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고개 시절, 배우 정진영, 이준익과 함께..) 

 

2011년 설날은 영화 <평양성>이 망한 해였다. 이준익은 물론이고, 당시 타이거 픽쳐스를 맡고 있던 조절현도 완전 패닉. 이준익은 은퇴를 선언했고, 전부 멘붕. 이송원과 내가 이 팀에 합류하게 된 것은 <평양성>의 실패로, 더 이상 해 볼 도리가 없던 조철현이 진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시작하기로 한.

 

그 시절 나는 김미화 누님과 나는 꼽사리다만들고 있었고, 책도 그런대로 잘 팔렸다. 그리고 경제 대장정이라고 이름 붙인 일련의 시리즈 책들을 순서대로 정리해가던 중이었다. 글쎄, 블랙리스트 사건이 나중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 MB 후반기, kbs 등 몇 군데 출연하기로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출연진이 바뀌기도 하고, 방송 자체가 없던 일로 되기도 했다. 그 중에 백미는 아예 방송 자체가 없어지기도. 이래저래 괜히 뭐 한다고 해봐야 민폐나 끼칠 것 같아서, tv는 물론이고 공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예 포기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조철현 등 통료와 이제는 전설이 된 아리랑 고개 사무실에서 지지고 볶고. 돈이 없어서 누구 돈 주고 말고 할 거 자체가 없고, 그냥 몸으로 떼우면서 지지리 궁상을 떨던 시절이다. 배우 정진영이 와서 그 시절 밥 사주고 갔던 정도가 기억으로 남는다. 서로 돈이 없어서 뭐 얻어먹을 데도 없고, 그냥 몸으로 때우던.

 

보통 추억은 지나면 적당한 기억으로 미화되거나 아련한 기억으로 남는데, 그 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그런 것도 없다. 그렇게 몇 년을 헤매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겠다, 이사가자.. 그래서 지금의 충무로 사무실로 그 꼬질꼬질한 일상을 버티던 사단들이 전부 이동을 했다. 그렇게 너무너무 힘들고 배고팠고, 그래서 또 서로 싸우게 되었던 아리랑 고개 시절은 끝났다. 그 때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싸웠는지 아직까지도 약간의 앙금들이 남아있을 정도다.

 

<모피아>는 그 아리랑 고개 시절에 썼다. 처음에는 간단한 경제 코미디 같은 거 해보자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된 것인데, 쓰면서 나도 오기가 생겼다. 버전을 거듭하면서 나도 정색을 하고. 마지막 버전까지 가면서, 하여간 나도 고생 할만큼은 했다는 생각이.

 

MB 말기, 마지막 작업은 큰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시간이 맞물렸다. 거기다 이사도 했다. 아내는 병원에 있었고, 나는 아주 복잡한 종료의 부동산 거래를 하면서 진짜 땀 뺐다.

 

그리고는 좀 한숨 돌릴까 싶었는데, 대선판이 커졌다.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실패 이후, 국민연대라는 조직을 만들고 거기에서 대선을 총괄하기로 했는데, 엉겁결에 그 기구의 공동대표를 맡게 되었다. 예전 대선으로 치면 선대위원장에 해당하는 자리다. 나꼽살하고, 소설 발간 막바지 준비하는 와중에 선대위원장 역할을 하고. 그리고 막 태어난 아이는 백 일을 향해서 막 달려가고 있었고. 어수선의 절정이었다.

 

다행히 <모피아>는 반응이 좋았고, 드라마 판권도 금방 팔렸다. 영화 판권은, 드라마랑 기간이 겹쳐서 좀 더 후에 팔기로 했는데, 결국 그렇게 가지는 않았다. 대선은 지고, 모두가 멘붕, 그 시절에 <모피아>가 그런대로 버티면서 나는 차분하게 그 겨울을 버텼다.

 

박근혜 시대에 내가 쓴 얘기를 원본으로 드라마 편성이 잡히지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MB 시대에 내가 움직일 공간이 거의 없었는데, 박근혜 때는 더 했다. 집권한 몇 달간은 그래도 좀 괜찮았는데, 그 후에는 좀 치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조여왔다.

 

그리고 <불황 10>이라는 책이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 둘째가 본격 아프기 전까지, 그런대로 난 큰 변화없이 살던 대로,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그 후에 그 모든 것들은 일단 올스톱’.

 

2년 전 여름이었다. 이젠 정권도 바뀌었고, <모피아> 얘기 다시 살려보자는 얘기들이 있었다. 나도 좀 고심을 했다. 아내에게 물어봤더니 미쳤냐”, 이런 소리 들었다. 얘기를 계속 만들어야지, 옛날에 했던 거 쪼물닥거리는 건 영 아니라는.. 그래서 그 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새로 만든 얘기가 <당인리>.

 

그리고 계속 손에 쥐고 있었다. 아직은 시기가 좀 이르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원래 D-day로 잡은 게 올해 12월이었다. 엄청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저렇게 일정을 잡아보니까 그랬다. 그런데 그렇게 못 했다.

 

아이 둘 데리고 뭔가 한다는 게, 늘 일정보다 늦어지게 된다. 생각보다 어렵다. 몸도 힘들지만, 실랑이하고 있다 보면 좋은 심리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그런 마음이 종종 든다. 그 상태에서 애 보는 건 할 수 있는데,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좀 돌발 변수가 생겼다. ‘국가의 사기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 되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50대 에세이는 생각보다 훨씬 짜증나는 작업이 되었다. 중간에 에디터가 바뀌었고, 그나마 마무리한 에디터는 책 나오자마자 퇴사. 완전히 새로 쓰는 정도로 중간에 크게 한 번 판갈이. 하기 싫은데,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직장 민주주의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작업이 되었다. 자존심을 걸고, 최대한 읽기 편하게 그리고 최대한 낮은 시선으로, 크게 한 번 탈탈 털었다. 그리고 연말이 되었다. 나는 기진맥진.

 

좀 쉬고 싶은데, 이게 쉴 여지가 별로 없다. 아내도 회사 다니느라고 힘들어서 그런지, 요즘은 청소 제대로 안 해놓고, 음식들 냉장고에 정리 안 했다고 집에 오자마자 막 소리지르고 그런다. 어렵겠지, 그러고 참기는 하지만, 몇 년째 웃는 얼굴만 보여줬더니,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소리를 나한테 막 지른다. 아니면 인상 쓰거나. 다들 힘들다. 그래도 그나마 크게 힘들지 않고, 스트레스 덜 받고 버티는 나한테 막 뭐라고들 한다. 그리고 애들도..

 

아빠, 코 묻혔어.”

 

큰 애는 내 바지에 코딱지 붙이고 좋다고 한다. 둘째도 코딱지 붙인다고 막 쫓아온다. 도망간다. 이게 뭔 일이래.. 이러고 산다.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정말 최악의 상황인데, 이게 몇 년째 되니까 특별히 더 힘든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작업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요즘 나는 따로 작업실 낼 형편은 안 된다. 카메라 렌즈 하나를 더 살 필요가 생겼는데, 150만 원 넘는다. 예전 같으면 모델 넘버 나오면 바로 샀는데, 지금은 그러면 당장 생활비가 달랑달랑하다. 술도 한동안 일본 사케 마셨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그것도 소주로 내렸다. 돈이 좀 넉넉해져도 내가 쓰는 돈은 별로 늘이지 않다가, 약간 부족해지면 내가 쓰는 돈부터 먼저 줄인다. 그렇게 지낸지 5년쯤 되는 것 같다. 그냥 참고 지낸다. 나한테 작업실이 필요할까?

 

돈도 돈이고, 애들도 봐야 하고, 이래저래 나와는 좀 거리가 먼 세계의 일이다. 고양이랑 같은 방 쓴다. 서로 나오라고 난리다. 그래도 이런 건 애교라서 즐겁게 생각할 여지가 있기는 하다.

 

<모피아><당인리>는 크게 다르지 않은 작업이다. 그 시절의 동료들이 지금도 그대로 있고, 그래도 다들 그 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아지기는 했다. 덜 싸운다. 다만 내가 그 때보다 몇 배로 힘들 뿐이다. 그 때는 아이가 없었고, 주머니 사정도 훨씬 나았다. 나꼽살 같은 방송도 이제는 안 하고, 책 시장은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졌다. 그래서 인심도 더 사납다. 돌아보면 열악한 요소가 너무 많다. 그렇지만 책을 쓰는 건, 지금 이 시기에 이 얘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땅히 넘길 다른 사람도 별로 없다.

 

나는 연말에 한 번 크게 그리고 여름에 한 번 좀 작게, 일정을 전체적으로 조율한다. 꼭 필요한 얘기라도 지금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뒤로 넘긴다. 농업경제학이 그렇게 넘기고 넘겨서 내년까지 밀렸고, 나머지 것들도 당장 필요한 거 아니면 다 뒤로 넘긴다.

 

<당인리>는 지금 필요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지난 2년 동안 넘겼듯이 또 뒤로 넘겨도 되지만, 이제는 더 넘기기가 쉽지 않다. <당인리> 얘기 후반에 서브 플롯으로 등장하는 발전소가 바로 이번에 비정규직 청년이 죽은 바로 그곳이다. 2년 전, 누적된 문제들이 이제 슬슬 터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이제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다.

 

새로 주변을 돌아보며 정리정돈하는 중이다. 그 김에 잠시 <모피아> 시절을 돌아보았다. 대략 6년 전, 그 기간을 나는 죽지 못해서 살아남은 것 같다. 정말 꾸역꾸역, 모멸과 조롱을 일삼는 사람들의 잔인한 말들을 버티면서 지내왔다. 그래도 내 마음에 원망이나 회한 같은 것은 없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 편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욕한 적은 없다. 가끔 견디기 어렵게 힘들지만, 대체적으로 명랑한 편이다. 그리고 살면서 웃을 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그 정도면 썩 괜찮은 거다.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