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둘째, 올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아이가 폐렴 없이 봄을 넘겼다..) 

 

2018년의 마지막 날이다. 하여간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해였다. 뭐든, 잘 안되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올해 3, 처음으로 둘째가 폐렴 없이 봄을 맞았다. 그거면 되는 거다. 그래서 올해는 봄이 시작되자마자, 무조건 성공한 한 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좋은 일이 또 하나 있기는 하다. 이래저래 아내 연봉이 좀 올라서 내년부터는 아내 연봉으로 우리집 생활비가 된다. 오 예. 퇴직하기 전에는 우리집 생활비보다 한참 높았지만, 지금 그거 따질 형편은 아니고.

 

애들 보면서 뭔가 한다는 게, 진짜 깽깽 발 짚고 올림픽 나가겠다는 것과 비슷하다. 별로 하는 게 없으면 건강이라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이제는 뭘 해도 무리다.

 

그래도 내가 잘 하는 게 하나는 있다. 남의 일 돕는 건, 이건 정말 잘 한다. 내 일이 제대로 안 되니까, 남의 일이라도 열심히 도와주고. 내 책은 못 팔아도, 남의 책은 좀 팔아줬다. 심지어 남의 영화도 좀 팔아줬다.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기는 재주라도 있으니까 아직도 내 입에 밥이 들어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왜 이 모양 이 꼴로 연말을 맞게 되었는지,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하나하나 이유가 있기는 하다. 이건 이래서 힘들고, 저건 저래서 어렵고. 그렇지만 구차하다. 그냥, 망한 해에 불과하다.

 

완전히 헤매고 망한 해가 맞기는 하지만, 숨 고르기 하고 넘어가는 한 해라고 생각하면 훨씬 마음이 편하다.

 

흐르는 물살 속에 거꾸로, 이런 멋진 건 아니고 그냥 헤매는 느낌의 한 해를 보냈다. 책은 어렵고, 사회과학은 더 어렵다. 그렇지만 뒤집어서 생각하면, 아무 보람도 없는 것은 아니다.

 

둘째 아파서 집에 들어앉으면서 언제까지 책을 쓸까, 좀 고민을 했다. 아내는 적당한 데 취직자리 생기면 그냥 나가보라고 말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내가 그냥 나가버리면 집은 난가가 된다. 방법 없다.

 

올해는 헤매기는 했지만, 책에는 별 문제 없는 것 같다. 50대 에세이는 삶을 정말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제 나는 앞에서 뛰는 스프린터 느낌으로는 할 수가 없다. 더 뒤에서 후방 지원군 같은 역할을. 그것도 막상 하려면 쉽지 않다.

 

올해는 정말 법인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자금 흐름이나 여유 시간 등 도무지 여력이 잡히지 않아서 내년말로 미루었다. 그냥 지나간 일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앞으로 올 날을 생각하는..” (요 말은 고정식 특허청장이 내가 사직서 내고 쉬는 동안에 해준 얘기다.)

 

1년은 더 쉬면서 삶을 돌아볼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왜 책을 계속 써야 하는지, 이유도 생겼다. 언제부터인지, 내 삶도 아주 사회적 삶이 되었다. 내가 지금의 삶이라도 누리고 사는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의 정성 덕분이라는.. 사회과학이 좋을 때면 할 만큼 했다, 이래도 되겠지만 지금은 난국이다. 나 하나 힘을 보탠다고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안 쓴다고 하면 그것도 좀 그렇다. 그래도 한국 최초의 사회과학 전업작가라고 불렸다. 그런 나도 상황이 힘들다고, 손 털고 나갔다고 하는 건 좀.

 

내가 책에서 바라는 것은 엄청난 것은 아니다. 딱 우리 집 생활비 만큼의 인세. 꾸역꾸역, 평균 내보면 그 정도는 하는 것 같다. 몇 년은 더 버틸 여력은 된다.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 삶이나, 흐름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나는 괜찮은 흐름을 탔었다. 그리고 박근혜와 함께 망했다. 정확히 말하면 순실이가 남양주 종합촬영소 팔아먹을 때, 나는 그걸 못 막았다. 그 때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아이는 아프고, 내 일은 안 되고, 동료들은 헤매고, 처박고..

 

무슨 대단한 만루홈런이나 연타석 홈런, 그런 걸 기대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병살타 치지 말고, 희생번트 정확하게 대고, 가끔 유의미한 장타. 그 정도면 내 능력으로는 충분하다. 그리고 어디 부상 나서 게임 거르지 않고, 시즌 소화하는. 지난 몇 년간을 이렇게 살았다.

 

그 대신 정말로 나를 돌아보고, 기본에 해당하는 것들을 다시 해본다.

 

최근에 책 서문 소리내서 읽는 걸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달리 할 것도 없고.

 

다큐 감독하고 통화하고 나서, 제일 처음 생각한 게 서문 읽기였다. 근데 막상 해보니까 생각보다 좋다. 마치 도 닦는 것 같다. 잡념도 없어지고, 삶의 단절 같은 게 생긴다. 그리고 무슨 책을 할지, 내 맘이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그런 것도 별로 상관 없다. 그렇지만 내가 걸어가는 길을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가지게 될 것 같은 효과가 생기기는 할 것 같다. 그래도 고스톱 쳐서 책이라도 쓰게 된 것은 아니다. 별로 피나는 노력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멍하니 않아서 뭐라도 되겠지,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

 

한 해가 간다. 몇 년째 변함 없이, 올해도 망했고, 올해도 망했고, 에 또 올해도 또 망했네.. 이러고 있다. 이제는 망하는 게 내 삶의 일부분인 것처럼 익숙하다. 괜찮다. 올해도 망년회는 어김 없이 했다.

 

내 책들은 시대보다 너무 빠르다는 평을 받는다. 미세먼지 문제로 데뷔한 게 2005년이니까, 벌써 13년 전에 그게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했던.. 시대보다 늦으면 판 접어야 하지만, 아직은 시대 보다 빠르다. 그러면 된 거다.

 

그리고 나는 이 모양이지만, 동료들이 열심히 일 한다. 가끔은 나도 좀 묻어가고.

 

내년에는 농업 얘기와 젠더 얘기로 들어간다. 젠더 얘기가 중간에 끼어들어오는 바람에 도서관 얘기가 후년으로 밀렸다. 사실 직장 민주주의 책이 좀 팔렸으면 내년에 바로 도서관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게 영 시원챦다. 그래서 도서관 책은 내가 좀 더 인기권으로 올라온 다음에 하려고 다음 해로 미루었다 (방법이 없다. 도서관 얘기는 그냥 진루타로 쓸 수가 없는 주제라서. 그 다음에는 나도 카드 없다.)

 

내년에는 책 세 권, 여력이 되면 초고 한 권 더.

 

지난 몇 년간 했던 작업들 중 묵직한 것들이 실제로 세상에 나오는 것은 후년이다. 올해도 망하는 한 해를 참고 버텼고, 내년도 망할 것이 뻔한 한 해를 참고 견디려고 한다.

 

미리 생각한 대로 많은 것이 진행되면, 일본에서 출간을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예전 <촌놈들의 제국주의> 시절에 일본에서 부탁받은 게 있었는데, 그걸 미루고 미루고 있는 중이다. 50대 중반에는 그 일을 처리하려고. 내 삶의 많은 시간표가 그 일정에 맞추어져 있다. 물론 되면 좋지만, 이런 데 목숨 걸고 살지는 않는다. 애들 키우면서 생각하기에는,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일 뿐이다.

 

2018, 올해를 거치면서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뭔가 거대하고, 이루기 어려운 걸 이루는 허들식 인생, 사실 별로 재미없다. 하면 뭐할 건데? 또 다음 허들을 향해? 그래서 그걸 다 넘으면? 도라도 깨치는 거냐? 아니, 저기 더 높은 허들을 향해.. ? ? 병신 아냐? 하느님이 너 죽어라고 허들이나 뛰다가 인생 낭비하라고 이 세상에 보낸 건지 아냐?

 

목표라는 것도 부질없고, 성공이라는 것도 부질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열심히 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되면? 되면 되는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안 되도 그냥 멍하고 있었던 건 아니라서 그걸로 됐다.

 

뭔가 이루고 아니고, 그건 아무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을 좀 살피고 보살피고, 그렇게 사는 게 진짜 인생이다. 허들만 뛰다가는, 자기가 왜 사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병신 아냐. 신이 환상해서 내 주변에 있을 수도 있다. 그를 돌보는 것은 우주를 돌보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정신 없이 뛰다보면, 옆에 신이 환생에서 와 있든, 뭐가 주변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죽어라고 뛰기만 한다. 그게 병신이다.

 

2018, 난 병신처럼 살지는 않았다. 되는 일이 별 없어도. 그건 괜찮다. 주어진 시간이 아직도 많다. 우리는 우정과 환대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아닌가? 냉담하게 남 갈구고, 욕이나 서로 퍼부으라고 우주의 에너지가 모인 이 시간 속에 그냥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듀, 2018. 그리고 보나마나 엉망진창이고, 제대로 되는 일이 없을 것 같은 2019년을 맞는다. 그래도 나는 그 속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올해도 되는 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올해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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