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가끔은 기도한다...)

 

1.

살면서 지켜 본 아내는 참 강한 사람이다. 대충대충 살아온 나보다는 몇 배는 더 강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더 강하다. 그리고 인정사정 없다. 부모 사정 같은 건 봐주지 않는다.

 

몇 주 전 일요일 밤이다. 아내가 정말로 '엉엉' 소리내면서 크게 울기 시작했다. 이제 일곱 살이 된 큰 아이는 이것저것 해달라는 게 너무 많아졌다. 그리고 말도 잘 안 듣는다. 다섯 살 둘째는 말 듣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두 아이가 같이 있으면 2배가 아니라 3승 아니 4승으로 힘들다. 아내는 30분이 넘게 울었다. 두 아이는 결국 손 들고 벌섰다. 아이들도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은 거대한 울음 바다가 되었다. '행복한 우리 집'의 화목했던 일요일 밤의 모습이다.

 

나 때문에 아내가 운 적이 몇 번 있기는 하다. 100%, 내가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간 날의 일들이다. 그래도 그렇게 크게 우는 걸 보기는 처음이다.

 

"엄마가 너네들한테 뭘 잘 못 했니?"

 

울다가 아내가 꺼낸 말이다. 애들은 영문을 모른다. 나도 울고 싶은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다. 그러나 운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그리고 아내가 별 거 하지도 않고서 티 낸다고 놀릴 것도 무서웠다. 왜 나는 애들을 이렇게 열심히 볼까? 별 다른 선택이 없어서 그렇다. 아이들이 늦게 태어나서 외가든, 친가든, 좀 더 아이들을 보는 것 자체가 무리다. 장모님이 많이 도와주신다. 그래도 숨이 턱턱. 아이 둘 볼 때, 둘이 보면 둘이 다 뻗고, 셋이 보면 셋이 뻗고, 넷이 보면 한 명이 좀 쉴 여유가 생긴다. 누군가 놀러 와서 네 명이 볼 여유가 생겼을 때, 아이들은 두세 배로 늘어난다. 국가도 더 이상 도와주지는 않는다. 시장에 지원을 받기에는 내가 "도니가 음따". 그리고 마을 공동체 혹은 육아 공동체, 그런 건 너무 멀리 있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어른이 되지 않았다고 무시하는 전통이 우리 나라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평등 사회를 못 만든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의미, 그거 순전히 꼰대적 발상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성숙해가는 느낌 보다는, 내가 해체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왜 해? 방법 없잖아. 진짜로 나는 하루하루가 내가 해체되는 것 같았다. 조폭들 용어로는 그걸 인수분해라고 하는 것 같다. 조직에서 밑의 부하들이 강제로 다 떨어져나간 중간보수들을 인수분해 당했다고 한다. 죽이지는 않고, 그냥 혼자 있게 고립시키는 작전이다. 영화 <신세계 (2021)>에서 인수분해 되었던 장이사가 뭘 좀 해보려고 하다가 정말로 죽게 된다. 인수분해, 진짜 찰 지게 나왔던 대사였다.

 

2.

50, 내 위에 아무도 없고, 내 밑에 아무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어머니, 아버지 등등 내 위에도 한참 많다. 내 밑, 굳이 따지자면 고등하교 후배, 대학교 후배, 기타 등등, 엄청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내가 50이 된 지금, 그들이 내 밑일까? 그런 위계가 새삼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몇 년 전까지, 나도 식구 같이 지내던 한 편들이 있었다. 그리고 위, 아래,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형식으로는 칼 같이 지켜지는 세계에 속해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 진짜로, 문자 그대로, 내 위에도 아무도 없고, 내 밑에도 아무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의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이러한 삶을 만든 것일까? 나는 별 생각 없이 산다. '인수분해' 된 것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리하여 21세기 들어서, 나는 처음으로 평등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평등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평등 안으로 밀려들어간 것이 조금 더 정확한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일을 한다. 그리고 혼자 일하지는 않는다. 내 주변에는 많은 동료들이 있고, 적지 않은 친구들이 있다. 애 보다가 잠깐 잠깐 만나서 고민하는 사이라서, 대부분의 관계가 임시적이기는 하지만, 누군가의 주도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우리들 사이에서 평등을 내 건 적은 없다. 우리는 나중에 그걸 '오대오'라고 불렀다. 누구나 5의 역할을 한다. 물론 상징적이다. 애 보면서 움직이는 나는 '깨꿈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실제로 5의 기여도 못한다. 그냥 오대오라고 불렀다. 누가 5인지는 모른다. 그냥 5.

 

좀 멋있게 표현하면 우리가 살았던 80년대 혹은 그 이전의 관계를 수직적 위계 관계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게 군대와 교회다. 현대 조직론에서는 그렇게 분석을 한다. 물론 군대와 교회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같은 수직적 위계 조직이지만, 교회에서는 말단에 있는 신도들에게도 예수처럼 되라고 한다. 군대에서는 하급 병사들에게 장군처럼 되라고 하지는 않는다. 좀 더 솔직하게, 그냥 장군님을 본 받으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군대와 교회만 분석하면 군대가 조금은 더 모던하다. 평등한 군대를 상상하기 어렵듯이, 평등한 교회도 상상이 어렵다. 그래도 군대에서는 천천히 인권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교회는 군대보다 인권에 대한 얘기가 더 어렵다. 절도 마찬가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우리 니라의 기업은 일제의 영향을 받아서 군대식 조직 위해 자신의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 몇 개의 기업이 군대 조직 위애 교회 모델을 덧붙였다.

 

70년대와 80년대, 지난 20세기 후반은 사회의 군대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대형 교회가 등장한 이후, 사회의 교회화가 진행된 것 같다. MB가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 이후, 우리의 전면적인 사회의 교회화와 함께 21세기를 맞았다. 할렐루야! 하나님 밑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 밑에는 목사님이 계시고, 그 밑에는 장로님과 권사님이 계시고, 그리고 다시 그 밑에는 집사님이 계신다. 중간에 아직 목사님의 위대하신 위계까지 올라가지 못하신 전도사님이 계시다. 그리고 우리는? 평신도 아니면 아직 회계하지 못해서 영혼이 지옥의 저승불 어디론가 갈 죄 많은 양들이다, 아멘.

 

인류학에서는 이걸 사냥꾼과 채취꾼 모델로 나눈다. 여기서부터는 머리 아프다. 남자는 사냥을 담당하고, 여자는 열매를 모으고 일을 하는 채취를 담당한다. 그렇다면 사냥과 채취, 누가 더 시원 사회의 경제에 더 기여를 하였느냐, 이런 걸 따지면 경제인류학이나 생태인류학 같은 것들이 나온다. 그리하여 "도대체 남자는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는 현대 인류학과 페미니즘의 질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냥꾼의 후예이거나, 채취꾼의 후예가 된다.

 

이도 저도 싫어서 혼자 있는 사람은? 왕따다. 49년을 사냥꾼으로 살았던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인수분해된 이후로 수렵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왕따가 된다. 그렇지만 일찍이 헤겔이 말했다. 주인과 노예 중에서 진짜로 진리를 얻어서 자유롭게 되는 사람은 노예이고, 내 몰린 사람이라고. , 헤겔 만쉐이! 왕따가 되고서야, 나는 21세기의 지평선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 평등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나 적당히 세 끼 먹고 살다가, 때 되면 떠나게 되는, 그 존재론적이면서도 본질적인 평등이 있다. 예수가 말하지 않으셨던가. 먼저 온 자 나중 되고, 나중 온 자 먼저 된다고. 성경에 있는 말이다.

 

3.

나는 내가 누구인가, 그런 질문을 20대 이후로는 계속 했던 것 같다. 독일 성찰학파의 출발을 만든 질문이다. 나는 그런 질문이 되게 중요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자 아이 둘을 데리고 50줄을 넘으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인가는 지금 하나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몇 시에 어린이집에 갈 것인가, 토요일 저녁 메뉴는 뭘로 할 것인가, 일요일 점심은 뭘 만들 것인가, 이런 것만 중요하다. 나머지는? 일단 아이들 저녁에 재워놓고 생각하자.

 

50이 되면서, 내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하나 생겨났다. 사회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 아니면 하기가 싫어졌다. 물론 별로 의미가 없는 일도 있을 수 있고, 별로 재미가 없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이지만 참고 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나에게 다 마찬가지인 것은, 어떤 일을 하든, 조각난 시간에 잠깐 일을 하는 나에게 많은 돈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과 관련된 일, 한국에서는 영혼을 팔 거나, 양심을 팔 거나 아니면 24시간을 전부 팔지 않으면 괜찮은 돈을 주지 않는다. 49을 넘으면서, 그 표현이 정중하든 혹은 직접적이든, 아니면 남을 통해 넌지시 말하든 "너 말고도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비겁하니까, 속으로만 "그러세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50에서 한 발씩 한 발씩 걸어갈 때마다, 군대나 교회 혹은 그렇게 생긴 조직에 속하지 않으면 점점 더 "너 말고도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아"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게 우리의 50이다. 열심히 살면 10, 정말 운 좋으면 15년까지 유예할 수 있다. 그 이후로는 대체적으로 사람은 평등해진다. 어차피 큰 돈 못 받을 것,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일만 하고 싶어졌다. 어차피 조금 받을 것,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좀 우울해진다. 그리고 그런 궁상 따위 떨고 있기에, 나에게도 시간이 별로 없다.

 

'일생의 과업'이라는 게 있을까? 근대를 만들면서 서양에서는 소명(calling)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게 한국에 들어와서는 근대식 공장 교육의 적성 같은 개념과 결합되면서, 마치 신이 우리에게 준 고유한 능력과 영역 같은 게 있다는 미신이 되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이 아이는 어떤 과업을 신에게 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일찍 발견하고, 빨리빨리 영재로 키우고, 그리하여 이 소중한 아이가 자신의 적성과 소명을 빨리 찾아 이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하길! 아멘. 나는 고등학교 때 육사 그것도 싫으면 공사라도 가면 좋겠다는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말을 거역하면서부터 길 잃은 탕아가 되었다. 다행히 나는 눈이 나빠서 어른들은 잠시 그 꿈을 포기했다. 그리고 끝끝내 행정고시도 보지 않겠다고 얘기하면서, 아버지와 어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50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일생의 과업 따위는 없다. 신은 나에게 개떡 같은 시력과 엉망진창인 기억력을 주었고, 이제 그 시력과 기억력도 노안과 알콜성 치매로 거의 무의미해지기 직전에, 남자 아이 둘을 던져놓았다. 나에게 신이 준 마지막 소명이 있다면? 설거지와 밥하기? 지하철 역 앞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신이 그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일생의 과업이 없다는 생각이, 대충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루에 세 끼, 간식 두 번, 낮잠 한 번, 이거라도 제대로 하려면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면? 나는 60이 되어있을 것이고, 일생의 과업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성립하지도 않는 명제 가지고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생의 과업은, 20대에게만 유효한 말이다. 아직 살 날이 많기 때문에, 그의 '일생'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분히 무게감 있는 말이다. 50이 넘은 사람의 일생은, 어차피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일생이든 이생이든 혹은 반생이든, 별 의미는 없다. 객관성을 보여주는 저울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아직도 혹시 50년을 더 살아야 하지 않는가? 100세가 되어도 그 영혼이 탐나서 메피스토텔레스가 유혹하는 파우스트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난 파우스트급은 아닌 것 같다.

 

평생을 바쳐서 해야 할 일, 그런 게 불행히도 내게는 없다. 만약 있었다면? 이미 없는데 뭘 자꾸 '있었다면' 같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질문을 할까? 소명이 있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평생 할 일이 있어야 삶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기어코 그 일을 완수해야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소명이라는 질문은 21세기적이지 않다. 나에게 소명이 있다고 말하면, 소명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한 저 많은 사람들을 자신보다 열등하게 생각하게 된다. 소명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적이지는 않다. 우리가 지금부터 살아갈 21세기는, 소명을 받은 사람은 열심히 자신의 소명대로 일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의미와 이유대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자신에게 일생의 과업이 있지 않다는 것을 50에 아는 것이 60에 아는 것보다는 낫다는 점이다. 60살에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 그러나 50, 아직 10년은 남아 있다. 소명 같은 것 없어도, 평생의 과업 없어도, 충분히 재밌고, 즐겁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신이 세상에 우리를 내보낼 때, 사냥하고 서로 어깨싸움하라고 보낸 것 같지는 않다. 한 번 더 예수의 말을 빌리면,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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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여덟 번째 글의 제목을 잡았다. '일생의 과업, 그런 거 없다'. 원래는 아내 이야기가 요 자리에 올 거였는데, 룸쌀롱 얘기를 빼면서 이 자리가 비었다. 딱 요기가 중반부로 넘어가고, 후반부로 달려갈 첫 동력을 얻는 자리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달리 길게 뭘 쓸지 고민하게 되기도 하였다.

최소한 20개 이상의 주제가 이 자리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갔다. 너 아니고, 너도 아니고, 어럅소, 너는 진짜 아니다... 그 지랄을 며칠간 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거짓말도 안되고, 진심이 아니어도 안되고, 폼 잡아도 안되고, 나만 재밌어도 안되고, 니미럴... 뭐, 이렇게 조건이 까다로워?

그러다 아예 며칠 때려칠까, 이러는 순간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제목이 일생의 과업, 이딴 거, 개소리, 요런 류의 생각이. 50이 되면, 남은 목숨 다 바쳐서, 이런 게 없어지는 게 정상적이다. 남은 목숨이 얼마 없는데, 바치긴 뭘 바쳐.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 아니면 하던 거 하거나.

그리고 그걸 평생의 소명이라고 치장한다. 그렇게 해서 그냥 살던 대로 산다.

60이 되면, 아마도 뭔가 크게 바꾸기는 이제 어려운 시간이 된다. 그래서 그냥 하던 대로, 일생의 과업을 위해서, 그렇게 산다. 그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질문이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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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딱 1/3 정도 지나는 시점이다. 4개로 나누어서 20개의 글을 쓸 생각이다. 이미 쓴 것과 아직 배치하지 않은 제목들을 다시 돌아봤다.

1. 어영부영, 50살이 되었다
2. 센치멘탈 블루스와 궁상의 시대
3.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4. 아홉수와 경차
5. 스텔라 인생관의 종말과 통닭집 사장
6. 우리의 21세기는 이제야 시작한다
7. 어디 가서 100만 원만 벌어와

엘레꽝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남만 가득한 곳으로
창고 대방출
편의가 있는 곳에 편안함이 없다
돈으로 결정되지 않는 삶
딱 30년만 더 살고 싶다
다운사이징 50대

아직 제목을 못 잡은 글들이 몇 개 있다. 그리고 큰 것들 몇 개는, '국가의 사기' 정리하라다 빼서 써 버렸고. 룸쌀롱 얘기를 빼면서 톤의 기조는 살렸는데, 어깨걸이로 치로 나갈 지점이 얇아졌다. 한 번 더 쳤어야, 팍 치고 나가는 지점이 생기는데, 받침대가 약하다.

치고 나갈 때 '창고 대방출'이 결정적으로 때리면서 승의 승, 바로 이거야 하고 나갈 수 있는데, 지금은 밟고 나갈 발판이 없다.

100만원을 밟고 나갈 수는 없는. 홉, 스텝, 점프, 3단 뛰기의 3요소 중 스텝이 하나 필요하다. 개운하고 가볍게 딱 뛸 수 있는 얘기가 필요하다.

점프 앤 스파이크, 여기에서의 스파이크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바로 들어갈까 하다가, 잠시 정리하면서 스텝용으로 쓸 수 있는 얘기를 다시 생각해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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