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이 블로그에 책 얘기가 올라오면, 책을 사야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지 마시라. 만원 넘는 책 사는 거 보통 일 아니다. 도서관에서 읽으시고, 그래도 꼭 더 보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가지고 싶다, 생각하면 그 때 사시라. 책 사라고 여기에 짧은 감상 단문 올리는 거 아니니까, 제발 부탁이니 어지간하면 도서관에서 빌려서라도 읽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책 사라고 하는 거라고 그런 택도 아닌 얘기 하지 마시기 바란다.)

 

이사카 코다로의 <마왕>이라는 책은, 내 기준으로 하면 두 시간짜리 책이다. 소설이고, 가벼운 소설이다. 그리고 한참 더 쓸 것 같은데, 얘기가 끝나버리는, 그야말로 경소설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풀었으면, 그 다음에 최소한 3~4권, 그리고 아마도 7~8권은 더 나가는 진짜 싸움에 관한 얘기가 있을 법한데, 자, 이제 난 싸우기로 마음을 먹었어, 그리고 끝나버린 책이다.

 

그래서 가벼운 책이다.

 

뭐야, 서론부만 쓰고, 이제 정말 싸울까 싶은데, 이게 끝이야?

 

그렇지만 내용은 무거운 책이다. '사소설'은 아니고, 우리들 내면에 있는 무기력을 파고 들어가면서, 너네들 이러다, 당한다, 그런 말을 해주고 싶어하는 책이다. 한국인들이 소비하는 일본 소설은 대부분 사소설이다. 그러나 '마왕'은 사소설은 아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망했다. 사소설말고, 일본 내에서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은 소설들이 한국에서는 다 망한다. 지독할 정도의 편식이다.

 

자, 틀은 그렇고...

 

복화술과 운, 두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언어의 세계에 속한 얘기, 하나는 수학의 세계에 속한 얘기이다. 두 얘기를 이어주는 것은, 형제라는, 그것도 어렸을 때 자동차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어서 겨우겨우 살아남고, 겨우겨우 정규직, 그리고 겨우겨우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일본의 두 형제가 서로 다르게 소화하고 있는 두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을 보게 된 동기는...

 

<88만원 세대> 후반부를 슈베르트의 마왕으로 마감한 적이 있는데, 같은 모티브를 가지고 일본의 파시즘과 헌법 문제를 다룬 책이 있다고 누군가 집으로 보내주어서...

 

그래서 읽어봤는데, 이 책은 아이디어가 주는 번뜩함으로 무엇인가 깨달았다라고 하는 책 보다는, 이런 식이라면 나는 이렇게 얘기를 풀어보고 싶다라고 하는, 창작의 욕구를 주는 책 같았다.

 

물론 일본 사람들에게, 그리고 점점 더 파시즘으로 가고 있는 일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나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혔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나는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보고 싶다, 창작욕을 주는 책이다.

 

더블 플롯을 시도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교과서처럼 사서 두고 보아도 좋을 책이다.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는데, 안도를 1인칭 시점으로 하는 1부, 그리고 시오리를 1인칭 시점으로 하는 2부, 왜 준야가 아니라 시오리야? 이거야말로 테크닉이다. 정말로 소설을 쓰고 싶고, 약간은 테크닉을 사용하고 싶은 사람, 어쨌든 일본 30대 소설가 중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평을 듣는 이사카 코타로가 왜 테크니션인가, 하는 느낌을 받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촛불집회가 왜 안되는가 혹은 왜 문제인가, 그런 생각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좋을 것 같고, 잘 팔리는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는, 테크닉의 복기 교과서로 소장해서 틈틈히 참고할 만한 책인 것 같다.

 

테크닉 만으로는 절대로 얘기가 나오지 않지만, 아무리 좋은 얘기라도 테크닉이 없으면 얘기 구성 자체가 어렵다, 그런 생각이 이 <마왕>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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