냥 지나가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3.

그래서 매일은 아니더라도, 2~3일에 하나씩은 글을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물론 엄청나게 분석적이거나 공을 들이는 글을 쓰기는 어렵다.

 

그래도 뭔가 정리를 하지 않으면, 점점 더 삶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 것 같은 두려움이 잠시.

 

그래서 블로그를 다시 해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엄청난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공들인 그런 걸 할 생각은 아니다. 그럴 능력과 형편도 안된다.

 

그렇지만 약간이라도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내가 내 삶을 사는 것 같지 않아, 참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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