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인리: 대정전 이후]

시간을 다투는 중요한 프로젝트의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라서 글쓰기를 포함한 다른 일의 비중을 줄이고 있다. 그래도 오가며 틈틈이 책을 읽는다.

최근에는 재주 많은 생태 경제학자 우석훈이 새로 펴낸 소설 『당인리』(해피북스투유 펴냄)를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자와의 인연 때문에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급한 일을 미뤄두고 읽을 정도로 몰입감이 있었다. 덩달아 배운 것도 많았고, 생각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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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인리’가 뜬금없다면 평소 ‘에너지’나 ‘부동산’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다. 서울시 마포구 당인리 발전소는 국내 최초의 화력 발전소다. 이곳에 한강과 맞닿은 시민 공원이 예정되면서 덩달아 주변 부동산 시세가 들썩였다. 그러고 나서, 뜻밖에도 지상의 발전소가 해체된 대신에 지하에 서울시 전력 수요의 20% 정도를 해결할 수 있는 LNG 발전소가 들어섰다.

이 소설의 주요 무대는 바로 당인리의 지하 LNG 발전소다. 한국 문학사에서 한국전력공사 자회사(중부발전) 직원이 주요 등장인물을 맡았던 적은 아마 처음이지 싶다. 하지만 한국전력공사에서 이 책을 단체 구매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왜냐하면, 대정전(전계통 정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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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나주에 상당한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다. 나주 한국전력공사와 전력거래소가 쑥대밭이 되면서, 전력거래소의 전국 전력망을 통제하는 시스템(EMS)이 파괴된다. 애초 대정전이 발생하면, 전력거래소가 EMS를 통해서 복구를 주도한다. 그런데 바로 그 중앙이 부재한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주요 시설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준비해 놓은 비상 발전기가 있다. 하지만 그런 비상 발전기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 시간뿐이다. 한국전력공사와 전력거래소가 파괴되고, 청와대는 전국적인 소요 사태를 걱정하며 제주도로 도피한다. 몇 시간 안에 복구가 이뤄질 리 없다.

결국, 몇 시간 만에 전국은 지옥처럼 변한다. 대혼란은 신호 체계가 마비된 도로부터 시작된다. 자동차가 멈춰 선 도로가 마비되고, 공장도 멈춘다. 고층건물에서 불이 나도 전기가 없으니 펌프로 물을 퍼 올리지 못해 진압이 어렵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병원에서 발생한다. 전기에 의존해 환자의 생명을 지켜주던 장치가 가동을 멈추면서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이런 상황에서 중부발전과 서울에너지공사 직원 몇몇은 당인리 발전소로 서울의 전기를 되살릴 궁리를 시작한다. 그리고 부재한 나주 전력거래소의 전국 전력망 통제 시스템(EMS)을 당인리에서 되살려 서울뿐만 아니라 수도권 더 나아가 전국의 전력을 살릴 방법을 모색한다. 그들의 도전은 성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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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흥미로운 포인트는 여러 가지다. 한국의 전력 산업 안에 ‘원전파’와 ‘LNG파’가 있다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었다. 이 둘은 에너지 시스템의 ‘중앙 집중’과 ‘지방 분산’의 대립으로 변주될 수도 있고, ‘에너지 기득권’과 ‘에너지 전환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변주될 수도 있다. 이런 갈등의 틈바구니 안에 문재인 정부가 있다.

우석훈은 한국전력공사와 그 자회사를 몇 년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그 상황을 나도 알고 있다.) 그 기회를 그는 ‘참여 관찰’의 기회로 삼았던 모양이다. 그때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가 이 소설 곳곳에 녹아 있다. 한국의 ‘전기쟁이’들의 사는 모습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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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무대는 2020년대의 어느 시점이다. 문재인 정부 또 그 임기를 마무리하고 지금의 여권이 그대로 정권 재창출한 후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허구와 현실을 섞어서 말하자면, 문재인 정부 다음 정부에서 대정전이 일어난다.)

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86 세대’가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은밀하게 뒷거래를 했던 청와대 산업 비서관과 과학기술 비서관의 모습, 대정전이 났을 때 시민의 안전 따위에는 관심 없는 모습 등은 우석훈이 자신과 같은 또래(86 세대)의 공적 책임감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86 세대 권력층이 특전사를 호출하고, 총질을 하고, 사람도 죽는다. 상징적이다.)

평소 에너지 산업의 여러 이해당사자와 교류가 많았던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소설 속 주인공 여럿과 현실의 특정인이 연결된다. 긍정적으로 묘사된 사람도 있고 부정적으로 묘사된 사람도 있다. (다행히 에너지 문제를 오랫동안 취재한 기자는 안 나온다. 고맙습니다.) 구경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미있고, 당사자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수도 불편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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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 호평(“있을 법한 재난을 현실이 아닌 책으로 만났다는 안도감과 이것이 현실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주는 소설이다.”)했으니 영화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아닌 소설을 읽고서 인정하기로 했다.

우석훈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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