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대학생이 되었을 때, 가끔 해보는 생각이다. 

그 중의 1번 질문은 지금 내가 다시 대학생이 되어도 자본론을 읽을 것인가, 그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여전히 트럼프를 사랑하지 않게 될 이유를 알려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미국은 지금 위기다. 바이러스 대처 개판이고, 인종 갈등 폭탄이고, 중국이랑 삽질 중이다. 

"미국이 원래 그래", 그런 비겁한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본주의의 모순'이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물론 손쉽기는 하지만 이것도 비겁한 방식인 것은 마찬가지다. 

대학교 2학년 가을, 처음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자본론을 읽었다. 

한열이가 죽고, 아직 전또깡이 대통령이던 시절.

돌아버리겠네. 헤겔부터 봐야겠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펼쳤다. 

An und fur sich.. 

이게 문자야? 즉자는 무엇이고, 대자는 또 무엇이냐? 

그 시절에 헤겔을 읽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 당시 철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김흥중 선배였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자본론 세 권을 다 읽었다. 

나중에 유학가서 불어 까막까막하던 시절, 자본론 독강은 나에게 아주 높은 학점으로 전체 평균을 아주 많이 올려주었다. 

자본론을 읽고 나면 이젠 못 읽을 책은 없다. 천문학이나 양자 역학 같은, 자본론 시절에는 모르던 과학 얘기 일부를 제외하면 더 이상 난이도 높은 책은 지구별에는 없다. 

자본론만 읽은 게 아니라 자본론 4권으로 흔히 불리는 힐퍼딩의 금융자본론 그리고 로자까지 읽었다. 

이재영 살아있던 시절, 그가 권영길 등 원로급 인사들 앞에서 힐퍼딩 강의를 좀 해달라고 했다. 

전원 재웠다. 

한국사회경제학 학회에서 로자 얘기로 김수행 선생 등 앞줄에 앉아계신 원로들, 전원 재웠다. 

20대의 내 강의를 듣고 자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30대가 되면서 나는 더 이상 힐퍼딩이나 로자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그만 재우자. 같은 얘기를 스머프 버전으로 하기 시작했다. 로자 얘기와 완전 똑같은 얘기를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로 얘기했다. 가끔은 공각기동대 버전으로 했다. 확실히 덜 잔다. 

최근에 20대와 30대 자칭 보수들을 만나서 좀 길게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자본론을 읽었다는 변호사 한 사람 때문에 좀 충격을 받았다. 

하긴 자본론을 읽고도 명박 옆에 있는 사람들을 좀 안다. 김문수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로는 김문수는 잘 모른다. 최근에 들은 얘기로는, 밖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개차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재오는 좀 안다. 김수행 선생 강의 준비를 하고, 버스 운전수 등 당시 노조 만들 준비를 하던 사람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치던 시절이 있었다. 이재오랑 운동하던 시절이다. 80년대에 민중당의 이재오가 4대강 전도사가 될 줄은 정말 아무도 몰랐다. 

자본론을 읽으면 확실히 전화번호부급 고전 중에서 못 읽을 책은 없게 된다. 두꺼운 책은 있어도 세 권짜리 두꺼운 책은 없다. 

학부 때 자본론을 읽으면 박사과정까지는 그냥 달려도 된다. 그 이상 어려운 과목은 수리통계학 혹은 미분방정식 정도다. 그것도 선형대수부터 차분차분 하면 된다. 

나는 공부도 잘 못하지만, 다른 건 더더군다나 할 줄 모른다. 내가 다시 대학생이 된다고 해도 뭔 특별한 재주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아버지가 갑자기 부자가 되어있을 확률도 제로다. 

그리하야..

2020년에 내가 다시 대학생이 된다고 해도 나는 다시 자본론을 읽을 것 같다. 그리고 서른 살 이후의 내가 그런 것처럼, 자본론을 읽은 티를 내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자본론을 읽고 누구한테 그걸 읽었냐고 물어보는 인생은 꽝이다. 읽고 혼자만 생각하면 중간은 간다. 자본론의 효과는 그 자체로는 없고, 그걸 읽고 다시 보는 그 다음의 책에서 나온다. 이제 지구별에서 못 읽을 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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