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강연할 때.. 저 시절만 해도, 참, 나에게도 힘이 남아있었다..) 

 

1.

몇 년 전만 해도 강연은 꽤 잘 되었다. 진중권, 홍기빈 등과 했던 건대 강연은 천 명인가 왔었다. 나 혼자 해도 500명 정도 되는 방은 너끈히 채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장하준 선생 강연이었다. 연대에서 강의하던 시절, 매주 한 명씩을 불렀다. 공식적으로 내가 줄 수 있는 돈은 10만 원.. , 염치 없기는 한데, 그 대신 나도 품앗이로 다른 걸 도와주기로 하고, 그렇게 했었다. 300명 정도 들어가는 대형 강의실을 내가 빌릴 때, 괜찮겠냐고 걱정들을 했다. 그래도 천하의 장하준인데..

 

그게 어찌어찌 소문이 나서 원희룡 같은 국회의원들도 왔다. 300명 들어가는 계단강의실에 500명이 넘게 왔다. 나중에는 산소 부족으로, 덥고, 숨쉬기 힘들고. 그 시절, 장하준의 인기는 정말로 하늘을 찔렀다.

 

mb 시절, 어쩌면 모두 외로웠는지 모르겠다. 뭐라도 있으면 같이 모여서 니들, 참 고생이 많다”, 그런 걸 나누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강연회마다 사람들이 가득 찼었다. 부산대 강연할 때 300명이 넘게 와서, 정신 하나도 없었던 기억이.. 그 시절에는 그랬다.

 

사회적 경제 책 내고 작년 하반기에 전국을 한 번 돌았었다. 그 때는 작게 돌았다. 지역의 작은 생협이나 협동조합 아니면 시민단체, 20~30명 모인 작은 강의실을 꼼꼼하게 돌았다. 사회적 경제는 크게 모여서 얘기할 주제는 아니다. 작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고, 차비도 제대로 주기 어려운 시민단체의 작은 방들을 돌았다.

 

보통 강연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강연기획사와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기업에서 하는 직원 연수 같은 거를 하면서 꽤 큰 돈을 받는다. 나는 그런 거는 안 한다. 돈 때문에 강연을 한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내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진다. 그럼 그냥 연봉 많이 준다는 데 가서 대충 살았으면 될 거 아냐? 이 나이에 이게 뭐냐! 그렇게 내가 불쌍하게 느껴질 것 같다.

 

강연 시장에서는 강연자의 수명을 대체적으로 2년 반 정도로 본다. 전문 강연자로 나서면 한 때 돈을 많이 벌기는 하지만, 그게 2년 반이면 땡, 그게 시장의 시각이다. 이건 완전히 미사리 카페하고 경제적으로는 똑 같은 구조다.

 

미사리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려면 히트곡이 두 곡은 있어야 한다 (영화 <걸 스카우트>에서 최성수 팬이 등장하는.) 두 곡은 있어야 시작할 때 한 곡, 끝날 때 한 곡, 자기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중간에 남의 노래를 부르더라도 한 시간 짜리 공연에 앞뒤는 자기 거로 할 수 있어야 나중에 미사리라도 갈 수 있다.

 

히트작 하나로는 2년 반, 그게 강연 시장의 논리 구조다. 그리고 내내 돌아다니면서 같은 얘기만 하면 두 번째 히트작이 나오기가 어렵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강연업체들이다. 냉정하다. 그 세계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게, 내가 회사 강연을 안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고.

 

2.

촛불집회 이후, 서울이든 지방이든, 강연은 이제 아주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서로 같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어려운 시기는 지나갔다.

 

그리고 유튜브가 커졌다. 돈 때문에 강연하던 사람들은 유튜브로 넘어갔고, 광고 수익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도 세상 사는 방법 중의 하나다. 이래저래 강연은 아주 힘들어졌다.

 

그 사이에 지방 강연은 정말로 더 힘들어졌다. <불황 10> 나왔을 때, 지방의 교보문고를 따라서 전국을 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큰 방이든 작은 방이든, 꽉꽉 찼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와서 강남교보에서 할 때 정말 그 큰 강당이 다 찼었다. 그건 옛날이다.

 

이제 지방의 교보문고에 강의실을 가진 곳은 거의 없다. 채울 수가 없으니 강연을 할 수가 없고, 그러니까 뭐하러 방을 유지하느냐, 그런 거랜다. 광화문에 있던 교보 기획팀이 근교로 이사가고, 그 이후에 책에 관련된 기획들이 급감했다. 그 충격이 지방에서는 더욱 더 충격적으로 온..

 

직장 민주주의 책 나오고, 어쨌든 되는대로 일단 지방 강연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잡힌 게 대구, 인천, 전주, 진주.. 강연장이 없어서 지역의 도서관과 연계해서 할 수 있는 데만 먼저 잡았다.

 

지방 강연이, 참 어렵다. 서울도 사람 모으기가 어렵지만, 지방은 더 어렵다. 그래서 더 안 하게 되고, 그러니까 더 안 가게 되고, 결국 아무 행사도 없는 지역이..

 

내가 내는 모든 책에 강연을 하는 건 아니다. 책 나오기 일상적으로 하는 강연 한두 번 하고 마무리하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강연이 들어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음 작업을 해야 하니까 지난 책 붙잡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적 경제 때 크고 꼼꼼하게 강연을 했었는데, 직장 민주주의는 좀 길게 꼬리를 늘이려고 한다. 낮고, 작게.

 

책에 썼다. “나의 타점은 낮다.” 높은 데 보고 스윙한 책이 아니다. 가벼운 진루타로도 충분하다.

 

원칙은 독자 다섯 분만 있으면 어디든 간다.”

 

유튜브와 디지털의 못하는 것은, 사회는 사람의 일이라는 점이다. 씨앗이 뿌려질 때, 결국 사람들이 만나는 순간이 한 번은 있어야 한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사람의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해는 많은 경우, 수다로부터 시작된다.

 

수다, 이건 내가 좀 한다.

 

물론 나도 언제까지 강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애들 보면서 잠시 시간 내는 거라서 물리적으로 한계도 뚜렷하다. 그렇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직장 민주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이렇게 말하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이상은의 <언젠가는>, 아직도 좋아한다. 언젠가는, 그 기다림 마저도 없으면 삶은 너무 비루하다. 나는 그렇게 비루하게, 그리고 때로 비겁하게, 그렇게 50대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

 

화려하고 불꽃같이, 거대하고 거창하게, 그런 건 이제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다시 올 필요도 없다. 그러나 비루하게, 그렇게 시간을 때우면서 환갑 되는 날만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방송의 인기와 같은 이미지의 도움 없이, 책 그 자체의 힘만으로 세상을 몇 센치라도 움직이는 것, 그 순간을 보고 싶다.

 

그래야 우리 자식 세대에도 책이 여전히 살아있는 나라가 된다. 지금 같아서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책은 오래 못 버틴다. 사회과학이라는 쟝르는 그보다 훨씬 전에 사라지게 된다.

 

예전에 협상하던 시절 태국대 교수랑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다. 책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태국에는 한국과 같은 사회과학 책이라는 게 아예 없다는 거다. 그 때 놀랐다.

 

각고의 노력이 없으면, 우리는 진화가 아니라 퇴화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그 분기점에 서 있다. 가면 안되는 길로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책이라는 광선검을 들고,

 

May the 명랑 be with you!

 

오늘도 외친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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