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올라오는 고속도로 안에서 간만에 동사서독 노래를 들었다. 밖은 어둡고, 차들은 질주한다. 그 안에서 진공 같은 느낌이, 그리고 가슴이 찡해졌다. 오랫만에 가진 깊은 회한 같은 것이다. 눈물 날 뻔 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다음 날 영화를 다시 보았다.

 

______________________

 

오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민은 많이 했는데, 유학가기로 결정하는 순간은 5분도 안 걸렸다. 영국으로 가고 싶었는데, 아무리 주판을 때려도 견적서가 안 나왔다. 프랑스로 유학가는 결정도 5분도 안 걸렸다. 아무리 고민을 많이 해도, 결정하는 순간은 5분도 안 걸린다. 50살.. 난 많은 걸 결정하면서 살아온 듯하다. 동사서독, 다시 봤다. 그리고 알았다. 난 무엇을 사랑할 것이냐, 이 결정을 아직도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좋았던 것 같다. 실무적인 것, 행정적인 것, 기능적인 것들, 대부분 나는 5분 안에 판단하다. 그리고 번복한 적도 거의 없고, 후회한 적도 없다. 내가 결정을 내렸을 때, 나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내 주변 사람들이 했던 말 중에서 나의 마음을 움직인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능일 뿐이다.

 

삶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로 마음 먹고 사랑하고, 이것이다 결정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이재영이 죽고, 노회찬이 죽었다. 그래도 나는 즐겁게 살고,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농담을 던질 것이다.

 

엇갈리는 인연과 사랑, 그것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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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11월호, 지승호 작가와의 인터뷰..

 

https://blog.naver.com/personnidea?Redirect=Log&logNo=221380093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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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 얼로운>, 겁나게 유명한 책이다. 저자 로버트 퍼트남 교수를 만나서 차 한 잔 할 기회가 생겼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닌데, 나름 최근에 생각하는 얘기들을 해서 나도 좀 얻어들을 기회가 생겼다. 한국의 비슷한 사례와 우리 문제 얘기도 좀 하고.

 

점쟎고 엄청 똑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위시컨신 교수가 된 한국 제자 얘기를 길게 했다. 나도 마침 위스컨신 출신들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기도 해서, 이래저래 인연이 겹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88만원 세대> 쓸 때는 <볼링 얼로운>을 못 읽었고, 나중에 퍼트남 얘기랑 내가 한 얘기가 비슷한 얘기라고.. 동료 사회학자들이 얘기해줘서 알게 되었었다. 최근에 낸 책은 교육에 관한 얘기라고 알고 있었는데, 교육만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것에 대한 얘기라고. 들어보니까 진짜 그렇다. 나에게도 흥미있는 주제였다.

 

(나중에 신문사에서 기왕 만난 김에 대담도 하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일정이 안 된다.. 어쨌든 나름 좋은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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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심사가 뒤틀리고, 속이 배배 꼬이는 경우가 있다. 남이 뭘 좀 잘 되면 괜히 심통나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심통내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해서 더 속상해진다. 요 몇 달, 그런 게 없었다. 누가 잘 되면, 그런가보다, 누가 엄청 운이 좋았다고 해도,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몇 달 정도 그런 건데, 태어나서 이렇게 긴 기간 심통나지 않은 것은 나도 처음인 것 같다.

 

첵 원고 오늘부터 고치기 시작한다. 일단 마음부터 편하게 먹고. 요즘 진짜 내 삶은 걱정이라는 게 없다. 내가 제일 못하는 게 심통 덜 내는 거였는데, 요즘은 심통도 없는 것 같다. 늘 책을 쓸 때에는 감정이 올라와있는 상태였다. 요즘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감정을 없애고, 지우려고 한다. 무덤덤하게.. 그래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최대한 가볍게, 참을 수 없을만큼 가볍게.. 요번 교정의 목표다. 무거운 건, 버리고 간다. 웃길 순 없어도 가볍게 할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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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설명을, "뭐든 만들어야 산다"에서 "뭐든 만들어야 입에 밥이 들어간다"로 고쳤다. 나도 살고, 죽을 경계는 이제 좀 넘어선 것 같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나에게 의뢰가 오는 것들이 있다. 요즘 나에게 오는 것들이 상당수는, 진짜 난이도 엄청 높고, 성공 확률은 아주 희박한. 하다하다 안 되니까 나에게까지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 싶다. 쉬운 것들은 나에게 오지 않는다.. 나도 굳이 쉬운 것에 손 댈 이유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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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폐렴을 앓지 않은 것은 올 봄이 처음이다. 그 동안에 내 삶은 많이 바뀌었다.

 

요즘 누가 어떻게 지내냐고 하면,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다고 한다. 속상한 일이나 기분 상하는 일이 없냐, 그렇지는 않다.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다 잘 되고, 여기저기 뻥뻥 터지고, 뭐 전혀 그렇지 않다. 그냥 밥 먹고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다. 그렇지만 아이가 이제 급하게 아플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속이 진짜로 편하다. 세상에 이것저것 심통나고 힘든 일들, 애 아픈 거에 비하면 그건 걱정도 아니다. 안 되면 돌아가고, 힘들면 그만하고, 재미 없으면 때려치고, 간단한 솔류션들이 존재한다. 그게 싫어서 머리 디밀고 죽어라고 버티는 것 아닌가? 그런 종류의 고민은, 아이가 아픈 걱정에 비하면 걱정 축에도 못 들어간다.

 

 

 

가끔 애들하고 운동장에 가는데, 오늘 처음으로 둘째가 골키퍼가 아니라 진짜로 공을 찼다. 댕굴댕굴 구르다가, 진짜로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공도 찼다. 어, 괜찮은데. 자기도 차고 나서 엄청 기분 좋아한다. 원래 공놀이가, 잘 되면 재밌다. 잘 안 되도, 그래도 재밌다. 공 굴러가는 것 자체가 사람을 즐겁게 한다.

 

둘째 슛하는 거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 살면서 진짜로 행복하고, 아름답다, 그런 느낌이 들 때가 몇 번이나 있겠나 싶다. 나도 비싼 거, 맛있는 거, 많이 먹어봤지만 그렇다고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낯선 여행지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기 어렵다.

 

가을이 깊어간다. 이 시간이 얼마나 갈지 나도 모른다. 지금 나는 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굳이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잡는다고 잡아질 것도 아니다. 행복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알지만 그렇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다.

 

엎어지면 쉬어간다고 한다. 나는 엎어진 김에 아예 자리 깔고 살림을 차렸다. 행복은 그곳으로 자기가 찾아왔다. 높은 거, 멋진 거, 훌륭한 거, 대단한 거, 그런 것들과 행복이 같이 가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화려한 거, 값진 거, 갖고 싶은 거, 그런 것들이 아름답지는 않은 것 같다. 가끔, 너무 값나가는 화려함은 재수 없다. 가장 큰 아름다움과 행복은, 일상에 있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찰나가 너무 짧을 뿐이다.

 

(캐스퍼 렌즈는 형편없는 조리개값으로 인해 다루기가 어렵다. 실내에서도 거의 못 쓰고. 그래도 가볍고, 상대적으로 휴대가 쉽다. 그야말로 딱 한두 장을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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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노회찬 부탁으로 강연도 참 많이 했었다..)

 

 

어제 정의당 강의는 경기도 당원들 대상으로 한 당원교육이다. 움직이기 싫어서 거의 꼼짝도 안 하는데, 정의당 경기당 당원교육까지 간 건, 진짜로 노회찬 이후로 마음이 너무 짠해져서 그렇다. 어차피 해주기로 한 거, 가장 최신 얘기로 정성스럽게 준비할 생각이었다. 비슷한 때 광주 정의당에서도 강연 부탁이 왔다. 같은 내용으로 할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성이라는 것은, 가장 최근의 얘기, 다른 데서 아직 발표하지 않은 내용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던 얘기를 가지고 하면, 폼도 나고, 준비도 쉽다. 아니, 준비랄 게 없을 경우도 많다. 그래도 늘 하던 얘기라서, 빠다 바란듯이 미끄럽게 넘어간다. 나는 이런 것을 싫어한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한 얘기 또 하는데, 이게 무슨 녹음 테이프냐 싶은 생각이 든다. 하던 얘기 또 하는 것을 계속 반복하는 건, 진짜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강연을 처음 시작할 때, 내가 나한테 했던 약속이 있다. “같은 강연은 안 한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 거칠지만 그 때 새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들을 가지고 얘기를 했다. 원래의 주제와 새로운 생각, 이런 것들이 섞였다.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진짜로 고로운 일이지만, 길게 보면 그게 도움이 된다.

 

시간이 흘러서 사람들이 파워포인트를 쓰기 시작했다. 금강기획 같은 기획사에서도 아직 파워포인트 도입하기 이전 시절부터 나는 파워포인트를 썼다. 수학식 하나하나 다 에미네이션 걸고, xy축에서 지시선, 방향선, 전부 날려오는 짓을 했다. 그게 96, 97년이니, 나도 좀 난리부르스이기는 했다. 사장단 회의에서는 그렇게까지 할 시간은 없었고, 부사장단 회의에서는 그 난리를 쳤다. 그렇지만 그게 내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UN 시절에도 파워포인트 썼다.

 

사실 강연하는 입장에서는 파워포인트가 훨씬 편하다. 한 번 만들어 놓고, 그냥 조금씩 고쳐서 때우면 된다. 그리고 좀 시간이 지나다 보니, 만들어 놓은 걸 가지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면, 거절하면 된다. 더 편하다. 그러나 했던 걸 또 하는 일이 벌어진다. 나는 가장 최근의 내용 그리고 아직 얘기하지 않은 걸 가지고 얘기하지 않으면, 내가 부디낀다. 뭐 하는 짓이냐, 시방.

 

그렇다고 매번 파워포인트를 만들 수는 없다. 간단하게 해도 하루는 넘어간다. 그래서 결국 내린 결론이, 안 한다.. 돈이 필요해서 강연을 한다고 생각하면 내가 견딜 수가 없다. 그래도 그렇게 막 살지는 않았다. 맨 앞에 서서, 가장 힘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했지, 돈도 필요하고, 에 또, 이렇게 생각하면서 산 적은 없다. 또 강연비를 받아야 할 정도로, 그렇게 생활이 궁핍한 것도 아니다.

 

정치인 중에서 내 강의를 가장 처음 들었던 사람은 노회찬과 단병호였다. 수많은 사람에게 강의를 해주었는데, 그래도 선생격이라고 꼬박꼬박 인사하는 사람은 단병호 정도였다. 노회찬은 친구 같은 처지라서, 들었니 말았니, 그럴 처지는 아니고. 대학교나 대학원에서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나, 같이 스터디하던 후배를 제외하면 가장 많이 강의를 들은 사람은 정세균과 원혜영이다. 국감 때 정세균 외국 갔을 때를 제외하면, 개근했다. 안 불렀는데도 가장 많이 왔던 사람은 진선미와 박병석이었다. 그 때는 그냥 판서했던 때도 있고, 파워포인트 만들었을 때도 있다.

 

회사 사장들 강연 부탁도 많이 왔었다. 한 번은 진짜로 전경련 회장단 강연 부탁이 왔다. 고민하다가 할까 했다. 일본에서 하라는 거라서, 일본 정도는 나도 갈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니미럴.. 골프장에서 골프치다가 하라는 거다. 골프 안 치는데요? 그냥 치는 척만 하시면 돼요. 싫은데요. 그래도 이런 기회가.. 그래도 싫어요. 안 했다. 대통령을 만나라고 해도 골프 치면서, 안 한다. 남들한테 골프 쳐라 마라, 이러지는 않지만, 나는 안 친다.

 

강연이,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명박이, 순실이, 이런 애들이 황당하게 하고 있을 때에는 그래도 조그맣게라도 모여서 서로 고민하고 하다못해 고통이라도 나누는 게 중요했던 것 같다. 그 때는 나도 전국을 돌아다녔다. 갔다왔다, 차비 빼면 진짜 내 돈이 더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시대를 같이 버티고 이겨내는데, 뭐라도 도움이 되면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시간은 변했다. 다시 니 편, 내 편 갈리기 시작한다. 굳이 나까지 나서서 이 편, 저 편,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생각을 만들고, 시대의 최전선에 가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분석하고 분석한 내용을 정리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타협점을 찾았다. 책 나오면 하는 의례적 강연이나 신세진 사람이 하는 부탁, 그 정도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눈 오는 겨울, 더운 여름에도 아무 것도 안 하기로 했다. , 가을로 피하기 어려운 강연 몇 번, 그게 내가 찾은 타협점이다. 물론 시민운동 차원에서 하는 건, 돈 받지 않고 내 돈 내서라도 한다. 사회과학 특강 같은 것은 정말로 무료로, 가끔은 맥주 한 잔씩 사기도 하면서 했었다. 그런 게 시민운동 차원에서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지금은 애 둘 보면서 뭔가 하는 처지에 당분간은 힘들다.

 

그리고 파워포인트 만드는 일은 안 하기로 했다. 귀찮아서가 아니다. 판서가 더 좋은 강의 방식이라서 그렇다. 그 때 그 때 중요한 일, 아직 하지 않은 얘기를 전부 정리하는 게, 꼭 새로운 얘기를 위해서 좋은 방식은 아니다. 그러면 라디오 같은 매체는 전부 죽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라디오도 얘기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데 좋은 방식이다. 그래서 팟캐스트라는 매체가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부 보여줘봐, 시각형 정보가 전부는 아니다.

 

지난 주 토요일날 정의당 당원교육은 그렇게 생각한 첫 시도다. 마침 칠판이 있다고 했다. 몇 년 전에는 칠판 놓고 강의하면 칠판 3번 정도는 새로 썼던 것 같다. 내가 정렬적이던 시대다. 그렇게 판서하면서 눈사람형 경제니 8자형 경제 같은 개념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제는 나도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강의 준비하면서 판서 분량으로 1장 정도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개념 10개 정도 썼는데, 끝난 것 같다. 그 대신 설명을 많이, 길게 했다. 파워포인트 20, 30컷 만들어 놓고. 시간 맞추기 위해서 막 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개념 열 개가 안 된다. 그리고 새로 분석하거나, 새로 알게 된 것은 한두 개 밖에 안된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사실 한 개 분량도 안 되는 경우도 있다.

 

11월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것도 안 한다고 철썩 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뭐가 뭐가 엄청나게 온다. 돈 많이 준다고 하는 게 오면, 사실 나도 흔들린다. 마침 또 그렇다. 그래도 그냥, 힘들다고 하고 말았다. 새로운 얘기나 새로운 분석을 계속 만들지 않으면, 시대는 퇴행으로 간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 그게 인간의 2대 욕망 중 하나라고 프로이드가 말했다. 타나토스라고 부르는, 죽음의 욕망이 후기 프로이드의 2대 축 중의 하나다. 계속해서 변화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하는 것, 이걸 프로이드는 에로스에 속한 영역이라고 했다. 20대 초, 나는 타나토스보다는 에르스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타노트>는 그 후에 나왔다. 같은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그 시절 베르베르는 매우 프로이드적이었다.

 

강연도 요즘은 상업화 정도가 아니라 산업화가 되었다. 강연산업에서 강연자의 수명을 보통 2년 정도로 본다는 것 같다. 2년이면 한 얘기의 수많은 변주도 거의 다 끝나고, 인기도 떨어지고. 물론 그걸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도 새로운 것을 만들기는 하는데, 그것까지 포함해서 평균적으로 2년이라고 본다. 내가 처음 대중 강연한 것부터 치면 15년 정도 된 것 같다. 강연 논리 그대로 따라가면 2년 후에 아주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내가 성격이 지랄맞아서 이렇게 저렇게 했던 결정들이, 우연이지만 아주 나중에 산업적 논리와 분석과 맞추어 보니까 내가 내린 선택들이 맞는 것 같다.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결국은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많은 시간과 많은 집중을 필요로 한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겠지만, 나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다.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하고, 계속 관찰한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시간 많이 들어간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지 않는 것, 이게 내가 지키려고 하는 딱 하나의 명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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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민주주의, 에필로그까지 끝냈다. 이제 내가 쓸 글은 다 썼고. 나중에 수정 다 끝낼 때쯤, 아주 짧은 서문 하나만 쓰면.

지난 2년 동안, 나는 내가 살아오던, '습'이라고 하는 많은 것들을 버리기 위해서 애 쓴 것 같다. 버린다고 버려지지 않는 것들도 많다. 빈도도 줄고, 강도도 줄었지만, 여전히 술 처먹는다.

사는 건 많이 편해졌다. 애들도 그나마 좀 커서, 어린이집 데리고 가고 오고, 엄청 편해졌다. 통장도 편해졌다. 아내 버는 돈으로 생활비는 된다. 내 인세도 작은 돈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 지난 달에 예정에 없게 차를 사느라고 돈이 좀 나갔는데, 그 사이에 빈 자리가 대충 찼다. 워낙 내가 쓰는 돈이 없으니까, 그냥 적당히 살고, 적당히 참으면 그만이다.

책 한 권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잡으면, 큰 책이든 작은 책이든, 거기에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털어넣는다. 물론 그래도 제대로 못 털어넣었다고, 나중에 후회하게 되기는 한다.

직장 민주주의는 잔고 걱정하지 않게 된 이후로 첫 책이다. 아마도 국가의 사기와 직장 민주주의를 경계로, 나의 책 세계도 좀 바뀔 것 같다. 국가의 사기가 잔고 들여다보던 시기의 마지막 책이고, 직장 민주주의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시절의 첫 책이다.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은?

책을 계속 쓸지, 이제 그만 쓸지, 좀 생각을 했다. 돈 때문에 책 써야하는 상황은, 그걸 약간 즐기기도 한 것 같지만, 별로 계속 하고 싶지는 않다. 왜 책을 쓰는가, 생각을 지난 2년간 많이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딱 우리집 생활비 만큼은 당분간 계속 책을 쓰기로.

누군가 책을 쓴다고 마음을 먹을 때, 어느덧 내가 기준점이 되었다. 나는 엄청나게 팔리는 분야의 책을 쓰는 것도 아니고, 뭔가 크게 유행이 되기 어려운 주제를 주로 다룬다. 그 대신, 꾸준히 한다.

초창기에는 밤 그것도 12시 넘어서 주로 글을 썼다. 그리고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잠깐씩 눈 붙이는 거 말고 며칠씩 계속 쓰기도 했다. 옛날 일이다.

요즘은 주로 오전에 애들 어린이집 보내고 나서 쓴다. 보통 2시간, 많으면 3시간, 그리고 땡이다. 오후에 한 번 더 자리에 앉기를 매일 바라지만, 그런 날이 별로 없다. 그리하여..

강연, 방송 기타 등등, 11월 이후로는 일단 종료. 오후에 두 시간 정도 더 책상에 앉아있는 것과, 그래도 나가면 몇 십만 원은 받는 것 사이를 비교하며, 주변에서 이러면 안된다고 나에게 말해준다.

됐슈.

먹고 살만혀유. 만드는 시간과 파는 시간의 균형, 그딴 거 필요없다. 모든 힘은 만드는 데에 집중. 시간 나면, 더 새로운 거, 더 극한의 것, 안 해본 얘기, 여기로 투입. 간단한 원칙.

안 팔리면, 더 잘 만든다. 그래도 안되면? 그럼 진짜 더 잘 만든다. 그것도 실패하면? 그 때 안 만들어도 된다. 아직은 그 때는 아니다.

문체, 문장, 이런 거 신경 쓰던 시절도 있었다. 이젠 그런 것도 아 잊었다. 무슨 얘기, 누구 얘기 할 거냐, 이게 다다. 재미없는 얘기에 문체니 문장이니, 의미 없다. 별로 관심가지 않는 사람 얘기, 그 얘기를 하지 않는 게 낫다.

장식, 필요 없다. 한 페이지가 아까워서 가뜩이나 고밀도로 압축하는 중인데, 장식 달 여유 없다. 독자가 숨쉬면서 넘어갈 공간, 필요 없다. 내 책은 꼭 필요한 사람이 보는 거고, 그 꼭 필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얘기를 채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면 그만이다.

불어로 portee라는 단어가 있다. 그런 말은 영어에도 없고, 우리 말에도 별로 안 쓰는 말인데, 철학 등 이론에서 현실적으로 많이 쓰는 중요한 단어다. 사정거리 정도 된다. 이게 쏘면 얼마나 멀리 나가는 것이냐.. 나는 그 사정거리를 최대로 키우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왜?

안 그러면 내가 지금 책을 쓰고 있을 이유가 없거던. 볼 책도 많고, 볼 영화도 많고, 놀러갈 데도 많고, 이 나이가 아니면 하지 못할 일도 많거던.

하여간 이런 마음으로 꾹꾹 눌러서 내 책 중에서는 가장 사정거리가 긴 책을 마무리했다.

쓰면서 이런 정도는 나도 생각했다. 내가 언제까지 책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직장 민주주의 책 이전과 이후로 나뉘겠구나 싶은..누가 그렇게 봐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변했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변하면, 내가 하는 일이 바뀐다. 당연한 얘기다..

하여간, 며칠이라도 당분간 좀 놀아야겠다.

 

 

(직장 민주주의 에필로그에 윌리엄슨을 인용했다.. 사람 이름 최소로 쓰려고 했는데, 정말 최소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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