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좀 힘든 일은 지나가서 그런지, 이제는 글을 편안하게 쓰고 싶지가 않다. 물론 내 입장에서 쓰기에 불편한 글에 관한 생각이다. 내가 힘들면 힘들수록, 읽는 사람은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생긴다고, 쓴 책이 대충 스무 권 정도 넘어가면 나름대로 틀을 잡고 정형화시키는 요령이 생긴다. 이걸 틀이라고 얘기하면, 그냥 공장 같은 게 된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오븐에 빵을 굽는 것과 제빵 믹스를 사다가 제빵기에 굽는 것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제빵기에 빵을 구우면, 반은 인스턴트다. 그리고 많이 하다 보면 나름 요령이 생겨서, 쉽게도 하지만 맛도 최소한은 넘어간다. 그렇지만 재미는 없다. 개성도 없다.

어지간한 주제도, 이미 성공했던 틀 몇 개 중에 하나를 골라서 집어넣고 대충 돌리면 글 비슷한 게 나온다. 판매로만 생각하면, 그 편이 더 안전하다. 과거의 책들을 보면, 틀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 것들이 신통치 않다. 그리고 좀 더 안전한 방식으로 간 것들이 기본 이상은 한다.

주제와 양식이라는 두 가지 눈으로 보면, 위험한 주제를 선택하는 방식과, 더 새로운 양식을 선택하는 방식의 결합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문체도 중간에 개입을 한다. 톤앤매너라고 부르는 표현 양식을 이끄는 주된 수단 중의 하나가 문체다.

50이 넘으면서, 나는 이제는 쉬운 주제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건 할 이유도 없고. <솔로 계급의 경제학> 이후로 내가 선택하는 주제들은 다루기 까다롭거나, 시대에 너무 앞 선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니면 <농업 경제학>처럼 너무 시대에 뒤늦거나. 하여간 사람들이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주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양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 내가 사용한 양식이라는 게, 사실 엄청난 것은 없다. 가끔 전위적 시도를 하는데, 출판사랑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결국은 평범한 방식으로 틀을 변형시키고는 만다. 가장 전위적인 것은 여전히 <아픈 아이들의 세대>였다. 그 시절에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이나 쓰고 싶은 얘기들에 대한 설계도를 은유적으로 담아놓았었다. 기자들이, 아주 학을 떼었다. 그 시절의 전위적인 느낌을 아직도 나는 잘 못따라간다. 정확히 얘기하면, 그 때보다 용기가 줄어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아니다 싶으면, 그 때는 원고 바로 들고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속으로, 나는 언제나 이렇게 살겠다고 다짐을 했다. 지나간  시절의 얘기다. 그 때는 내가 30대였다. 지금 그렇게 하면, 주변 사람들이 너무 상처 받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본다. 좀 아니다 싶어도, 적당히 하고 마는, 그런 타협적인 자세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2.
다음 달부터는 직장 민주주의에 대한 책 작업을 시작힌다. 한겨레 신문사에 부탁을 받고, 한 달 정도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하기로 한 주제다. 이론 작업도 좀 더 정리를 해야 하고, 통계도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 분석 작업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 한 가지만 안다. 예전에 썼던 <조직의 재발견>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어서 쓰는 책이라는 정도. 그래서 이 주제가 나에게 오게 된 것이기도 하고. 그냥 맨땅에 헤딩하는, 그런 방식은 아니다.

지금 주저하는 것은. 스타일에 관한 문제다.

이것도 어지간히 슬픈 얘기고, 눈물 몇 번은 찔끔 나는 주제다. 회사도 좀 그래요, 그런 얘기다. 그리고 좀 잘 해보자, 그렇게 결론을 낼까? 일단 나부터도, 그런 얘기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겠지만 그걸 굳이 책으로 읽어야 하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무슨 엄청난 분석을 해서, 아무도 몰랐던 얘기들을 '턱'하고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 분석의 성공으로는 <국가의 사기>를 뛰어넘기 어렵다. 그건, 그렇게 구성된 책이었다.

그래도 왠만하기는 할텐데, 내가 읽고 싶지 않은 책이 될 위험이 높다. 저자로서, 나도 모르는 결과가 분석을 통해서 나오기를 바라고, 서술 과정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요소들을 발견하거나, 생각지 못했던 결론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게 아니면, 그냥 식빵 믹스 넣고 제빵기에서 빵 만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냥 이제는 세보는 것도 귀찮은 출간 목록에 한 줄 더 넣는 일에 불과하다. 그렇게 기록세울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낭비하기에는 내 인생도 아깝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거기서부터 내 고민이 시작된다. 안해본 방식, 더 힘든 방식, 그런 걸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안 그러면, 내가 재미가 없다. 이미 수없이 했던 일을 약간의 변형만 가지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일을, 내가 왜 해야하느냐? 그렇게 할 거면, 나는 굳이 책을 쓸 이유가 없다.

하여 지금 고민 중인 것은...

직장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팍 깨게 웃기는 구조를 잡을 수 있느냐는 것. <농업경제학>은 나이를 먹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잡기로 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소한 이 정도에 해당하는 형식이나 양식 실험을 해볼 수 있을까, 그런 게 지금 직장 민주주의라는 주제 앞에서 내가 하는 고민이다.

회사, 그거 겁나게 드럽고 치사한 거야...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책을 쓰는 것은 미친 짓이다. 자, 우리 같이 손잡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 보..아..요.. 내 나이가 50이다. 이런 말랑말랑하고 무의미한 결론을 내기 위해서 300페이지가 넘는 글을 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웃으면서 읽기에 좀 더 편안한 양식이 없나, 지금 고민 중이다. '사장님 나빠요', 요거 보다는 좀 더 나가야 할 것 같은. 근데, 생소한 작업이라서, 나도 선뜻 뭐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여전히 고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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