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돼지 농장으로 출근한다', 막 다 읽었다.

너무 친했던 친구의 책인데, 진짜 뒤늦게 읽었다. 마침 작년에 마이크로 그리드 한참 작업했던 적이 있어서, 정말 재밌게 읽었다.

도헌이는 친구기는 친구인데, 친구라기 보다는 내가 많이 배웠던 관계다. 참 똑똑하고, 참 잘 났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이런 친구를 알았다는 게 참 자랑스러웠다. 아내한테도 여러번 얘기해서, 아내도 좀 안다.

성공한 50대 남성의 좀 잘 나가는 - 그래서 좀 재수 없는 - 그런 느낌이 싹 빠지지는 않았다. 그게 유일한 책의 단점인 것 같다. 누구나 다 그런 고비를 넘어갈 수는 없는 거니까.

사실 난 친구가 그렇게 사는지도 잘 몰랐다. 금융계 어딘가 가서 엄청 잘 나간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걸 다 내려놓고 돼지농장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뭐 어지간하게 하겠지.. 그랬다.

장하준 생각이 얼핏 났다. 장하준과는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다. 지금은 중국 대사로 가 있는 장하성 선생과는 그보다는 자주 봤다. 장하준은 잘 모르지만, 그의 부친과는 같이 일을 했던 적이 있다, 꽤 긴 기간 동안. 그가 산업부 장관이던 시절이다.

장관이 뭘 하자고 하면, 결국 돌고 돌아서 내 책상 위에 올라온다. 그러면 나는 비상 걸고, 대략 20명 정도의 사람들과 밤을 새운다. 2박 3일.. 그 짓을 꽤 길게 했다. 툭하면 밤을 새우기는 했는데, 밤새운 게 보람 있었던 산업부 장관으로는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게 장하준의 아버지였다. 나머지 넘들은, 대체 왜 나와 동료들의 건강을 깎아가면서 밤을 새웠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한동 총리 시절에도 밤 많이 새웠다. 그 때도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딱 두 사람이 밤을 세워서 뭔가 써줘도 보람 있던 기억으로 남는다. 장하준은 그런 아비의 아들이라서, 만나기 전부터 뭔가 많이 접어주고 들어갔다.

대표적인 엄마 친구 아들들이다. 나는 그냥, 엄마 아들이다. 맨날 혼나고, 아직도 혼 난다.

도헌이 책을 보면서 장하준을 만나던 시절이 잠시 생각이 났다.

책을 덮고 잠시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장하준 보다 도헌이가 더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삶이 그래서 그런지, 도헌이에게는 먹물 기운과 금융 기운 같은 건 이제 다 빠진 것 같다 (아직 아저씨 기운은 좀 남은 것 같은..)

장하준의 인생을 생각하면, 아직도 남아 있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설레임은 없다. 도헌이는 이제부터 그가 꿈꿨던 마을의 클라이막스가 기다리는 것 같아, 설레임이 있다.

그 설레임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꿈꿔도 좋을 것 같다.

(둘째한테 올해는 도헌이네 마을 축제에 갈 거라고 했더니, 얘가 어린이집에서 무슨 설레발을 쳤는지, 선생님들도 가고 싶으시다고 하신다.. 다 가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설레임의 공유 같은 게 책을 덮고 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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