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바쁘다는 얘기를 안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바쁘다고 하는 게 성의 없는 변명처럼 느껴졌다. 나야 별로 하는 일이 없어서, 일상을 잘 정리정돈하면 그렇게 바쁘다고 얘기할 정도는 아니다. 아이들 똥 기저귀 갈아줄 때에는 정말 바빴다. 일상이나 마나, 살 자체가 개판이었다. 아이들이 학교 들어가고, 자기 보고 싶은 만화 정도는 알아서 볼 정도가 되면서 그렇게까지 바쁠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이제는 밥 먹기 전에 식탁 닦는 것도 어린이들이 알아서 한다. 

이번 주 점심을 내내 라면을 먹었다. 라면 먹는 거 싫은데,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가 없다. 몇 달 전까지는 그래도 점심 때라도 좀 편하기 위해서 나가서 먹기도 했는데, 그건 정말 어렵다. 오늘은 간만에 콩국수라도 해먹으려고 미리 재료들을 준비했었는데.. 시계를 보니까 벌써 두 시다. 급하게 보내야 할 게 있어서 그냥 라면 억었다. 오늘은 아내가 저녁 때 약속이 있어서 늦게 들어온다. 어린이들 돌아오는 시간 되면 땡이다. 살면서 이렇게 길게 매일 라면을 먹은 적이 없었다. 한 달에 한 개도 안 먹은 적도 많고, 몇 년씩 안 먹던 시절도 있었다. 맛이나 재미로 먹는 거야 상관 없는데, 바빠서 라면 먹으면 괜히 기분 안 좋아졌었다. 무슨 엄청난 일을 한다고! 

작년 11월에 아버님 쓰러지시고, 어머님 치매가 심해지시고, 이래저래 정신이 별로 없었다. 둘째가 코로나 확진으로 자가격리하는 일도 얼마 전에 벌어지고.. 

나름 비상 상황은 비상 상황이다. 8월까지 강연 등 외부 일정은 지금 약속된 약간의 것만 하고, 더 이상 하지는 않기로 했다. 원래도 강연 별로 안 하는데, 그것도 지금은 어려울 것 같다. 아내는 요즘 아주 바쁜데, 당분간은 점점 더 바빠질 것 같다. 결국 내가 일정 조정을 하는 수밖에 없다. 

급하게 밀린 것들 이제는 처리 안 하면 거의 비상상황이 올 것 같다. 문 걸어 잠그고 글 쓰는 거 원래 별 취향 아니라서 그렇게는 잘 안 했는데, 여름까지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유세 떠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상쾌하지는 않다. 그래도 어쩌겠냐. 발 앞에 떨어진 불은 일딴 끄고 봐야지. 그리하야 당분간 조건부 칩거 시작. 

'책에 대한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싱숭생숭한 밤..  (4) 2022.06.02
잠시, 노회찬  (4) 2022.05.25
물고기 반지  (0) 2022.05.25
어느 일요일 저녁..  (1) 2022.05.22
변화..  (1) 2022.05.21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