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우석훈)

 

1.

2000년 가을에 헤이그에 2주 정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정부 대표로 UN 협상에 나서던 시절의 일이다. 청와대가 나한테 주었던 미션은 클린턴이 DJ에게 보낸 친서에 대한 뭔가 좀 폼 나는 후속 조치를 발굴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는 나에게 좀 더 명확한 지침을 주었다.

 

"네도(NEDO - 일본신에너지기구)보다 나은 행사를 진행할 것."

 

헤이그는 이준 열사 얘기 외에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상태로 갔다. 비행기로 물건을 옮겨야 하니까 엄청난 장비를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얇은 낚싯대와 휴대용 조명틀을 결합시킨 팜플렛 전시대를 수원 어딘가에 있는 작은 부품 회사에서 미리 만들어 가지고 갔다. 당시만 해도 정부에서 운영하는 설명 부스라는 게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고, 실제 용무가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명함 교환하고 약간의 인사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지금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조잡한 전시대였지만, 일본 산업부가 한국한테 홍보전에서 밀렸다는 데 좀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하여간 그 때 협상가들 사이에서 이 부스가 약간 시선을 끌었다. 한국이 어떻게 생각하고 선택할 것인가, 관심 갖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쨌든 그 시즌에서 아직은 무명이던 내가 전문 협상가로 약간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다음 시즌부터는 총리실 소속으로 협상에 가게 되었고, 분과 의장을 하게 되었다. 선거에도 나가서, 아시아 대표 중의 한 명이 되기도 하였다. 헤이그에서 마라케시 그리고 뉴델리까지 이어지는 그 몇 년이 공식적인 내 삶에서 가장 화려한 때였던 것 같다.

 

그 시절에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아직 아픈 데도 없고, 각막도 아직은 멀쩡해서 소프트 렌즈를 끼어도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DJ가 정권을 잡았던 국민의 정부, 그 정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게 안에서 충돌하는 것도 거의 없었다. 만약 그 시절이 MB나 박근혜 시절이었다면, 속에서 부대끼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희미해져 간다. 내가 내려놓고 온 자리라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그립지는 않다. 무엇보다, 기억들이 점점 흐려져 간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강렬했던 기억들도 억지로 기억해야 잠깐 기억나지, 일상 속에서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헤이그를 지금 돌아보면 다른 장면이 기억난다.

 

일요일 오후, 사람들이 유명한 온천에 간다고 해서 나도 그냥 따라갔다. 요즘 패션 용어로 하면 잇 아이템, 뭐 그런 거라고 했다. 이천의 미란다 온천보다는 좀 덜하지만 유럽임을 감안하면 굉장히 화려한 대중 목욕탕이었다. 가운데 진짜로 수영을 할 수 있는 좀 넓은 풀이 있다.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여기가 남녀가 같이 들어가는 곳이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는 대중 목욕탕이 없다. 독일 온천도 남녀 구분이 없기는 하지만, 내가 가본 곳들은 대개 작았다. 그리고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조용히 한쪽 구석에 박혀 있으면 특별히 문화적 충격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헤이그는 좀 달랐다.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진짜로 넓은 풀에서 수영을 했다. 이걸 어색해하는 게 맞는지, 어색해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때의 난감했던 순간이 가끔 기억에 난다. 단어를 선택하기도 어렵다. 나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연스럽고, 누드라고 하기에는 느낌을 전달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벗은 몸이라고 하기에는, 일상적이지 않다. '태초의 아담과 이브와 같은', 이런 표현은 너무 호들갑스럽다.

 

그 때 나도 옷을 벗고 온천의 엷은 푸른 빛 대형 통문창 너머로 바라본 북해의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북해의 유전에 관한 내용을 읽을 때, 내 머리에서 떠오른 북해가 아직도 그 모습이다. 난감하든, 곤란하든, 하여간 뭐라고 표현하든 그 때의 곤혹스러웠던 순간이 나에게도 어지간히 강렬한 기억이었던 것 같다.

 

이 느낌이 선진국을 보았을 때의 특별함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문화권의 충돌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가끔 생각해보게 된다. 파리에서 6년 반을 살았다. 부활절 휴가를 즈음해서, 드디어 파리에도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잔디밭에 사람들이 옷을 전부 벗고 태양 아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나도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처럼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그런 추위는 아니다. 기온으로는 대부분의 겨울 기간이 0도 이상이기는 한데, 우산을 쓰기도 좀 애매해서 결국 맞게 만드는 그런 실비가 자주 내린다. 그리고 해가 내려 쬐는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도 오후 4시쯤 지나면 해는 이미 저버릴 준비를 한다. 손이나 발이 시려운 게 아니라, 뼈가 춥다. 노르망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그나마 파리는 좀 낫다는 거다. 류마티즘 환자가 왜 많은가, 그런 얘기를 할 정도로 으슬으슬 춥다. 그러다 드디어 태양이 비추는 계절이 오면, 옷 아니라 옷 할아비라도 벗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햇살이 그립다.

 

그런 데에는 꽤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헤이그 온천에서 만났던 그 장면의 당혹스러움은 몇 배를 뛰어넘었다. 네덜란드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그런 게 고민이란다. 몇 년 지나니까 온천에 가는 것은 즐거운 일인데, 한국인을 만나면 당황스럽단다. 네덜란드라는 장소, 자기들끼리는 익숙한 네덜란드의 문화, 여기에서 느닷없이 알몸으로 만나게 된 한국인 남과 여, 당황스러울 것 같다. 그리고 피하고 싶은 장면일 것이다. 헤이그에서 어쩔 수 없는 당황스러움을 경험한 이후로, 외국에서는 온천을 아예 안 가게 되었다.

 

네덜란드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은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OECD 일반 국가보다는 조금은 더 안다고 생각을 했었다. 내가 본 그 어느 책이나 글 귀에도 북해가 보이는 헤이그의 온천 문화에 대해서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선진국에 대해서 내가 뭘 알고 있을까? 어쩌면 잘 모를지도 모른다. 경제는 몸이 입는 옷 같은 것이다. 옷을 보면 신분과 재산을 조금은 알 수 있다. 문화는 영혼이 입는 옷 같은 것이다. 영혼이 보이지 않듯이, 문화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똑같이 옷을 벗고 들어온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문화를 처음 보았던 것 같다.

 

2.

네덜란드가 우리나라에서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논의된 것이 한 번 있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네덜란드 모델'이라는 이름으로, 고용의 유연성은 높이고, 사회적 훈련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서 청와대가 대대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그 때 스웨덴 전문가, 프랑스 전문가, 독일 전문가, 이런 유럽의 각 국을 꿰뚫고 있는 듯한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네덜란드 모델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네덜란드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아는 것들은 우리의 많은 지식들이 그렇듯이, 피상적이다. 때때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을 분류하고, 그 차이점들을 비교해서, 우리에게 맞는 방법을 찾자는 시도가 있다.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알기 어렵다. 만화 <은하철도 999>의 오프닝 송의 목소리로 훨씬 더 잘 알려진 김국환이 노래 <타타타>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선진국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렇다. 유럽이라고 해도 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다. 그리고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도 일괄적이지 않다. 굉장히 많은 나라들을 1인당 국민소득이라는 잣대 하나를 들이대고 여기는 선진국, 여기는 개도국, 그렇게 얘기하고 분석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무례할 뿐더러 비과학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경제는 조금은 알 수 있다. 문화는 정말로 알기 어렵다. 파푸아뉴기니의 트로브리앤드 제도에서 원주민 연구로 유명해진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라고 정말로 그 원주민들의 문화를 이해했을까? 그의 연구는 이후 수많은 인류학자들의 1차 자료 역할을 했지만, 그도 원주민들을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경제로 줄을 세우면, 우리는 이제 선진국이다. 경제는 옷 같은 것이다. 경제라는 옷을 걸치면 우리는 선진국 국민이 된다. 그리고 그 옷을 벗으면? 선진국 국민이든 그렇지 않은 국민이든, 옷을 벗고 따뜻한 온천 물 안에 들어가면 별 차이 없다. 그래도 미세하게 알 수 있지 않느냐고? 그것을 철학적으로는 편견이라고 부른다. 그래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면, 그건 오만이라고 부른다. 모른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내가 인종주의자가 아니거나, 겸손하거나, 아니면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게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가 구조주의를 만들면서 가졌던 기본 가정이다. 사람은 다 같은데, 언어와 제도 혹은 경제와 같은 구조틀 안에서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구조주의 특히 후기 구조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전히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근본적인 평등주의자이다. 내 앞에 선 사람은, 그 사람이 선진국 국민이든 저개발 국민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다. 무시하는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지나치게 깍뜻하게  대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게 나의 예법이 되었다. 사장들이나 장관들은 날 싫어한다. 쟨 뭔데 저렇게 목이 뻣뻣해? 나는 10대나 20대를 만나도 반드시 존댓말을 쓰고, 할 수 있는 한 진심으로 대하려고 한다. 나와 반대로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들이 다 인생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델이 되고, 케이스가 된다. 1인당 GDP 3만 달러는 그런 의미다. 아랫 사람 쥐어짜고, 가난한 사람들 쥐어짜는 우리의 방식이 얼마나 더 오래 갈지, 얼마나 더 멀리 갈지, 아직은 의구심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여기까지만이라도 오고 싶다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좋든 싫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우리의 문화다. 지금 우리는 분기점에 서 있다. 10년 전 우리 앞에 서 있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들보다는 트로트를 덜 좋아하고, 홍준표를 덜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만큼 우리도 군사 문화에 익숙하고, 가부장제가 편안하다. 10년 후에 이 자리에 올 지금의 40대들, 그들은 우리 보다는 군사 문화에 훨씬 덜 익숙하다. 80년대, 전투경찰의 군대식 1자형 대열 혹은 다이아몬드 대열에 맞서, 우리도 군집진, 장사진, 원형진, 다양한 방식의 군대식 진을 짰다. 군대와 군대가 부딪혔다. 저 쪽에서 백골단이 뛰어나올 때, 이 쪽에서는 '애국청년'들이 꽃병 들고 본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같이 뛰어나갔다. 상처는 남는다. 그 상처는 흔적이 된다.

 

지금의 40대는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전면적 전투가 사그라진 이후다. 그 시기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다양성이 튀어나왔고, 김광석을 밀어내고 서태지가 들어섰다. 돈만 있으면 외국에 자유롭게 갈 수 있게 되었고,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나이에 외국에 그렇게  MT 가는 기분으로 가보지 못했다. 그들이 대학에 가려고 할 때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이 나왔다. 그들만큼 대학입시 줄세우기에 거부감을 가져던 세대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뒤에도 그런 흐름은 없었다. 행시를 사모하지 않았고, 공무원을 그리워하지 않았고, 군인은 물론 운동권 투사에게도 열광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상처가 남았다. 경제, IMF 경제위기는 그들의 다양성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 것 같다.

 

이게 지금의 기성세대 혹은 곧 기성세대가 될 사람들이 겪었던 문화이고 사건이다. 그 수많은 논쟁과 비관적 예측 속에서도 나는 늘 낙관적이었고, 우리의 미래를 밝게 생각했다. 그건 10년 후, 앞으로 50대가 될 지금의 40대들이 우리 보다는 덜 군사문화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집단적으로 덜 획일적이고, 더 유연하다. 물론 그들도 50이 되면 변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 시대보다 사회의 문화는 더 나아질 것이다. 그게 내가 가졌던 낙관의 근거다. 많은 내 친구들은, 우리의 후배들이 운동을 계승하지 않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도 투철하지 않고, 너무 자기중심주의적이고, 이런 이유들로 우리의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한동안 우리의 미래가 아주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의 생각이 과연 옳았는지, 그건 아직은 알 수 없다. 우리가 80이 되었을 때, 그 때 다시 생각해보면 좀 더 분명해질 것 같다.

 

3.

공상과학영화에 미래의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그 시기에도 버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코카콜라다. 그리고 가끔 소니도 나왔다. 요즘 만들어지는 미래 영화에 소니가 나올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이폰과 함께, 소니도 버티기 어려워졌고, 삼성LG 이후로 소니 TV의 시대도 갔다. 엘빈 토플러의 등장 이후,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 기술주의 관점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 기술은 변화하지만 사람들은 많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는 그보다 더 조금 변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풍경 중에서 30년 후에도 남아있을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여의도 한 가운데 있는 국회, 저건 저 자리에 있을까? 세종시로 행정부가 이전한 이후 국회도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국회 분원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저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미세먼지 가득한 한강 너머로 서강대교 위를 넘어다니는 차들을 보고 있을 것이다. 삼성, 현대, 이런 회사들은 그 때까지 남아있을까? 외국에서는 골드스타라고 불렀던 회사가 있었던 것을 아는 청년이 얼마나 될까? 금성사, 그게 LG의 바로 그 G. 모를 일이다. 심지어 30년 후에 우리에게 대통령이라는 말 자체가 남아있을지도 아무도 보장 못한다. 의원내각제가 도입된다면 더 이상 대통령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비행기에서 한국의 상공을 내려다본 사람들이 흔히 한국적인 것으로 지적하는 것은 바짝바짝 붙어있는 아파트다. 이건 정말 한국적이다. 이건 30년 후에도 남아있을 것이다. 더 붙으면 더 붙지, 갑자기 아파트들이 줄어들거나, 좀 더 먼 이격거리를 두고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 위에서 본 우리 모습에는 밭떼기가 보인다. 소농 중심의 가족 농업 그것도 규모가 크지 않은 한국의 조방적 농업이 보여주는 특유의 모습이다. 이건 30년 후에도 남아있을까? 모른다. 농업이 어느 정도로 버틸지도 불확실하고, 대기업 중심의 기업농으로 바뀔 수도 있다.

 

비행기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땅에 발을 딛고 한 발 한 발 걸어가면 보이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뭐가 있을까? 밤마다 줄이어 서 있는 교회의 십자가 그리고 그 보다 더 많은 편의점...

 

"But the Way                그런데 말이지

Seven-Eleven                7시부터 11시까지, 11시부터 7시까지

Day and Night              자본은 해가 지는 법이 없지, 깜박 깜박

Circle K                       계속해, 계속 돌아가야 도태되지 않는데

LG 25                         카운터의 청년은 졸린가보다"

 

('관록 있는 구두의 밤 산책',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시인 최영미가 한국에 막 생겨나기 시작하는 편의점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전까지, 나는 편의점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 마음 속에 있던 그 불편함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최영미의 시를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무디고 둔하고, 직관 같은 것들을 소홀히 여기고 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언제든지 들러다오, 편리한 때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아무 데나 멈추면 돼

(최영미 '24시간 편의점')

 

프랑스 쪽 알프스 지역의 주요 도시인 그르노블에 몇 달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6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이고, <적과 흑>을 쓴 스탕달의 도시다.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오전까지는 여는 가계가 없다. 시내에 가면 몇 군데 열기는 했는데, 버스가 거의 없다. 영국 코벤트리에 있는 워릭 대학에서 토요일날 하루를 묶고, 일요일날 버스를 타려고 했다. 런던에 가야 한다. 버스가 너무 안 와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투다이스 선다이", 순간 당황했다. 런던식 영어 억양에는 그래도 좀 익숙해져 있었는데, 영국 지방의 투박한 영어는 사실 처음이었다. 죽기 위해선, 태양이 죽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아저씨는 한 번 더 나에게 같은 말을 해주었다. 그 때야 알아들었다. Taday is sunday,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일요일 날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면? 그래도 다 살아간다. 쮜리히에 한 달 정도 머물 때, 초반에는 정말 익숙하지 않아서 고생을 했다. 나도 너무 대도시에서만 살았고, 번화한 곳에서만 살았던 것 같다. 6시 즈음이면 슈퍼마켓이 거의 문을 닫고, 7시가 넘으면 동네 구멍가계도 문을 닿는다. 시내 아주 번화가에 가야 문을 연 식당이나 카페 같은 데가 있다. 독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베를린 같은 대도시의 번화가에나 문을 연 술집들이 있지, 조금만 민가 쪽으로 들어가면 열어놓은 가계가 거의 없다. 독일 맥주집에서 바로 그 독일 맥주를 마시지 돌아왔다고 아쉬움을 얘기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원래 그렇다.

 

90년대 초반 파리 샹젤리제에 영국계 매장인 버진이 들어올 때, 정말로 프랑스 전체가 찬반 논쟁에 들어갔다. 영국 회사라서 그런 건 아니고, 12시까지 가계문을 열겠다는 버진의 영업 방침 때문에 그렇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버진은 프랑스의 심장이라고 하는 샹젤리제에 매장을 열었다. 10년을 못 버티고 결국에는 철수하게 되었다. 12시까지 문을 연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 전에 집에 들어가는데, 떼돈 벌기는 어렵다.

 

편의점이 제일 잘 발달한 나라는 일본이고, 그 다음이 한국일 것이다. 편리, convenierce를 파는 가계, 편의점이 잘 발달한 나라가 사실은 편한 나라들은 아니다. 사람들은 일찍 일찍 집에 들어가고, 해가 지면 집에 가거나 연애를 하거나, 아니면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는 나라, 이런 데는 편의점이 거의 없다. 대형 마트도 시내에서 멀리 있고, 골목에 있는 슈퍼도 그렇게까지 밤 늦게까지 열어놓지 않는다. 그러면 불편해서 어떻게 해? 1인당 소득 7만 달러, 8만 달러, 그렇게 간 나라들은 대부분 이렇다. 편의점 없어서 조금 불편할지 몰라도, 사람들 삶은 훨씬 더 편하다. 해지기 전에 일 끝내고, 일 년에 한 달 이상 휴가 간다. 저녁이 있는 삶 정도가 아니라, 점심도 집에 가서 먹는 게 최근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 편의점이 있어서 편한 나라와 편의점이 없어도 편한 나라, 두 가지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이다.

 

너무나도 바쁘게 돌아가면서 쥐어짜고 쥐어짜서 선진국이 된 한국, 이 모습은 낯설다. 우린 아직 일을 너무 많이 하고, 또 너무 바쁘다. 50이 되면 슬슬 은퇴를 준비하면서 퇴직 후 연금 생활을 계획하기 시작하는 선진국 국민의 모습과 달리, 전전긍긍하며 퇴직 후의 날들만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 좀 이상한 선진국 중산층 50대의 모습, 낯설다.

 

30년 후, 여전히 우리에게 편의점은 도시 생활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샹젤리제에 진출한 영국의 버진처럼 결국은 뒤로 물러나게 될 것인가? 그 시절의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 전에 읽는 책이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이었다고 한다. 그 여운이 아직도 남는다. 50대 편의점 사장과 20대 편의점 알바가 최저임금을 놓고 첨예하게 만난다. 그 편의점은 앞으로 30년 후에 어떻게 될까? 그게 우리가 지금부터 걸어가는 삶의 미래다. 아직은 어색한 선진국, 그곳에서 우리의 21세기는 이제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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