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던 원고를 버리고 새로 시작할 때, 사실 맘이 편치는 않다. 88만원 세대 때는 크게 버린 것만 세 번이었다. 소소하게 버린 것들은 셀 수도 없고. 제일 많이 버린 것은 '솔로 계급의 경제학'.. 이건 다 쓴 걸 세 번 버렸다. 방향도 많이 바뀌었고.. 이 책은 잘 안 팔렸다. 시간도 많이 썼지만, 결과도 안 좋았다.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 그렇지만 배운 건 많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썼다는 생각은 지금도 들지 않는다. 최근에 가장 성과가 좋은 책은 사회적 경제 책이다. 이 책도 1장까지는 아니지만 세 번을 다시 출발했다. '88만원 세대'를 빼면 제일 많이 팔린 책은 '불황 10년'이다. 이 책은 한 번에 달렸다. 내 책 중에 처음 만 부를 넘어간 책은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이 책도 한 번에 달린 책인 데다가 실제 집필에 들어간 시간이 3주가 채 안 된다. 그 대신 내내 밤 새면서 달렸던 책이다. '괴물의 탄생'도 한 번에 달렸다. 그건 준비 기간이 워낙 길었다.

나도 책 쓴 기간이 벌써 10년은 넘어갔다. 털고 새로 출발하는 게 어색하거나 이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번에 새로운 것도 있다.

털고 새로 시작할 때, 보통은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깨어나면서 결정을 했다. 술 마실 때는, 에라 모르겠다, 맑은 정신에 결정하자... 그리고 속 쓰리다고 고통 받으면서 새로 쓰기로 결정을 한다.

직장 민주주의 1장을 새로 쓰기로 하면서, 처음으로 술 안 처먹고 결정을 했다.

지금 쓴 게, 골격으로는 나쁘지 않다. 새로 쓴다고 더 잘 쓴다는 보장은 없다. 그저 살짝 맘에 안 들 뿐이다. 이 주제 가지고 이보다 잘 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그럴 정도는 된다. 그래서 버리는 게 더 마음 아프다.

그러나 나는, 현실을 바꾸고 싶다. 늘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현실이 바뀔까, 나에게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좀 어렵다.

그래서 새로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현실은 안 바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도 안 바뀔 것 같으면, 그런 죽어라고 뭔가 쓸 이유가 없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내 눈에는 이 정도면 뭐라도 좀 바뀔 것 같은데, 사세 미약하야 현실에 미치지 못한... 지금 쓴 건 그 수준은 아니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도, 나는 늘 아름다운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산다. 그게 아니면, 굳이 책을 쓰고 있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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