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북으로 공산당 선언문 샀다. 세상 참 좋아졌다. 대학교 2학년 겨울에 학교 도서관에서 뜨문뜨문 읽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에는 경제학 교과서도 그렇고, 우리 말로 읽을 수 있는 게 진짜 별로 없었다. <자본론>도 그 시절에 읽었다. 그 시절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처음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경제학이 뭔지도 얼떨결에 점수 맞춰서 대학에 갔었다. 경제학 별로 재미 없어서 재수할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친구들하고 술 처먹다가 이래저래 재수할 시기를 놓쳤다. 2학년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자본론 같은 책들을 읽었는데.. 남들은 어렵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경제학 진짜 별 거 아니라고.. 그냥 박사까지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한 것 같다. 대학원은 국제경제학 전공이었는데, 불어가 어려워서 그렇지 내용은 진짜 재밌었고.. 박사 과정 때 경제 철학을 전공하려고 했었는데, 동구가 무너져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때 약간 맘고생한 거 빼고는, 박사까지는 진짜 '껌값'에 가까웠다. 그 시절에는 수학만 왠만큼 하면 그렇게 어려운 과목이 별 거 없었다. 수학과 관련된 과목에서 과목에서 다들 점수를 왕창들 까먹었는데, 진짜 수학과 수학이 어렵지, 경제학과에서 하는 수학은 그렇게까지 맛탱이 가는 수준은 아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선형대수 공부할 때, 진짜 너무너무 재밌었다. 완전 세상이 새로 보이는 느낌이었다. 햐, 이런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배웠어야 나의 10대가 훨씬 즐거웠을텐데. 토폴로지도 완전 신세계, 기하학 다시 공부하면서 고등학교까지의 배운 수학이 허무해졌다. 이런 재밌는 세계가 있었는데, 별 의미도 없는 문제풀이만 죽어라고 배웠던지.. 

지금 돌아보면, 좀 재수 없는 얘기지만, 초등학교 입학하고 박사 끝날 때까지, 그야말로 한걸음에 달렸던 것 같다. 대학교 3학년 여름부터 전민련 만들던 시절에 서울민중연합, 서민련에서 1년 조금 안 되게 비상근 간사로 일했었다. 일이라고 해봐야 김수행 선생 같은 양반들 시민 강의하는데, 강의 수발 들고 조별 모임 지도하고, 뭐 그런 거였는데.. 결국 경찰이 털어서 며 사람 잡혀갔고, 나는 그냥 강좌 들으러 온 학생으로 처리되어서 쪼르르. 그런 거에 비하면, 그냥 수업 듣고, 시험 보고, 논문 쓰는 건 덜 위험하고, 맘고생도 훨씬 적은 일이었다. 남들은 감옥도 가는데, 이 정도도 못해?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공산당 선언문 다시 읽으니까, 처음 이거 읽던 그 시절의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한국이나 프랑스나, 그 시절에는 나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 삶은 그냥 그랬다. 그걸 진작에 깨닫고, 얌전하게 처박혀서 애들 보고, 글이나 조금씩 쓰는 걸로 나의 노년이 시작되었다. 

손에 가슴을 얹고 지금 이 순간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잠시 눈을 감았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타노이 미니, 북쉘프 스피커! 며칠 전부터 이 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진짜 원하는 것도 별 거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아무 것도 없는 삶을 몇 년째 살아간다. 아마도 이 상태를 눈을 감는 순간까지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순간이 되어서야 '고스트의 속삭임'이라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문은 '고스트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좌파 에세이에서 청년 좌파에 대해서 얘기하는 3장은 '고스트의 속삼임'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기로 했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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