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은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까 뭘 안 한다고 하는 일이 내 일 중에서 제일 크고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조그만 경제방송을 준비하는 게 있는데, 자문은 해줄 수 있지만, 진행은 못 하네요.. "네, 당연히 안 하지요." 몇 년 전 같으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네 고맙습니다, 그러고 했을 것 같다. 그 몇 년 사이에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책은 요즘 인기도 없고, 사회과학은 비주류에서 더 비주류로 내려 앉았다. 당연히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제 뉴스 거리도 아니고. 공보식 논리로 하면, 뉴스 밸류가 없다. 아예 없고, 전혀 없다.

좀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게 갑갑한 일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원래도 비주류의 비주류. 비주류로 살아가는 게 전혀 이상하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다 (그래도 술은 많이 줄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당당한 주류.. 왜 이러고 사는지 몰라.)

공부라는 게, 화려한 거 좋아하는 성격의 사람들은 하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씨 뿌리고, 김 매기까지 하는, 그런 노가다성 농사일과 공부가 비슷하다. 추수의 보람은 있지 않느냐? 추수절이 다가오면 누군가 차떼기로 도리를 쳐가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누군가의 입에는 들어가지 않았겠어, 이렇게 농사 노가다 일을 보람으로 생각하는 성격, 그렇지 않으면 공부는 하기가 어렵다.

철학은 그래도 때로 폼이라도 좀 나지, 사회과학은 그렇게 폼 나는 일도 별로 없다 (서울대 김상환 선생이 박사과정 들어갈 때 철학과로 안 가고 그냥 경제학과로 갔다고, 니가 그럴 수 있느냐고 쓴 편지를 얼마 전에 아내가 짐 정리하다가 찾아냈다. 참,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지..)

그래도 쭈구리고 앉아 책 읽고, 종이에 뭔가 도표 같은 거 정리하고, 억지로 시간 내서 아이들하고 산책하고.. 이런 삶이 나에게는 잘 맞는다.

가끔 좀 더 화려한 데로 나오라고 하는 얘기들이 있기는 한데.. 나는 그렇게 무대에 서는 것보다는, 그냥 이론들 정리하고 숫자 비교하는 그런 공장일 같은 거, 뭔가 만드는 게 더 좋다. 그러니 지금까지 명랑을 잃지 않고, 웃으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거고.

뭔가 만드는 게, 그 순간이 나는 좋다.

연구원장 같은 제안은 심심치 않게 온다. 듣지도 않고, 싫어요, 그러고 만다. 지금 이 나이에 원장 해서 뭐하게. 남들 연구시키는 게 일이 되면서 50대의 마지막 기회를 낭비하면서 날려버리고 싶지 않다.

연구는 자기가 해야지.. 물론 나도 하기 어려운 순간이 오기는 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냥 살살, 조금씩 해도, 우리나라 어느 연구원장보다는 더 생산적이고 재밌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 연구시키는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고속버스로 수십 대분 이상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나도 그 줄 중의 한 명이 되고 싶지는 않다.

책 쓰는 연구원장이 어딨냐? 신문 기고도 자기가 안 쓰는 판에..

팔리는 건 나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직장 민주주의 책 정도의 의미와 품질을 가진 책, 3~4권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모피아'급 수준의 얘기도 3~4개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화려하고 넉넉한 삶 보다 내게는 100배는 가치 있어 보인다.

그러다보니까, 뭘 안 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 상대 심통나지 않게 하는 게, 요즘 내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빈번하고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희한한 50대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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