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태어난 삼색 고양이와 봄에 태어난 강북걸 사이의 스킨쉽. 진정으로 다정함이 뭔지를 배우게 된다.)

 

가을이 막 깊어가기 시작할 때, 새로운 고양이들이 태어났다. 늘 그렇듯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앞에 놓고는 삶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사의 조철현 대표는 요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영화사에서 간략하게 니체 이전과 니체 이후에 대한 철학사 강의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삶에 대해서 대단한 통찰력이나 이해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삶에 대해서 너무 가벼워서도 안되고, 너무 무거워서도 안 된다는 정도의 생각을 한다. 고양이들의 삶은 짧다. 그리고 야생 고양이들의 사이클은 더더욱 짧다. 내가 돌보고 있는 동안에도 맨 처음 마당에 자리잡았던 모녀 고양이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 봄, 바보 삼촌의 아빠였던, 내가 아빠 고양이라고 부르던 녀석이 사라졌다. 봄에 태어났던 삼색이와 누렁이, 두 마리도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무엇인가를 돌본다는 것은, 참 익숙해지지 않는 헤어짐과 익숙해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번에 태어난 세 마리 아기 고양이들, 얘들 데리고 이사갈 생각하면 머리가 욱신욱신하다. 잽싸기는, 엄청나게 잽싸르고, 눈치도 엄청 빠르다.) 

 

요즘 돌본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 이래저래 내가 돌보는 고양이들이 열 마리가 되었다. 집안에 야옹구, 마당 고양이 7마리, 여기에 영화사에 있는 고양이 두 마리. 다들 나름대로 신경을 써고 돌보고 있지만, 내년 봄에도 계속 볼 수 있는 고양이가 몇 마리인지, 나도 잘 모른다. 이사가면서 혹시라도 못 따라오는 고양이가 있을 수도 있고, 이사간 집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양이가 있을 수도 있고. 게다가 영화사 사무실에 있는 고양이들은 겨울이 되면서 더 이상 사무실에 있기가 어려워져서, 입양 보낼 데를 사무실에서 수소문하는 중이다. 그냥 그런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약간씩 애잔하게 남아있다.

 

아주 간단한 얘기이지만, 돌보는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인가,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인가, 그런 본질적인 질문이 가끔 든다. 고양이들과 이렇게 지내면서 나도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게으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규칙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만 한다. 내가 없으면 굶거나 아주 힘들어지는 존재가 있다는 게, 날 힘들 게 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변화를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씩 해보기 시작한다.

 

머리로 아는 것과 살면서 배우는 것 아니면 조금씩 느끼는 것, 그 사이에 간극이 많다.

 

어디에서 나왔던 얘기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듣기는 아내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전문가 집단 중 수명이 가장 긴 집단이 정원사들이라는 것. 정원사가 죽으면 그가 돌보던 정원도 황폐해지고, 귀하게 대접받던 식물들도 그냥 시름시름, 죽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원사들은 그게 의식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어쨌든 기를 쓰고 오래 살게 된다는 것.

 

나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키워주셨고, 그래서 내 유년기 기억의 대부분은 외할머니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는 않으셨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 들어가는 거는 보고 눈을 감아야 한다고 맨날 얘기하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거는 봐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결국은 박사학위를 받고 취직하는 것까지는 보셨고, 결혼하는 것은 못 보셨다. 현대 다니던 시절,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만 해도 조모상의 경우는 휴가가 안되어서, 장지에는 못 갔다.

 

돌봄과 사랑은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은 다른 듯싶다. 사랑은 집착과 한 끝발 차이다. 스토커와 짝사랑을 구분하기는 참 어렵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동학대, 지금 사교육으로 자녀들을 내모는 부모들이 기본적으로는 다 아동학대 아닌가? 그러나 사랑과 구분하기는 어렵다. 돌봄은 집착으로 바뀌지는 않고, 스토커로 바뀌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그것을 돌봄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을 해본다.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인가, 마당의 고양이들과 몇 년째 같이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고양이는 올해 두 번째 새끼를 낳았다. 봄부터 이미 건강이 썩 좋지는 않은 상태다. 이번에는 고등어를 구워서 주는데, 눈치 없는 바보 삼촌이 어김없이 나타나서 후다닥녀석의 별명이 그래서 바보 삼촌이 되었다. 봄 출산 때에는 엄마 고양이가 바이러스 감염까지 있어서 기침을 심하게 했다. 사람 천식 있는 것처럼 콜록콜록상당히 비싼 약을 사다가 캔에 타서 먹이는데, 녀석은 이 약 탄 캔까지 그냥 처묵처묵.

 

, 눈치 좀 봐라.

 

사랑이라는 게 뭘까, 이걸 이해하는 건 참 어렵다. 그러나 돌봄이라는 게 뭘까, 그건 그렇게 무겁거나 치명적인 속성이 없어서 더 편하다. 조금씩 서로를 돌보는 것, 이것은 다다익선이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면, 특별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가지지 않은 채로, 약간씩 서로 숨 쉴 공간을 만드는 것.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혹은 문화적으로나, 약간의 숨 쉴 공간이 지금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시방, 너무 날 선 삶들을 살고 있다.

 

(햐, 녀석도 몸단장한다. 아직 성별도 제대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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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상 정치차별금지법

 

일명 연령차별금지법이라고 불리는 법안이 인권위에서 만들어질 때, 나도 자문그룹으로 참여를 했었다. 아직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기업체 같은 데에서 사람을 뽑을 때, 연령을 이유로 차별하면 불법이다. 예를 들면 특정년도 졸업생을 명기하거나, 이런 걸 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하면 고령자들이 노동 시장에서 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청년들이 약간 손해를 볼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볼 때 이게 옳기 때문에 법안은 무난하게 만들어졌다.

 

기업이 알아서 하는 거 아니냐, 지금 우리나라의 제도는 최소한 연령에서는 그렇게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요즘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좌파로 살아왔고, 내가 좌파라는 사실을 감춘 적도 없다. 한국에서 진보냐고 물으면 30% 사람 정도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좌파냐고 물으면 2% 정도가 그렇게 대답한다고 알고 있다. 2%, 이건 한국 사회에서는 소수자이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아니라, 대놓고 하는 차별이 많다. 많아도 정말 많다.

 

그러나 이건 내가 내린 판단에 대한 몫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묵묵히 짊어지고 살았다. 나는 내 양심에 따른 선택을 한 것이고, 그에 따른 차별도 그냥 감수했다.

 

그런데 이게 과연 타당한 일인가, 그런 질문을 요즘 해보기 시작했다.

 

한국의 헌법은 사상의 자유와 같은 양심의 자유를 허용한다. 내가 헌법을 지키고, 법을 지키는 한에서, 좌파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요즘 기업체나 공기업 같은 데에서 하는 면접 같은 거, 도가 지나치다고 느껴진다. 어떻게든지 조금이라도 자신들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을 아예 취업 과정에서 배제시키고자, 별의별 수단을 다 쓴다.

 

근데 이거헌법 위반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노동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킨 직원을 인사 조치한다는 것,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진보성향을 가진 구직자를 걸러내기 위한 면접 관행, 이게 위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헌법은 그걸 보장하고 있는데, 지들이 뭔데 거기에 대해서 제약을 가하는가?

 

궁극적으로 우리는 연령을 이유로 차별하면 안되고, 성별을 이유로 차별하면 안 된다. 그리고 학벌을 이유로 차별해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사상을 이유로, 차별해도 안 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한국 사회 발전의 방향이다.

 

우리 경제의 다음 모습은 다양성이다. 우리가 요즘 가고자 하는 복지국가를 만든 나라들의 또 다른 힘은 바로 이 다양성에서부터 나온다. 미래 경제의 한 축이 다양성이다.

 

박근혜가 얘기하는 국민대통합이라는 것을, 경제적 관점으로만 본다면 이건 구시대 경제 패러다임이다. 더 많은 다양한 모습들이 나오게 해야 하는데, 자꾸 통합이라고 묶으면, 새로운 변종과 혁신을 지체시키게 된다. 궁극적으로 박근혜의 경제가, 뭐라고 디자인하든, 미래 경제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유 없는 차별을 자꾸 줄이고, 그 안에서 공동체적 연대의식 같은 걸 만드는 게 우리가 가야 할 일이다. 그런데 정치적 이유와 사상의 이유로, 취업할 때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공연히 기업 사람들이 떠들고 다니는 것 혹은 경제 관료들인 모피아들이 은근히 뒤에서 협박하는 것, 이건 위헌 아닌가?

 

나는 그 불이익들을 그냥 받았다. 그러나 나와 같은 판단을 했을 청년들을 위해서라도, 이 얘기는 좀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파라는 이유로 혹은 진보라는 이유로, 고용상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가 않는다. 능력이 적합지 않다거나, 조직내 의사결정을 저애한다거나, 다른 이유로 문제를 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신념의 차이로 처음부터 걸러내기를 한다는 것은, 우리 헌법 체계에서는 잘못된 관행이다. 그건 우리가 가야 할 미래의 모습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좌파 비율이 10~15% 정도 된다. 그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2%만이 좌파라고 대답하는 것, 그건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있다는 얘기이다. 사회에 차별이 존재하는 이유는 많지만, 양심의 자유 때문에 차별받는 건, 그건 좀 아니다 싶다.

 

연령, 성별, 지역, 학력 그런 차별이 옳은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면서 한국이 발전하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 혹은 정치적 선택에 따른 차별, 이것도 우리가 유지해야 할 미래의 모습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고용상 정치차별금지법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를 무슨 권한으로 공공연하게 제한하는 것을 정당하게 보는 것인가? 나는 우리 안에 몸에 밴 차별 관행을 하나씩 줄여다나가면서, 더 많은 다양성을 시스템이 확보하는 것, 그게 미래 경제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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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꼽살의 미래는?

 

선대인과 나는 꼽사리다방송을 시작한지 어느덧 1년이 넘어간다. 경제 대안 미디어가 있어야 한다는 선대인의 열정 아니었으면 이 방송은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원래 좀 게으른 종류의 인간이라, 묻어가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이 방송을 선대인 방송이라고 그러는 거다. 처음 만들자고 한 사람이 선대인이었으니.

 

어쨌든 나꼽살은, 외부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제작진들은 성공한 방송으로 평가한다. 나름대로는 보람도 있고, 만드는 과정이 재미도 있다. 보통 한 방송을 만드는 데 한 달 정도 걸린다. 처음 아이템 고르고, 이렇게 저렇게 방향을 잡고, 섭외가 필요한지 판단을 한다. 처음 얘기 나와서 기획을 시작해서 방송 만들어질 때까지, 보통 한 달 정도 걸리는 것 같다.

 

우리는 7명이 한 팀이다. 작가도 있고 매니저도 있고, 엔지니어도 있다. 지금 나꼽살팀의 피로감은 극한에 몰릴 정도이다. 늘 몇 개의 방송이 기획 중에 있으니, 방송 중의 긴장감은 물론이고 기타 업무로 누군가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게다가 스탭진은 일종의 자원 봉사 형식이 되어서, 자신들의 생계도 별도로 책임져야 한다. 어떻게든 얼마라도 만들어서 그런 부담이라도 덜어주고 싶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그냥 지금까지 끌고 왔다.

 

물리적으로 대선 이후에 더 하기가 어려운 게, 지금도 이미 오버 차지인 셈인데, 대선 날만 보면서 그냥 달려온 거라서 그렇다. 설날, 추석, 그럴 때에도 쉬지 않고 온 거라서, 이미 무리이다.

 

실무적으로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막방을 대선 전에 하느냐, 대선이 지나고 하느냐, 그 정도 문제이다. 나는 대선 전 마지막 방송을 막방으로 하자는 입장이다. 누군가 쓰러진다고 해도, 책임지기가 좀 어렵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한 회분이라도 줄이는 게 유리하다.

 

어쨌든 이제 막방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나꼽살의 향후 진로에 대해서, 내부에서도 조금씩 얘기를 시작해본다. 일단 과로고 오버 차지 상태이니까, 대선 끝나면 무조건 한동안 쉰다

 

한 번도 우리는 MT를 가거나 전부 모이는 회식도 제대로 못했다. 대선 끝나면, 제작진 전부 일본 같은 데라도 가서, 그냥 쉬자요렇게 의견을 모으는 중이다.

 

제일 좋고 부드러운 것은, 공중파에서 경제쇼 같은 형태로 주간 방송이 되고, 지역에서도 각 지역 버전으로 그렇게 네트워크 프로그램으로 가는 게 최적의 해법이다. 그러나 이건, 뭐 우리가 결정할 사안은 아니고.

 

두 번째 방식은, 지금과 유사한 방식으로 벙커에서 계속 녹음하는김어준 총수는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계속 지원하겠다는 입장인 것 같다. 물론 의미는 있지만, 물리적으로 힘들다.

 

세 번째 방식은, 김용민이 대안 미디어를 차린다는 전제 하에서, 유사한 경제방송을 그 쪽에서 진행하는 것. 물론 역시 물리적으로 쉽지 않다.

 

나는 대선 후에도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 뒤를 맡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

 

, 이런저런 제약 조건들이 있으니까, 아직 뾰족한 다음 진로에 대해서 누구도 해법을 못 내고 있는 상황이다. 독지가가 있어서 지원을 해주면 좋겠지만, 뭐 그런 독지가는 없다가 경험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상황이다.

 

기타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시민들의 방송 같은 것을 만들고, 등등의 얘기들도 있다. 선대인도 많이 지쳤다. 방송 끝나면 아내와 세계 여행하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제방송으로는 이만큼 성공한 방송을 또 다시 기획해서 만들기가 쉽지는 않다. 경제 주류의 목소리만으로는 견제가 어렵다. 기업과 모피아들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가 균형을 맞추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악으로 깡으로 끌어가기에는 이미 한계까지 왔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조금씩 고민을 해보기는 하지만, 아직 마땅한 해법은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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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레이커스

 

 

 

영화로 충격 받는 일이 요즘에는 잘 없는데, 간만에 뒤통수를 맞은 듯정말 재밌게 보았다.

 

물론 나는 흡혈귀 영화나 좀비 영화는, 일단 어지간하면 본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재밌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정서는 아니다.

 

데이브레이커스의 질문은 cure subsitute, 즉 벰파이어 바이러스로부터 치료를 받을 것이냐, 아니면 혈액의 대체제를 계속해서 판매할 것이냐, 그 질문으로 모인다. 바이러스로 문제를 처리하고 나면, 사실 이 두 가지의 질문만이 남는다.

 

여기에 최근의 다국적 제약회사에 대한 은유가 따라 붙는다. 당연히 계속해서 판매를 해야 회사에 이윤이 남지, 그 거대한 원인을 제거하고 나면 회사가 성립될 근거가 사라진다. 좀비 영화에 비하면, 흡혈귀 영화들이 고전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전통이다. <데이브레이커스>는 이 전통 위에 놓여 있다. 드라큐라 백작 이후의 설정들을 잘 살리면서, 다국적 기업으로 전환된 지금의 회사들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그런 점에서는 설정이 <인셉션>과 유사하다. 여기서도 다국적기업의 경영이 주요한 설정인데, 이 경우에는 대체 에너지원을 찾아나가는 에너지 회사이다. 쉘이나 BP 같은 데를 상상하면서 보면 훨씬 재미있다. 그리고 <데이브레이커스> <캣우먼>에서 처음 시도되고 <레지던트 이블>에서 전면화된 다국적 제약회사들, 우리의 경우는 한미 fta를 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실질적인 세력 중의 하나로 의심되는. 넓게 보면 제주도 등 영리병원을 지지하는 그 세력들과도 어느 정도는 맞닿아 있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을 혈액은행으로 은유했다.

 

흡혈귀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게 여기에서는 cure의 주요 모티브이다. 내 기억상으로는 아마 이 경우는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흡혈귀이지만 더 이상 피를 빨지 않게 된 모티브는 <어딕션>에 나온 적이 있다. 그 때에는 벰파이어에게 피는 일종의 기호의 문제 즉 중독과 같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하긴 <어딕션>에서는 니체나 이런 철학자들이 모두 흡혈귀였다는 기막힌 설정이 나온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이 철학과 박사과정에서 박사 논문을 쓰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정말 공포스럽던 마지막 피의 향연이 벌어지는 순간이 철학 박사 수여식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데이브레이커스>에서 피라는 것은 이런 선호와 기호에 의한 중독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에센스 혹은 엑기스 같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일정 기간 피를 마시지 못하거나 피가 없어서 자신의 살을 먹으면 서브사이더라는 변종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흡혈귀 내에도 계급적 서열이 있고, 그 안에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서브사이더라는 설정이다.

 

좀비영화 <28일후>가 그랬던 것처럼, <데이브레이커스>가 설정된 세계는 말더스의 세계이다. Population model에서의 피식자와 포식자 사이의 predator-prey 모델의 세계이다. , 간단한 거다. 인간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결국 멸종 위기에 몰리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혈액 위에 세워놓은 벰파이어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사회 시스템까지도 위기에 몰리게 된다. 스스로 재생산하지 못하는 문명의 장기적 균형에 관한 질문이다.

 

이 상황에서 모든 것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경제의 맨 하반부를 점유하고 있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실험실이다. 당연히 주인공이 그 실험을 주관하고 있는 혈액 박사 흡혈귀로 설정되어 있고.

 

에단 호크는 <트레이닝 데이> 이후로 아주 재밌게 지켜보는 배우인데, 여전히 재밌다. 어떤 면에서는 <로마클럽 보고서>를 처음 준비하던 도넬라 메도우 여사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윌렘 데포는 <쉐도우 오브 벰파이어>에서 막스 슈렉을 기똥차게 연기한 적이 있다 (에니메이션 <슈렉>의 이름이 여기서 온 거 아닌가, 나는 아직도 그렇게 의심을 하고 있다.) 독일 표현주의 시절의 그로테스크한 화풍으로 연출된 막스 슈렉만큼, 다시 흡혈귀를 연기한 윌렘 디포는 그 정도까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내가 만약 흡혈귀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도 이렇게 생긴 걸 만들지 않았을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참 잘 만든 영화이고, 예산 많이 들이지 않고도 필요한 효과들을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별 볼 일 없었다. 130

 

어쨌든 이 이후로 한동안 놓고 있던 SF 영화 기획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20억 미만의 저예산 영화를 목표로, 문명의 전환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에 대한 논의를 지난 주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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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5년 후

 

같은 상황에서 1년 후, 5년 후, 10년 후 그리고 30년 후를 나누어서 생각해보는 것은 학자로 살면서 몸에 밴 습관이다. 물론 생각한다고 해서 맞춘다는 보장은 없다. 당연한 거 아니겠나? 그야말로 ceteris paribus, 다른 상황이 동일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물론 우리의 삶은 대개 한치 앞도 모르는 상태에서 움직인다. 그러니 길게 앞으로 올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다만 귀찮을 뿐이지.

 

일요일 오후, 창 밖으로 바보 삼촌이 마당에 내려 앉은 산비둘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한참 보았다. 저들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 5, 명박 5년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삶의 안정성이라는 것이 많이 떨어졌다. 직업의 안정성이 농경사회에서 벗어나며 자본주의가 잠시 찾은 타협책이었는데, 그게 지금 무너지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5년 후에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몇 퍼센트나 될까? 혹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썩 만족스러워서 5년 후에도 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

 

파리에 살던 시절, 식당에서 서빙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스믹이라고 부르는, 최저생계비 약간 넘는 돈을 받았는데, 사실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라면 다 때려치우고 식당에서만 일해도 한국에서 어벙벙한 직업을 갖는 것보다는 나은 조건이었다. 당시 식당에서 일하던 젊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평생을 보내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고 신기했던 적이 있었다. 불어로 레스토랑 업계를 restauration이라고 부른다. 이걸 하나의 분야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전문직이 되기 위해서 교육 계획 같은 걸 세우는 걸 보면서, 정말로 놀랐었다. 이건 우리식 사농공상 감성으로 간단하게 이해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garcon de café, 커피 종업원에 관한 비유를 든 적이 있다. 누구를 위하여 커피 종업원은 커피를 나르는가? 정말로 그 커피 종업원들이 쟁반에 커피를 받쳐든 채 달리기 시합을 하는 걸 보면서 신기했던 적이 있다. 루디크 혹은 루덴스라고 부르는 유희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종종 인용되는 샤르트르의 구절이다. 커피 종업원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교를 부리면서 커피를 나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질문이다.

 

영화 <디어 헌터>에 보면 미국의 철강 노동자들이 중고 세단이지만 어쨌든 세단을 타고 엽총을 들고 사슴 사냥을 하면서 휴가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풍요의 자본주의라고 지칭되던 그런 시절의 문화적 특징들이다. 이런 것들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독특한 일상성인데, 그 안을 지탱하는 것은 안정성이라는 조건일 것이다. 슘페터가 아주 오래 전에 했던 창조적 파괴라는 단어를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다시 내세우면서 혁신을 맨 앞에 얹은 것은 9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 이후로 안정성을 강조한 나라들이 있고, 안정성을 깨는 게 발전이라고 생각한 나라들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북구의 소규모 경제를 운용하는 나라들이 국가와 시민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안정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갔고, 한국과 일본의 지도자들은 안정성을 깨는 게 발전이라고 여겼다. 우리의 경우는 조금 더 심각했다. 안정성을 극단적으로 깨고, 그게 국가가 좋아지는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정계와 관계의 윗자리를 차지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삶의 안정성이라는 것이 바닥으로까지 추락하게 된 것 아닌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라고? 고위직 중에서도 자살로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로 이건희 일가나 정몽구 일가쯤 되는 사람들 빼고는 한국에서는 지금 그 누구도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다른 사람들이 괴로우면 자신이 기분 좋아지는, 그 지독한 상대 비교의 논리가 아니라면, 지금 어느 누구의 삶도 안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명박처럼 어쨌든 하는 일마다 하늘이 돕고, 땅이 돕고 그리고 쥐가 돕고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사람의 아들의 삶 역시 안정적이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거스를 수 없는 변화도 없다. 카메라에 쓰는 필름 메이커들이 회생하기는 어렵고, 거기에 따른 각종 장비와 기술들도 일부 하이엔드나 복고 취향이 아니라면 과거처럼 전성기 영광을 다시 보기는 어렵다. 그런 큰 변화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국의 마지막 LP 공장이 문을 닫는 걸 본 게 몇 년 전인데, 올해 다시 LP 공장이 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죽어라고 다시 LP로 음악을 듣는 시대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의 삶의 안정성을 그야말로 밀크 쉐이크처럼 돌려버리거나 스무디 만들듯이 헤집어놓는다고 해서 그 사회가 발전한다는 논리는 좀 이상하다. 사회의 속도가 빠른 것과 개인 삶의 안정성이 지켜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개개인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한다는 것은 물리적이고 경제적인 부의 축적과는 좀 다른 얘기이다. 그건 흔히 말하는 성장과 분배의 문제와도 다르다. 성장이 무조건 높다고 해서 안정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인민재판 방식으로 늘 재분배를 하고 있다고 해서 안정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닐 성 싶다.

 

5년 후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5년 후가 어떻게 될지 그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5년 후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현 상황을 돌아본다는 것이다. 우리의 5년 후, 그 때도 역시 대선 기간일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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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을 생각함

 

처음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당연히 나도 많은 사람들을 참고했다. 요즘은 경북이라고 하면, 어쩐지 마초들이고, 어쩐지 새누리당 지지자들이고,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상식을 가진 사람들로 비춰지는 경향이 있는 듯 싶다. 그 한 가운데 청송이라는 곳이 있다. 작년, 올해는 안 갔지만, 지난 수 년 동안 해마다 몇 번씩 갔던 도시가 청송이다.

 

청송, 영화 <홀리데이>의 바로 그 청송 감호소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신정아가 농업에 대한 지원금 명목으로 대출받은 청송 농협이 이곳에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오덕 선생이 태어나신 곳으로 기억된다.

 

책을 내면 출판기념회를 하지 않는다. 이오덕 선생의 출판기념회라는 재수없는 행사에 대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당신 보시기에 흡족하게 산다는 보장은 전혀 없지만, 어쨌든 최대한 그렇지 않도록 노력은 한다.

 

교육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어린이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냥 신나게 내 삶의 무궁한 영광만을 위해서 살지 않는 데에는 이오덕 선생의 영향이 크다. 그렇다고 내가 이오덕 선생 책을 그 후에도 늘 옆구리에 끼면서 펼쳐 보는 것은 아니다. 안 읽은 책도 많고, 이제는 어디 가 있는지 찾기도 어려운 책들도 많다. 어쨌든 그런 양반들이 우리 선대에 있었다는 거, 그게 참 좋았다.

 

권정생 선생의 삶은 감히 따라하거나 흉내내겠다고 생각을 먹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삶이다. 인생은 소풍, 아니 인생은 쇼핑, 우린 그렇게 산다. 이오덕 선생의 삶은, 어쩌면 비슷하게 흉내내본다고 하면 아주 다르지는 않게 살 수 있는 삶이다. 물론 그 이유 때문에 이오덕 선생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어쨌든 명박네 애들이 최고라고 얘기하는, 지네들끼리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했던 그 삶의 정반대편에 이오덕 선생의 삶이 있다. 소박하고, 은근하고, 그러면서도 우리가 모두 이렇게 하면 참 세상이 좋아지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삶. 당신은 꾸밈이 없는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고 하셨다. 나 같이 글 잘 못 쓰는 사람에게는 이게 참, 큰 위안이 되었다.

 

그냥 하고 싶은 얘기, 부담 없이 편하게 풀어놓으면 된다나도 남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친다. 다 당신 덕분이다.

 

<울면서 하는 숙제>, 이런 게 참 좋은 작품이다.

 

운동회에 관한 얘기를 한 번 해보자. 그 시절, 이 양반들은 운동회에서 꼴찌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100미터 달리기를 손잡고 하자는 얘기들을 했다. 예전에 그거 볼 때, 좀 지나친 이상주의자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달리기라고 하면, 숨이 턱에 받치듯이 뛰고, 승부가 칼 같이 갈리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솔직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소박한 그 마음만 받자, 뭐 요런 식으로 간단하게 생각했었다.

 

이런 된장최근에 일본 방송을 하나 봤다. 안경 쓰고, 어지간히 시니컬한 인텔리처럼 보이는 어떤 패널이, 요즘 일본 운동회에서 손잡고 달리기를 하는 바람에 일본 아이들이 패기가 사라지고,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아주 생지랄을 하고 있는 걸 봤다.

 

아니, 일본에서는 손잡고 달리기, 그걸 한단 말이야? 리얼리? 순간 이오덕 선생이나 권정생 선생이 늘 하던 손잡고 달리기 얘기가 생각났고, 도대체 우리는 뭐 하는 사람들인가, 그런 생각이 뒤통수를 팍 치고 지나갔다. 명박네 애들은 일제고사 쫙 보고, 그게 과학적 평가라고 엄청 생지랄들 했다. 당근, 많은 부모들도 시험 보게 해달라고 사정 사정. 우리가 그 지랄하고 있는 동안에, 일본에서는 운동회에서 이오덕 선생 같은 양반들이 정말로 아방가라드처럼 한 얘기를 정말로 구현하고 있단 말이야? 오 마이 갓!

 

오 신이시여, 저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나이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교육의 최고 개판은, 대치동 교육도 아니고 목동 교육이다. 꽤 많은 학원원장이나 사교육 종사자들과도 이 문제를 가지고 논의를 해봤는데, 이유와 근거는 조금씩 달라도 결국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사실이다.

 

목동, 이건 교육도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니 교육을 위해서라면, 일단 목통을 탈출하라!

 

목동 교육은 대치동 비슷한 것 같은데, 그건 보이는 양상만 그렇고 내면적으로는 더 개판이다. 실제로 대치동에는, 사실 그 동네 사람 자녀들은 별로 없다. 이미 다 미국으로 보내셔서, 이러 거나 저러 거나, 오리지날 대치동 주민들은 사실은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한국 교육과는 무관한 사람들이고. 아주 희한하지만, 그 묘절함이 대치동 교육을 완전 개판 5분전에서 구원해준 힘이 되었다.

 

이오덕 선생의 정신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최악의 교육은 목동 그것도 초등교육이다. 처음에 목동 초등학교 1학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축구 클럽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한 건데, 이게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정말로 지옥의 야차들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 교육인 거라. 간단하게 말하면,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왕따 놓는 걸 교육 시키고 있더라, 이 얘기이다.

 

통계를 내보고 싶었는데, 어지간히 돈 들이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운 통계라서 일단 접어놓고 있지만, 구조적이고 근본적으로 왕따 지수가 가장 높이 나올 곳이, 목동 아닐까, 그런 작업 가설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때의 축구 클럽이 나중에도 계속 가고, 부모들이 만들어주고 싶은 건, 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네트워크와 친분 관계라는 건데. 나중에 학교에 오거나 혹시 숫자가 맞지 않아서 축구 클럽에 못 들어간 아이는 구조적 왕따에 시달리게 되어있다. 내가 아는 고위 공직자 몇 사람은 결국 목동에서의 이 지독한 왕따를 견디다 못해, 엄마까지 딸려서 미국 유학 가거나, 온 가족이 지방 근무로 간 사례들이 좀 있다. 그 때는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몰랐는데, 목동이라는 곳이 독특한 교육 시스템을 들여다 보니

 

, 그럼 그 왕따 놓으면서 한 명씩 따돌리고 제끼는 게 삶의 지혜라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칼 같이 습득한 그 어린이들의 삶이 부모들의 바람처럼 행복하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겠는가?

 

그게 그렇게 간단한 거면, 일본이 왜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손잡고 뛰는 달리기를 하겠는가? 그 사람들은 자본주의 아니고, 그 사람들은 바보라서? 이오덕 선생 같은 분은 왜 수 십년 전에 그런 주장을 하였겠는가? 이상주의자이고 빨갱이라서? 그게 아니라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지금 우리의 교육은 수 십만명 아니 수백만명의 예비 이명박을 만드는 교육 같은 것 아닌가?

 

목동 엄마들한테 조언을 한다면, 혹시 축구 클럽 같은 데 자기 아들이 다니고 있으면, 일단 그것부터 끊으시길. 자식의 미래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사교육은 좀 천천히 끊어도 되고, 독서 교육은 적당한 때에 자연스럽게 시작해도 된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왕따 놓는 것이 삶이고 자연스럽다고 느끼게 하는 것, 그건 정말로 자식들을 구조적이고 근본적으로 망치는 길이다.

 

내가 이해한 이오덕 선생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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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보수?

 

나는 전또깡 이래로 민주정의당의 후신들에 투표를 해본 적이 없다. 아주 솔직하게, 조선일보 기자들을 만날 때도 편치 않다. 그래도 책 막 나왔을 때, 이럴 때 상황 봐서 만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 주변에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집안에서, 부모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친척들 중, 새누리당에 투표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아주 어렵다. 서울 보수, 그런 사람들이 온통이다. 결국은 대학 시절, 집을 나가고 나서야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그렇지만 새누리당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차별하거나 그렇게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나는 정치적인 선택을 이유로, 많은 차별을 당했고, 오랫동안 소수자처럼 살았다. 그건 내 선택이다. 회색인처럼 살고, 회색지대를 선언하면서, 적당히 중도라고 그러면서 살아도 상관은 없다. 그렇지만 어차피 한 번 사는 삶, 내 얼굴을 감추면서 하고 싶은 얘기나 표현을 감추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냥 가난과 차별 같은 것을 감수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감수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내가 무엇인가 선택하거나 채점하는 자리에 왔을 때, 정치적인 선택을 이유로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짓을 하면, 나도 마찬가지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게 이기는 것도 아니다.

 

공기업 사장이나 감사 같은 것을 선출하는 인사위원회에 가끔 들어가게 되는 일이 생긴다. 50살 넘은 아저씨들의 세계에서는 민주당 지지자들도 별로 찾아보기 어렵다. 겉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냥 양쪽에 다 다리를 걸고 있는, 기가 막힌 로비의 대가, 그런 것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앞으로도 나는, 정치적인 선택을 이유로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공개적으로 좌파 선언을 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 좌파는, 어쨌든공개적인 자리에서 스스로 불리는 이름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하여간 이건 나의 선택이고, 그로 인한 불이익은 그냥 감수하고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불이익을 선택하면서 살아가면 좋은 점이 몇 가지가 있다. 삶이 소박해진다. 지금도 그냥 츄리닝 입고 다니고, 아주 특별한 경우 아니면 청바지도 비싸서 못 산다. 구질구질해 보이기는 하지만, 삶이 구질구질한 것보다는 낫다. 내가 하는 유일한 호사는, 안주는 그래도 새우깡 보다는 좋은 거 먹자

 

술 마실 때 새우깡 혹은 새우깡 수준의 안주를 먹으면 너무 우울해진다. 소주에 새우깡 먹던 그 스무살로 돌아간 거 같아서 급 우울해진다. 그래서 그것보다는 좀 좋은 안주를 마시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좋은 것은, 요행수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직접 한 일도 뺏기는 판인데, 내가 하지 않은 일로 인해서 뭔가 좋은 일이 생기는 일, 그런 건 내 삶에 절대 없다. 10개를 하면 결국 하나나 두 개만 성과로 남게 된다. 요행수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실망하거나 속상할 일도 별로 없다. 아주 잘 해야 본전, 그렇지 않으면 대박 망하는 것이 현실에서 한국의 좌파들이 살아가는 삶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이었는지, 꿈을 가져본 적도 없고, 희망을 크게 키워본 적도 없다.

 

그냥 세 끼 밥이나 입에 들어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이렇게 살면 정말 좋은 게, 속상할 일이 별로 없다. 물론 살다 보면 명박네 삽질 하는 거 보면서 속상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세끼 밥만 입에 들어오면 된다고 생각하면, 크게 속상해할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일종의 강요당한 소박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또 다른 것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이나 낭만 혹은 구구절절한 사랑, 이런 것들에 눈을 뜨게 된다.

 

아주 어렸을 때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봤었다. 6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난다.

 

신이 한 쪽 창문을 닫을 때, 다른 쪽 창문을 열어준다.”

 

지내 보니까, 정말로 그렇다. 교수 지원하고 총장 면접 볼 때마다 번번이 떨어지던 시절에는 정말 술 처먹고 우울하게 지내고 그랬다. 생각해보니까, 그건 그냥 내가 감수해야 할 삶인 듯 싶다. 그래서 그냥 감수하고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우울증이 사라졌다.

 

물론 그래도 대인기피증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 무슨 상관이 있으랴. 같이 작업하는 소수의 동료들을 아주 자주 만나면, 그 삶도 부담스럽지는 않다. 게다가 무대 앞에 나서는 화려한 순간을 일부러 피하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아주 많이 생겨서 더 좋다. 아이와 부인, 고양이들과 몇 명의 동료들, 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도 아주 재밌다.

 

이런 내 삶을 전제로, 박근혜에게 기꺼이 투표하는 정도가 아니라 박근혜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삶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20대 보수에 대해서 요즘 조금씩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20대들을 좋든 싫든, 많이 만난다. 좋아서도 만나고 어쩔 수 없이도 만난다. ‘88만원 세대이후로, 20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고, 싫든 좋든 만나게 되는 게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어려운 게,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을 이해하는 게, 아무리 머리 속에서 논리적으로 따져본다고 해서 이해가 될 수 있겠는가? 경제학과 수업이나 경제학과 특강 혹은 상대 특강 같은 건 잘 안 하려고 한다. 평생을 경제학자로 살아왔는데, 경제학과 수업을 안 하다니!

 

경제학과에 가면 20대 보수를 아주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냥 자신이 뭔가 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키기 위해서 보수가 된 게 아니라, 정말로 좌파들을 너무너무 싫어하고, 체질적으로 증오한다고 믿고 있는 그런 20대 대학생들을 아주 많이 만날 수 있다.

 

나한테 왜 FTA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하느냐고, 나의 후배라고 하면서 덤비는 친구들, 그런 사람들이 경제학과에 가면 아주 많다. 대학원 전공이 국제경제학이었다. 그래서 국제통상학부나 그런 곳의 학생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적극적으로 박근혜를 지지한다. 영화 지망생 중에서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그들을 차별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에게 나의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개인의 문제에서, 모든 사람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연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삶은 삶, 그 모든 것들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제학도들이, 대학에 들어가거나 그 이전부터 지독할 정도로 보수주의적이라는 사실은, 가끔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가 박사가 될 때까지 혹은 학위를 마치고 시간강사가 될 때까지, 일부 좀 너무하다 싶은 몇 명의 선생을 제외하고는 저것도 쟤의 선택이고, 시험 점수로만 평가하겠다고 많은 선생들이 대해주었다. 재벌계열사나 정부에 있을 때에도, 나의 상관이나 상사들 중 좀 너무하다 싶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냥 업무 성과로만 평가하겠다고, 내가 속 편하게 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었다.

 

그게 내가 20대 보수를 대하는 자세이다. 그 개별적 이유를 정형화시키기에는, 그들도 많은 이유가 있다. 출신 지역에 따른 편향이 있고, 부모와의 특수 관계에 대한 개별적 성향이 있고, 문화적이든 정치적이든, 그들이 이미 내린 과거의 선택이 있다. 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작을 때는 20대의 17% 많을 때는 30% 정도가 박근혜에게 투표하겠다고 대답한다. 비록 나는 박근혜가 만들어내는 세상을 도저히 참을 수는 없지만, 그를 지도자로 선택한 사람들의 개별적 선택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도덕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경제의 밑바닥에는 윤리하는 것이 존재하고, 그 윤리가 없다면 경제는 금방 개판 5분 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도덕적 우월감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경계한다. 내가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박근혜 지지자에 비해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큰 일 난다. 그건 논리적인 일이다. DJ 시절, DJ를 지지한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그야말로 호남 향우회 스타일의 인간들을 보면서,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노무현 열성 지지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었다. 노무현 지지는 개별적 선택이지만, 그것이 그 선택을 내린 사람의 우월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이 도덕적 우월성일 때, 그것은 금방 증오와 폭력적 사유와 연결된다. 동일한 논리로, 그 시절 그 사람들에 대해서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그래도 박근혜, 그것 역시 좀 아닌 듯싶다.

 

20대 보수, 쉽지 않은 주제이다. 만약 재벌 3세라서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영 미친 넘 한 넘 있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실존적인 삶에서 보수의 길을 선택한 20, 그건 여러 가지로 같이 생각해볼 문제이고, 주제이다. 공교롭게도 20대 내에서는 박근혜 지지자가 소수이다. 물론 그 소수는 지배적 위치에 있는 소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영 가난하고, 앞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데도 박근혜 지지자라면?

 

어쩌면 왕따에 대한 기원론적 질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남을 왕따 놓는 건지, 왕따가 된 건지. 철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답이 잘 없다. 한국에서 박근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 20, 그 질문 역시 철학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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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몇 번 갈아엎고 다시 시작한 적이 있다.

 

매 번 목적과 이유가 있기는 했는데, 지금 블로그도 얼마 전에 리부팅한 버전...

 

아무래도 나도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고,

 

그냥 친분 있는 분들만 쏙닥하게 얘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냥 흥미로...

 

어떤 분들이 이 블로그에 오시는지, 저도 궁금하고.

 

댓글 남겨주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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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해보던 일들

 

2주 후면 소설책이 나오는데, 아직 제목을 못 정했다. 시나리오 버전은 모피아로 시작을 했었는데, 소설 버전은 경제 쿠데타로 시작했다. 거의 마지막 단계인데, 아직까지도 딱 이거다 싶은 제목이 잘 안 잡혀서 고심 중이다. 내용과 연결해서 딱 이거다 싶은 제목이 떠오른 건, ‘해적이었는데, 아무래도 문화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듯 싶어

 

며칠 사이로 기똥찬 제목이 떠오르지 않으면 소설 모피아정도의 제목으로 갈 것 같다. 이 제목은 대장금의 작가인 김영현 선배가 제안한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반응들이 좀 그랬는데,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서 제일 끝까지 버틴 제목안이기도 하다.

 

요즘 검토를 하는 작업이 몇 개가 있다. 김보람 작가의 미래도둑의 각색이 최근에 부탁 받은 일인데, ‘생태요괴전을 쓸 정도로 요괴 종류의 얘기를 내가 워낙 좋아하다보니. 어쨌든 이렇게 시작한 일인데, 30억 미만의 저예산 B급 영화로 SF 영화 기획을 준비 중이다. 몇 주 작업을 좀 했는데, 얼추 베이식 디자인은 어느 정도 했다. 당장 시나리오를 쓰지는 않을 거지만, 어쨌든 몇 달 안에 정리는 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데이브레이커스비슷한 영화를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구상으로는 SF에 훨씬 가깝게 가져갈 듯싶다.

 

처음으로 기획에 참여한 영화는 아마 최종 제목이 결국에는 킬러들의 사생활로 가게 될 것 같다. 이 영화는 내가 전체를 구상한 영화는 아니지만, 이게 영화가 될 수 있는 하는 약간의 터닝이 내가 만든 부분이다. 어쨌든 영화 크레딧에 기획으로 내 이름이 올라갈 첫 번째 영화이다.

 

요즘 준비하는 영화들은 시나리오 작가였던 조철현을 감독으로 데뷔시키기 위한 작업들이다. 한 두편 해보고, 내년부터는 나도 좀 적극적으로 젊은 감독들을 발굴하는 일들을 더 해보려고 한다. 기회가 되면, 20대 영화 감독을 발굴하는 그런 일들이,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람은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올 겨울에 할 메인 작업은 동화책을 만드는 일이다. 내년 1~2월에 작업을 하기로 했는데, 이건 정말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다. 요즘 파트너로 일하는 화가가 김선정씨이다. 마리 이야기팀의 화가들과는 정말로 인연이 오랫동안 간다. 동화나 그림책은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몇 달째 이래저래 고민 중이기는 한데, 일단 고양이 얘기로 한다는 것과 바보 삼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정도이다.

 

얘기 버전은 몇 가지가 있기는 한데, 한 권으로 할지, 시리즈의 여러 권으로 할지, 나도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는 못했다. 일단 조금씩 해보고 익숙해지면 2시간 정도로 할 수 있는 장편 구상을 해보려고 한다. 필요하다면, 에니메이션은 직접 감독을 할 생각도 있다. 아무래도 그 편이 펀딩에 유리하다는 거 같다. , 그림을 전혀 못 그린다는 치명적인 핸디캡이 있지만, 파트너로 일하는 화가들 그림이 워낙 좋아서. 그림을 그리지는 못해도, 그림의 느낌을 볼 줄은 안다.

 

전체적으로 내가 그리는 세계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워낙 그런 식으로 생각을 오랫동안 했고, 예전에 소설 습작하던 시절에도 그런 얘기가 좋았었다. 내 얘기 중 하나를 원작으로 에니메이션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한 달 전에 온 게 있었는데, 이건 아직 대답을 안 했다. 아니, 못 했다는 게 맞을 거다. 원래의 얘기와 그림 풍 그리고 표현의 방식 같은 게, 원작자로서 아직 딱 매칭이 되지 않아서. 일단 판단 유보.

 

하여간 대부분의 일정은 이렇게 저렇게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는 중인데, 아직까지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게 에세이집이다. ‘1인분 인생다음 에세이는 포토 에세이로 한다고 처음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양식의 문제에서 아직도 주저하고 있다.

 

포토 에세이가 이게 완전 노가다 작업이다. 나도 힘들고 출판사도 힘들고, 그야말로 완전 패대기 작업인데, 포토 에세이라는 게 한국에서는 죽은 양식이라는 게 일반적인 판단이다. 출판사에 손해를 끼치게 하는 일은 안 한다는 게 내 기본 원칙이기는 한데, 잘못하면 손해를 끼칠지도 몰라서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해놓은 작업이 있고, 나중에 한다고 미루어놓은 것들을 정리하면 되는 일이기는 한데

 

영화나 에니메이션은 워낙 작업을 오래 하기도 했고, 또 익숙한 양식이라서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이 드는 게 있다. 그렇지만 포토 에세이라는 게, 나한테도 생경한 분야라서 아직 잘 감이 오지는 않는다. 원래 포토 에세이 작업이 시작된 건, 경제 대장정 시리즈 8권의 탈핵 문제를 토포 에세이 형태로 만들어보자는 데에서 시작한 거였다. 아직도 뒤로 미루어두고 있는 게,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 그리고 이제 아기 키우는 상황에서 사진 찍는다고 지방으로 돌아다닐 일정을 도저히 뽑아낼 수가 없다.

 

하여간 요즘은 이런 거 고민 중이다. 사회과학 책들 아직 못 낸 건 어떻게 할지, 그것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루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이 노무현 시대에 이건 문제다, 그렇게 시작된 거고, 이명박 시대의 전개 과정을 보면서 형성된 것들이다. 어떤 정부가 될지, 하여간 바뀐 정부에서 인수위 형성되는 거 보고, 첫 번째 장관들 인선하는 거 보면 어느 정도는 명확해질 것 같다.

 

노무현 초기에 인수위 구성되는 거 보고, 첫 장관 인선되는 거 보고, 그야말로 대충 눈치 깠다. 명박네 인수위와 첫 장관 인선 보면서 어느 정도는 눈치는 깠는데, 정말 상상초월이었다. 흘러나오는 소문과는 달리 정운천이 갑자기 큰 턴을 하면서 장관되는 거 보고 대충 농업은 어떻게 갈지, 결정적으로 감을 잡았다 싶었는데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정도 눈치로는 택도 없는, 그야말로 상상초월이었다.

 

어쨌든 나머지 책들은 내년 3월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고, 그 때까지는 영화 작업과 동화 작업 열심히 할 생각이다. 사람 사는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경제학자로서 쓰는 사회과학 책의 마지막 책이 이번에 나온 시민의 정부 시민의 경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그 2부는 마무리하는 심정으로, 내가 이 사회에 남기고 싶은 얘기의 대강은 정리했다. 그 책 에필로그를 쓰면서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났었다. , 그렇게 특별히 눈물이 많이 날만한 얘기도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게 경제학자로서 쓰는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른다는,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벌써 11월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몇 년치 출간일정이 미리 결정되어 있고, 그렇게 많은 것들이 미리 예정되어 있는 삶을 살았다. 이제는 큰 거 몇 가지만 대충 정해놓고,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삶으로 바꾸는 중이다. 세상에 큰 일 작은 일, 그런 건 없다.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일상성 속에 우주가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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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림 엽서 같은

 

모든 일에는 시간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장소라는 질문이 있다. 언제 어디서 벌어진 일인가라는 질문, 나는 그 질문을 엄청나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것이 제국주의적 미덕이라면, 식민지로 살아가는 나라에서는 그 시간과 공간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식민지의 속성을 탈피하는 첫 번째 돌파구일지도 모른다.

 

보편적인 것이 나쁘냐,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보편주의 만큼 식민지를 통치하는 제국을 편하게 하는 장치가 또 있겠느냐? 네가 조선의 식민주의 백성이라도, 당신만 잘 하면 다 되는 거다, 그게 왜정 시대에 조선인 제자를 정말로 사랑한 선생이 해줄 수 있는 얘기가 그것 밖에는 뭐가 있겠는가?

 

물론 너만 잘 하면 된다는 얘기는, 어디서나 쉽게 하는, 도망가기 쉬운 인스턴트식 해법이다. 그러나 이게 식민지가 가지고 있는 절망과 부딪히면 더욱 크게 증폭되는 것 아니겠는가? 식민지 시대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냥 맞춰 사는 것과 아주 어렵지만 독립을 위해서 뭔가 하는 것, 그런 해법 정도 밖에 더 있겠나? 그 어느 쪽이라도 제 정신이라면 좌절하게 된다. 창씨 개명을 조선인들이 하자고 한 것을 총독부에서 받아들여준 거라는 얘기가 무얼 의미하겠는가?

 

나는 시대를 뛰어넘는 뭔가를 하라는, 일종의 순수예술의 좌우명처럼 우리의 선배들이 걸어놓고 있던 그 예술관이 그렇게 싫었다. 언제 어디서, 최소한 그런 구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얘기들은 자칫하면 제국의 통치술에 말려들게 되는 그런 거라는 의심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고 왜, 그것은 그 다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너만 잘 하면 된다, 그것은 언제나 옳은 말이다. 작은 상황이든 큰 상황이든, 적절한 화각으로 청자를 조절할 수만 있다면 언제나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 같이 식민지적 상황을 종결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또한 위험한 얘기이기도 하다. 모든 말에는 겉말과 속말이 있고, 모든 단어에도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가 있게 마련이다.

 

가을이 한참 깊어가고 있는 요즘, 그림 엽서로 써도 좋을 만큼 예쁜 고양이 사진들을 몇 장 찍었다. 가을볕이 참 좋은 조건이다. 적당히 노랗고 그러면서도 적당히 암물한 기묘함이 묘한 긴장감을 준다.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고양이들도 서로 붙어 있으면서 기분 좋은 실루엣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고양이들과 지금 보내고 있는 시간은 명박 시대의 어두움과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이라는 면에서만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다른 때 보았어도 에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로 2012, 명박 시대의 마지막 해의 가을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해방의 욕구, 그런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던 순간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과로에 의한 피로감으로, 그야말로 대선이 오는 그 날이면 나도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악으로 버티던 시간의 기억이기도 하다. 작은 휴식과 위안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휴식이고 어디부터가 일탈인가, 그런 질문을 가끔은 해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순수를 외쳤던 그 모든 것들은 제국 통치술의 값싼 뻰치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예술을 원했지만, 문방구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싸구려 그림 엽서 같은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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